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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암스트롱❷
재즈의 대중화를 이끈 행복한 광대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 7/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7월호 - 전체 보기 )




재즈와 팝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루이스 암스트롱. 흑인 음악에서 시작된

그의 음악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아우르며 폭넓게 펼쳐졌다


연주자로 독립하기 위해 시카고로 가다

루이스 암스트롱은 살아생전 자신의 출생일을 1900년 7월 4일로 공언하고 다녔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 그의 생년월일은 유람선에서 연주하기 위한 징집 카드에 스스로 기입한 것을 바탕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재즈 역사학자인 사디어스 버놀 존스는 루이스 암스트롱에 관한 자료를 연구하기 위해 뉴올리언스 침례교회의 세례 명부를 확인하던 중 출생확인서에서 암스트롱이 1901년 8월 4일에 태어났음을 밝혀냈다.

루이스 암스트롱이 태어날 당시 그의 생부 윌리엄 암스트롱은 빈민가의 날품팔이 노동자였으며, 어머니 매리 앨버트는 16세가 채 되지 않은 미혼모였다. 아버지는 암스트롱이 걸음마를 익히기도 전에 가정을 버렸고, 어머니는 매춘을 생업으로 이어가며 아들의 양육을 책임져야만 했다. 암스트롱은 매춘굴에서 생활하며 석탄·폐품을 팔아 나르며 가계를 도왔다. 11살 때 학업을 그만두어야 했던 그는 또래 아이들을 모아 4중창단을 조직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동전을 모으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이웃에 사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가족 카로노프스키 일가로부터 코넷을 선물 받았고, 그는 독학으로 코넷 연주를 익혔다. 힘든 환경에서도 밝게 성장했던 루이스 암스트롱은 1913년의 마지막 날 밤, 의붓아버지의 권총을 공중에 쏘아대는 위험한 장난 때문에 18개월 동안 뉴올리언스의 흑인소년보호소의 감호를 받았다. 이곳 소년원은 그의 첫 번째 음악학교가 되었다. 소년원의 브라스 밴드 마스터였던 피터 데이비스로부터 기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고, 암스트롱은 가난과 범죄에 찌든 빈민가를 탈출하기 위해 코넷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감호소에서 나온 이후에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거목 킹 올리버에게 음악을 배웠다.

1918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첫 번째 결혼을 한 루이스 암스트롱은 뉴올리언스의 거리와 살롱에서 연주를 시작했으며, 뉴올리언스 재즈 신의 거물이던 벙크 존슨·키드 오리, 그리고 그의 오랜 음악적 영웅 킹 올리버와 협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해 재즈의 중심지였던 뉴올리언스의 스토리빌(사창가)이 철거됨에 따라 새로운 시장을 찾아 시카고로 이동하게 된 킹 올리버는 루이스 암스트롱과 키드 오리에게 자신의 밴드를 이양한다. 그 후 암스트롱은 오르간 연주자 페이트 마라블이 이끄는 밴드에 합류해 미시시피 강을 횡단하는 유람선 연주를 3년 동안 계속했다. 그는 유람선에서의 활동 기간 동안 악보 읽는 법과 편곡 기법을 익힐 수 있었다. 1921년, 스무 살이 된 암스트롱은 키드 오리의 밴드로 복귀한다. 편곡자 플레처 헨더슨의 권유로 1922년부터 뉴욕에서 연주 활동을 하면서 그는 최고의 코넷·트럼펫 연주자로 유명세를 떨쳤다. 폴 화이트먼·듀크 엘링턴을 포함한 모든 밴드의 리더들은 그의 음악을 가까이 두고자 했다. 암스트롱은 코넷·트럼펫 연주 외에도 자신이 개발한 특유의 기악적인 보컬과 스캣을 즐겼으며, 1925년에는 자신의 독립적인 활동을 위해 시카고로 향했다.

재즈가 대중의 지지를 얻기까지

시카고에 정착한 루이스 암스트롱은 그의 스승 킹 올리버에게서 벗어나 자신이 온전히 통제하는 소규모 밴드인 캄보밴드 핫 파이브와 핫 세븐을 결성한다. 여기에는 그의 두 번째 아내 릴 하딘 암스트롱이 참여했고, 조니 도즈와 키드 오리를 포함한 5~7명의 유동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졌다. 레코딩을 통해 보다 진화된 음악적 개념의 재즈 연주를 도입한 이들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암스트롱의 순도 높은 즉흥 연주, 솔로를 포함한 매력적인 보컬, 창의적인 스캣을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리듬과 화성, 솔로·앙상블의 모든 개념을 신천지로 옮겨다주었다. 암스트롱은 1926년 피아니스트 얼 하인스를 만나 그와 함께 최고의 음악적 하모니를 형성했다. 종래의 재즈가 지니고 있던 관성을 탈피하고 보다 세련된 음악으로 재즈의 입지를 다지며 스윙의 묘미를 실천해보였다. 재즈가 감상의 영역으로 자리하는 한편, 대중적 지지를 누릴 수 있는 팝 뮤직으로 자리할 수 있게끔 기여한 루이스 암스트롱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평가였다.

1929년 루이스 암스트롱은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는 세 명의 흑인과 두 명의 백인으로 구성된 다인종 재즈 앙상블을 결성했으며, 미국과 남미에서 태어난 연주자들로 다인종의 10인조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이는 재즈가 세계의 음악이며 인종적 제한에 묶이지 않음을 천명했다. 뉴욕에서는 보다 상업적·대중적인 입장에서 노래·연주했던 암스트롱의 활약에 힘입어 재즈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팝 음악의 다양성도 진행될 수 있었다.

암스트롱이 계발한 스캣은 빌리 홀리데이·엘라 피츠제럴드를 포함한 수많은 재즈 보컬리스트들이 앞 다투어 모방하는 상품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활동했던 빙 크로즈비·프랭크 시나트라 등 남성 보컬리스트의 달콤한 창법에도 루이스 암스트롱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 미국 재즈의 황금기를 열었던 전설의 3인. 루이스 암스트롱·엘라 피츠제럴드·리오넬 햄프턴 ⓒMichael Ochs

예순의 나이에 맞은 인생 최고의 전성기

1930년대 중·후반 스윙 재즈의 열풍으로 미국 전역이 들끓던 당시 루이스 암스트롱은 베니 굿먼·글렌 밀러·듀크 엘링턴·카운티 베시와 함께 스윙 재즈의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마피아 알 카포네와도 친분이 있던 수완 좋은 매니저 조 글레이저와 계약하고, 공연·레코딩 활동 외에도 뮤지컬·영화의 배우로 출연했다. 무대 위에서 하얀 잇몸을 드러내고 웃으며 익살스런 농담을 던지고, 하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연주·노래했던 연예인 루이스 암스트롱에게 재즈는 좁은 공간이었다. 1940년대를 맞이하면서 스윙 재즈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지만 한편으로는 찰리 파커를 위시한 예술지향주의자들에 의해 비밥 재즈의 혁명이 가열되고 있었고, 재즈는 암스트롱의 의도와 달리 아티스트 중심의 예술로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즈가 새로운 문명으로 이동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1947년 뉴욕 타운 홀에서의 성공적인 공연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루이스 암스트롱과 올스타즈’라는 6중주단을 결성하고, 이들과 함께 미국 전역과 세계를 순회하는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얼 하인스·잭 티가든·바니 비가드·시드 캐틀릿 등이 참여한 올스타즈는 멤버 교체를 거듭하며 암스트롱의 마지막 활동까지 함께 했던 동반자였다. 재즈가 비밥과 쿨 재즈, 하드 밥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암스트롱은 자신의 음악적 뿌리였던 블루스와 가스펠·재즈뿐 아니라 ‘La Vie En Rose’ ‘Mack The Knife’ 같은 팝·뮤지컬·샹송 등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1954년 루이스 암스트롱은 20여 년간의 장기 계약을 맺었던 데카와 프리랜서로 다양한 레코딩에 매진했다. 그중에서도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대가 패츠 월러의 곡을 노래·연주했던 ‘Satch Plays Fats’와 재즈 보컬리스트 엘라 피츠제럴드와의 환상의 하모니를 자랑하는 ‘Ella And Louis’는 가장 빛나는 음악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백인 관객들 앞에서 보인 과장된 웃음과 제스처로 후배 재즈 뮤지션과 진지한 재즈 팬으로부터 “우스꽝스러운 엉클 톰”이라는 악평에 시달렸던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흑인들의 인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거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기부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1961년 예순의 나이에 이른 루이스 암스트롱에게 이 시간들은 새로운 전성기로 불려도 좋을 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가 즐비했던 나날이었다. 1964년 ‘Hello Dolly’는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을 제치고 빌보드 팝 차트의 정상을 누렸으며, 그해 그래미상의 최우수 남자 보컬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67년 싱글앨범 ‘What A Wonderful World’를 통해 다시 한 번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인한 그는 1971년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를 마지막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1971년 7월 6일, 뉴욕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자택에서 행복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접한 소련의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는 한 편의 시를 헌화하며 “천사 가브리엘이여. 루이스 암스트롱에게 트럼펫을 내려주세요”라는 구절로 그의 아름다운 삶과 음악을 표현했다.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는 암스트롱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며 그의 빛나는 음악적 유산에 감사를 전했다.

“나 자신이 청중입니다. 내가 광대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광대, 그거 대단한 겁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건 행복이지요. 그런 비평가들 대다수가 음도 구별 못합니다. 연주할 때면 나는 행복했던 시절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악은 저절로 나옵니다.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사랑해야 합니다.”


음반으로 만나는 루이스 암스트롱

Complete Hot Five & Hot Seven Recordings 


1925년부터 1928년까지의 여정을 통해 루이스 암스트롱은 자신의 시대의 개막을 본격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고전적인 뉴올리언스 재즈의 앙상블에서 탈피하여 독주에 보다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시도를 실천하기 위해 5중주와 7중주를 이용했다. 이 시기의 그는 코넷 주자에서 트럼펫 연주자로의 변신에도 성공했다.

Satch Plays Fats


이 앨범은 1950년대 초반부터 루이스 암스트롱이 전력투구했던 레코딩으로,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대가이자 그와 함께 초기 재즈 보컬의 한 축을 담당했던 패츠 월러의 히트곡을 연주·노래했다. 암스트롱의 깊이 있는 보컬의 멋과 농염한 솔로 프레이즈에는 과거 핫 파이브와 핫 세븐 시절에는 느낄 수 없던 원숙한 음악적 깊이를 맛볼 수 있다.

The Complete Ella Fitzgerald & Louis Armstrong


1956~1957년까지 세 차례 시도된 루이스 암스트롱과 엘라 피츠제럴드가 남긴 극적이고 탐미적인 하모니를 한데 모은 앨범이다. 남녀, 강함과 부드러움, 거침과 깨끗함의 대비와 조화가 밀도 있게 표현됨으로써 ‘인간의 목소리보다 더 훌륭한 악기는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인다. 피츠제럴드의 따뜻한 목소리와 유연한 프레이즈, 깊이와 감수성을 내장한 암스트롱의 보컬과 확신에 찬 트럼펫 연주가 수록된 불멸의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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