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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 풀랑크
자유를 갈망하고, 사랑을 노래하다
글 이장직(서울대 서양음악연구소 특임연구원) 9/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9월호 - 전체 보기 )




▲ 1960년 뉴욕에서 ⓒGetty Image


1899 프랑스 파리 출생

1917 ‘흑인 랩소디’ 초연


1924 발레 ‘암사슴’ 초연

1932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초연

1939〜1945 프랑스 저항운동 참여

1947 오페라 ‘테이레시아스의 유방’ 초연

1957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초연

1963 사망



런던의 출판사 파이돈에서 나온 단행본 시리즈 ‘20세기 작곡가’에 등장하는 프랑스 작곡가는 드뷔시·라벨·포레 등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시스 풀랑크(1899〜1963)도 여기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 6인조(Les Six)’ 중 시리즈에 포함된 유일한 작곡가다. 난해한 기법의 아방가르드 음악이 아니면 작곡가로 행세하기 힘든 시절에 자신이 믿는 음악 세계를 꿋꿋이 지켜나간 독보적 입지가 요즘 들어 더욱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풀랑크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고집했다.

풀랑크의 대표작인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는 2011년 5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오페라다. 1957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이탈리아어 번역으로 초연되었으나 대개 프랑스어 버전으로 상연된다. 프랑스혁명 당시 자행된 종교 탄압으로 끝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카르멜회 수녀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와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오페라로 손꼽힌다.

그는 악보의 서문에서 무소륵스키·몬테베르디·베르디·드뷔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조성 음악으로 작곡한 것에 대해서는 “수녀들이 부르기에 적합할 것 같아서”라고 핑계를 댔다. 하지만 이 작품은 푸치니 이후 20세기 오페라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지난해부터 올해 말까지만 해도 뉴욕·런던·파리·스톡홀름·모스크바·토론토·뒤셀도르프·볼티모어·리옹·세인트루이스 무대에 초청 받았다.

‘테이레시아스의 유방’은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비롯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1999년 풀랑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했다. 유방은 여성에게 성적 매력의 상징인 동시에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안겨주는 사회적 굴레다. 집에서 가정부 취급을 받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테레즈는 유방을 제거한 후 이름을 테이레시아스로 바꿔 전쟁터에 나가고, 그의 남편 마리는 홀로 하룻밤에 4만49명의 아이를 낳는다는 내용의 초현실주의 코믹 오페라이다.

풀랑크는 탁월한 멜로디스트다. 무엇보다 자신이 노래 부르기를 무척 좋아했다. 변성기 이후에 포기하긴 했지만 어릴 때 꿈은 성악가였다. 137편에 이르는 가곡뿐만 아니라 기악곡에서도 탁월한 선율미가 돋보인다. 한 번만 들어도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중독성이 강하다. 여기에 명쾌함·관능미·유머 감각·섬세함까지 갖추었다. 그는 전형적인 프랑스 작곡가이다.

생계형 작곡가로서 시작, 그리고 성공

풀랑크는 1899년 1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화학 공장을 경영했는데, 이는 현재 글로벌 제약 회사인 론풀랑크의 모체다. 아버지는 베토벤을 좋아했고, 풀랑크를 데리고 음악회도 많이 다녔는데 오페라극장에서도 맨 앞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외삼촌은 연극과 미술에 심취했던 아마추어로 유명 성악가들과도 알고 지냈다. 어머니는 모차르트·슈만·쇼팽·슈베르트를 즐겨 연주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다.

풀랑크는 네 살 때부터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의 조카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10대 소년 시절부터 쇤베르크의 ‘6개의 모음곡’, 버르토크의 ‘알레그로 바르바로’ 등 현대음악 악보를 가까이했다. 스트라빈스키와 드뷔시의 영향을 받아 여러 곡의 습작을 남기기도 했다. 에리크 사티의 영감을 받은 습작도 있다. 사티는 풀랑크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싶어 정규 학업만 강요하였다.

열여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2년 뒤 아버지도 뒤를 이었다. 고아가 되었지만 작곡가를 꿈꿨던 풀랑크에겐 자유가 생긴 셈이다.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했지만 어릴 때 유복했던 환경 때문에 씀씀이가 커서 평생 남보다 더 열심히 벌어야 했다. 그의 음악 활동은 돈을 벌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출발했다.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적 압박 때문에 오선지와 피아노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 후 파리음악원 문을 노크했지만 작곡과 교수는 풀랑크가 들고 온 악보 표지에서 ‘에리크 사티에게 바침’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스트라빈스키와 사티 같은 깡패가 왔다며 꺼지라고 호통을 쳤다. 풀랑크는 대신 개인 교습으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열네 살 때부터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스페인 출신으로 파리음악원을 졸업한 비녜스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물의 유희’ ‘밤의 가스파르’ 등을 초연했다. 드뷔시 해석에도 권위자였다. 풀랑크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풀랑크의 작품을 초연했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풀랑크의 정신적 멘토였다.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비롯한 러시아 작품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장 콕토·앙리 콜레·막스 야콥·피카소 같은 작가들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풀랑크에게 사티·파야 등의 작곡가를 소개해주었다. 그는 아르튀르 오네게르·다리우스 미요·조르주 오리크·저메인 타이페르 등이 풀랑크와 결성한 프랑스 6인조의 숨은 공로자다.

공개 연주회에서 처음 발표된 풀랑크의 작품은 성악과 피아노, 여섯 대의 악기를 위한 ‘흑인 랩소디’(1917)다. 그러나 이는 풀랑크의 이름을 알리기에 역부족이었다. 파리음악원 입학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풀랑크의 출세작은 발레 ‘암사슴’이다. 20세기 초 프랑스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디아길레프가 위촉했다. 몬테카를로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암사슴’의 성공에 힘입어 풀랑크는 파리 사교계에 진출했다. 프랑스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폴리냐크 공작부인의 살롱에서 초청장을 받았다. 음악회에 참석해 함께 연주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자는 것이다. 폴리냐크 공작부인은 미국 태생으로, 재봉틀을 발명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발명 특허 이익 배당금 등 막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귀족 출신의 작곡가 에드몽 드 폴리냐크와 결혼해 파리의 살롱 문화를 이끌었던 레즈비언이다. 그녀의 남편 폴리냐크도 동성애자였다. 폴리냐크 부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전쟁 통에 어수선하던 세기말 프랑스 음악의 대모 역할을 자처했다. 특히 피아노 음악을 좋아했던 그녀는 미요·드뷔시·라벨·알베니스·포레·샤브리에·사티·스트라빈스키·불랑제 등에게 작품을 위촉해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폴리냐크 부인은 프랑스 6인조 결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풀랑크는 1920년대에 줄곧 폴리냐크 부인의 살롱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1932년 베네치아 음악제에서 풀랑크와 자크 페브리에의 협연으로 초연된 풀랑크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도 폴리냐크 부인의 ‘작품’이다.

 

만남·연인·염문·사랑

풀랑크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예술에 깊은 영향을 준 예술가 세 명을 꼽았다. 피아니스트 반다 란도프스카, 바리톤 피에르 베르나크, 시인 폴 엘리아르 등이다. 란도프스카는 풀랑크의 ‘전원 협주곡’을 초연했으며, 베르나크는 풀랑크의 피아노 반주로 그의 가곡을 초연했다. 1926년에 처음 만난 바리톤 피에르 베르나크는 잘츠부르크에서 독일 가곡을 공부한 성악가다. 풀랑크와 25년간 환상의 콤비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풀랑크는 1934년부터 25년간 무려 90여 개의 가곡을 작곡했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에 붙인 곡이 대부분이고, 베르나크가 모두 초연했다. 독창회 프로그램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라도 신작 가곡이 필요했다.

풀랑크는 사람의 목소리를 좋아했고 자신도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 즐겼다. 그는 프랑스어의 낭독법에 대한 세련된 감각을 소유했다. 그의 가곡에서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유려한 선율뿐만 아니라 이 자연스러운 낭송 때문이다. 주옥같은 그의 가곡 선율은 가사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목소리에 무한한 매력을 느꼈다. 프랑스 가곡사에서도 그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가곡은 풍자적이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문학소녀 레이몽 리니시에는 풀랑크가 문학에 관심을 갖도록 한 은인과도 같은 존재다. 풀랑크는 레이몽과 함께 오데옹 거리에 있는 유명한 책방을 드나들었다. 그는 ‘책의 친구들(Aux Amis Livres)’이라는 카페에서 기욤 아폴리네르·앙드레 지드·폴 발레리·폴 클로델·앙드레 브르통 등 당시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났다. 그뿐만 아니라 파블로 피카소·조르주 브라크·아메데오 모딜리아니·마리 로랑생 등의 화가들과도 교우를 나누었다. 레이몽은 풀랑크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유일한 여성이었지만, 그녀는 풀랑크가 서른한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풀랑크는 나중에 프레드리크라는 여성과 잠시 염문을 뿌렸고, 둘 사이에 마리 앙주라는 딸까지 두었다.

하지만 풀랑크는 동성애자였다. 자신에게 그런 기질이 있음을 깨달은 것은 20대 말이었다. 열차 안에서 만난 열 살 아래의 세일즈맨 뤼시엥과 6년간 함께 지냈으나 뤼시엥은 1955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위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던 풀랑크는 한동안 오선지와 펜을 멀리하다가 마지막 연인인 잡역부 고티에르를 만나 창작혼을 다시 불태웠다. 이렇게 해서 플루트 소나타가 탄생했다. 오페라 ‘인간의 목소리’는 콕토의 대본으로 쓴 단막 오페라다. 콕토 역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동성애자로, 50년 가까이 풀랑크의 친구였다.

연주회 무대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풀랑크의 작품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다. 매력적인 선율과 통렬한 불협화음, 변덕스러운 리듬이 잘 어우러져 해학과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음악이다. 풀랑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분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할 음악”이라고 말했다.

풀랑크는 피에르 불레즈·레너드 번스타인 등 후배 작곡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번스타인은 1962년 뉴욕 링컨센터 개관 기념 공연 때 뉴욕 필하모닉이 초연할 작품을 풀랑크에게 위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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