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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객석이 ‘마흔 한 살’ 국립합창단을 만나다
국립합창단 Since 1973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김선영 기자 7/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7월호 - 전체 보기 )



지금 이 페이지를 본 ‘객석’의 독자들이라면 의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 페이지에 왜 국립합창단이 나왔는가?”라고요.

‘국립합창단’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많은 무대에서 만날 수 있지만 실제로 이들의 존재감을 잘 느끼지는 못합니다. 사실 국립합창단은 정기공연과 기획공연보다 다른 예술단체와 함께 하는 공연에 더 많이 오르는 합창단입니다. 근래의 무대를 예로 들자면 지난 6월 정명훈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선보였던 때에 국립합창단의 노랫소리가 합창석에서 울려 퍼져 나왔죠. 살펴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화제가 되었던 교향곡과 오페라 공연에는 늘 그들이 함께 했습니다. 만약, 오페라와 교향곡, 칸타타와 합창곡 등으로 숙련된 국립합창단이 없었더라면 작년 화제가 되었던 국립오페라단의 ‘파르지팔’ 무대 또한 가능했을까요?

조금은 안타깝고 우스운 이야기지만 국립합창단이 여러분과 맞닿아 있는 거리를 정확히 말씀 드리기 위해 이런 예도 들어보겠습니다. 2013년에 서울시향이 베르디와 바그너의 명작들을 콘서트버전으로 선보였던 무대였습니다. 음악이 끝나고 박수와 갈채가 쏟아질 때 정명훈 지휘자와 함께 무대로 걸어 나오는 정장차림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기립한 서울시향과 국립합창단을 뒤로 하고 관객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표하는 이는 국립합창단을 이끄는 이상훈 예술감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평소 서울시향의 공연을 꼼꼼히 챙겨보는 저의 친구는 제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요.

이제 ‘객석’이 국립합창단을 왜 이렇게 담는가를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1973년에 창단된 국립합창단의 활동은 그 동안 ‘합창’만으로 국한되지 않고, 굵은 족적을 남기는 오페라와 교향곡 등의 무대에서 함께 해왔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합창계의 ‘효시’이자 음악계 전반의 ‘주춧돌’과 같은 존재로 한국음악사의 여러 무대를 장식해 왔죠. 또한 국립합창단의 지휘자와 단원을 거쳐 간 이들은 국내 음악계에 영양가 높은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국립합창단의 활동을 생각해본다면 그들의 존재감은 우리에게 크고 또 거대하게 다가와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렇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이렇게 한국 음악계에서 큰 역할을 해내고 있는 국립합창단을 그동안 ‘객석’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제, 서른 살이 된 ‘객석’이 마흔한 살인 국립합창단을 이곳에 담아 독자들과 그들의 무대를 지켜봐온 수많은 관객들에게 소개합니다. 앞으로 국립합창단의 이름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하지만 그들이 함께 하는 무대라면 ‘국립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지금보다 더 진하게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연 평균 60회 공연, 국립합창단 소개

국립합창단은 우리나라 합창음악의 전문성과 예술성 추구를 위해 1973년 창단됐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을 국내에 소개했으며,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동시대 창작곡 발굴에도 힘을 기울여 칸타타와 합창곡을 위촉하고 있으며, 공모를 통해 보다 다양하고 우수한 창작곡들을 발굴하여 보급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작품 개발뿐 아니라 한국적 특성과 정감에 걸맞는 해석법과 창법을 정립하여 한국 합창계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국내외 순회공연과 오페라·교향곡 찬조 출연 등을 포함해 연간 60여회에 이르는 공연을 소화하고 있으며, 유럽·미국·러시아·일본·중국 등지에서 갖는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 합창의 세계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그동안 초대 단장 나영수, 2대 배덕윤, 3대 나영수, 4대 오세종, 5대 염진섭, 6대 김명엽, 7대 나영수, 8대 이상훈 예술감독이 이끌었고 2014년 7월부터 구천 예술감독이 이끌 예정이다.

국립합창단의 사업

정기공연 연 5회의 정기공연을 통해 평소 접하기 힘든 정통 합창음악을 프로그램화 하고 있다. 이외에 가곡·민요·동요 등을 편곡해 발표하고, 신진 작곡가들에게 소품부터 대형 칸타타 등을 위촉하여 보급하는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기획공연 합창계의 젊은 지휘자 양성에 목적을 두고 2009년 시작된 ‘국립합창단 데뷔콘서트’ 시리즈를 비롯해 지난해 각각 제9회와 제3회를 맞이했던 전국고교합창경연대회와 합창지휘 경연대회를 매년 꾸준한 관심 속에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다. 지난 2012년 노년층을 대상으로 ‘전국 골든에이지 합창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합창음악의 저변확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방공연 ‘방방곡곡 문화공감’을 통해 재정자립도 40퍼센트 미만인 지방 문예회관 및 소외시설을 대상으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외 지방자치단체 및 공연장 연주회 초청으로 전국 각지의 관객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

공공행사 공익법인으로서 공공행사의 초청연주를 꾸준히 담당하고 있다. 3·1절 행사, 8·15광복절 기념행사, 대통령 이·취임식 등의 축하·추모공연을 주로 맡고 있다.

외부출연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서울시향·KBS교향악단·경기필하모닉·코리안심포니 등 유수의 예술단체들과 협업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해내고 있으며, 오페라 무대의 경우 주연의 아리아 못지않게 중요한 오페라 합창곡들을 소화하고 있다.

해외공연 매년 아시아·미주·유럽의 유수 음악제와 극장의 초청을 받아 순회공연을 선보이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독일에 꾸준히 초청받으며 그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지난해 한국·스위스 수교 50주년을 맞아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각국 외교 사절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펼친 바 있다.

교육사업 매주 토요일마다 국내의 권위 있는 합창지휘자·작곡가를 초빙해 합창지휘법, 장르별 합창해석, 지휘 마스터클래스 등과 국립합창단을 대상으로 한 지휘 실습, 유명 작곡가와의 만남으로 이뤄지는 합창지휘 아카데미를 통해 일반인·전문가들에게 합창음악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국립합창단의 41년 역사

이 글은 2013년에 국립합창단이 발간한 ‘국민과 함께 노래해 온 40년’에 게재된

나영수 전 단장의 ‘국립합창단 40년 회고’를 발췌·요약한 것입니다


창단과정 국립합창단 창단일은 세 가지로 알려져 있는데, 1973년 5월 17일과 1974년 7월 18일 그리고 1975년 1월 1일이다. 창단의 실제적 이유는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소위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 때문이었다. 당시 평양에 갔던 남쪽 인사들은 북쪽이 보여준 잘 훈련된 대형가무극을 보고는 놀라서 그 대응방법으로 비슷한 성격의 단체인 국립가무단(구 예그린악단, 현 서울시뮤지컬단)에 특별예산을 편성, 300명 규모로 확대하려 했다. 당시 국립극장장은 가무단을 200명으로 하고 나머지 100명으로 합창단을 만들어 뮤지컬·오페라·교향악단에 두루 쓰려고 했다. 그래서 국립극장의 여덟 번째 단체로 탄생한 것이 국립합창단이다. 전적으로 당시 국립극장장인 김창구 씨의 선견지명과 결단 때문이었고, 나는 오페라와 뮤지컬 양쪽을 안다는 것 때문에 창단 단장으로 발탁되었다. 당시에는 노래와 무용을 하는 사람이 부족해서 전국을 돌며 단원을 모집했는데도 100명을 채우지 못해 70여명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부족한 단원을 하나 둘씩 구하며 공연을 강행했는데, 국립극장 개관공연인 연극 ‘성웅 이순신’, 오페라단의 ‘아이다’, 교향악단의 베르디 ‘레퀴엠’ 등에서 상당히 좋은 평판을 얻었다.

첫 시련 7·4남북공동성명이 깨지면서 북쪽에 대응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국립극장에 특별 지원되던 예산이 끊어져 합창단은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 되었다. 합창단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이미 나돌아서 단원들은 동요했고, 어떻게든 재생을 염원하던 나는 당시의 총무 최흥기(전 서울시립합창단 단장) 씨에게만 사정을 알렸다. 그리고 단원들에게는 국립합창단 마크를 새긴 운동복을 맞춰 입히고는 합창단은 없어지지 않았다며 동요하던 단원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살얼음판 같은 하루하루였다. 그러던 중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쪽을 향해서 악담을 퍼붓던 북쪽의 격렬한 대남 비방방송 때문이었다.

국민가요 녹음 북쪽은 비난성명과 함께 자극적인 합창곡을 매일 반복하여 방송했다. 대응에 고민하던 KBS는 당시 방송국에 근무하던 음악평론가 이상만 씨를 통해 가사 전달이 잘 되는 국민가요 합창곡들을 녹음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김창구 극장장에게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의 녹음과 북쪽의 것을 비교해 들었던 김종필 총리가 윤주영 문공부 장관에게 치하했고, 기분이 좋았던 장관은 극장장에게 또 치하를 하게 되니, 국립합창단을 존속시키고 싶던 극장장은 그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연주회를 열어주면 좋겠다고 진언했다고 한다. 장관이 흔쾌히 승낙하여 급히 연주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렇게 갑작스런 준비로 창단 1년 2개월 만인 7월 18·19일 이틀 동안 창단 연주회를 하게 되니 그날을 창단일이라고 기록하는 경우도 생겼다.

한국 합창곡으로만 꾸민 첫 합창 연주회 대한민국의 국립합창단이니만큼 첫 연주회는 한국 합창곡으로만 꾸미겠다고 극장장에게 보고했다. 40명의 작곡가들에게 곡을 보내 주십사 부탁도 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온 곡은 몇 곡 되지 않았고 구색을 맞춰 하룻밤 음악회를 꾸미기에는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여성합창곡을 남성합창곡으로, 가곡이나 중창곡을 합창곡으로 편곡하기도 하면서 꾸몄다. 지금 보면 억지 춘향 격인 프로그램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방순회연주와 한국 합창계의 공헌 유일한 전문단체로서 혜택을 누리면서 바흐의 ‘요한 수난곡’ 초연 등 큰 작품 소개도 시작하고 1976년부터는 매해 2회씩 전국 순회연주도 시작했다. 순회연주를 통해 전국 각지의 60개 시립합창단 창단에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대학생 합창곡 발표회 한국 합창곡만으로 꾸몄던 창단 연주회의 성공 이후 매년마다 한 번은 한국 합창곡으로만 무대를 꾸몄다. 3회가 지나고부터는 좋은 곡도 잘 생산되지도 않아 10년 계획으로 ‘대학생 합창곡 발표회’를 열었다. 10년간 150여명의 대학생 작곡가들과 작품을 놓고 분석·토론하며 연주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유익했던 사업이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응모 편수가 줄어서 마감기한을 연장하며 어렵게 치러 냈다.

두 번째 큰 시련 국립합창단의 역사 중에는 숨기고 싶은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새마을운동과 국민개창운동으로 합창 중흥의 분위기를 마련해줬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서거를 하고, 뒤 이어 12·12사태가 일어났다. 소용돌이는 국립극장도 피해갈 수 없었다. 1981년 새로 부임한 허규 극장장은 그때까지 없었던 오디션 제도를 도입해 국립극장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오디션을 시행하지 않던 다른 단체와는 달리 합창단은 매년 자체 오디션(나 혼자 심사하고 단원들과 대화도 나누는)을 했기 때문에 따로 오디션이 필요 없다고 나는 순진하게 반대했다.

배덕윤 2대 단장(1983) 취임과 퇴임 공석이던 내 후임에는 국립오페라단 측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합창과 성악을 전공하고 서울음대에서 강의하며 의욕 넘쳤던 배덕윤 씨가 취임했다. 하지만 지휘자로서의 이상과 현실이 잘 맞지 않아 취임 8개월 만에 퇴임하게 되었다.

13개월 간의 상임지휘자 공석 1년 동안 단장은 공석이었다. 서울신학대학의 최훈차 교수와 내가 객원지휘를 했고 단원이었던 최재근 씨와 백선용 씨가 국립극장 소극장 상설합창 무대를 지휘하는 것으로 한 해를 보냈다.

나영수, 3대 단장(1984~1992)으로 재취임 후임 단장을 찾지 못해 공석은 계속 됐다. 주위의 권유와 극장장과 단원들의 간곡한 권유로 3대 단장으로 내가 재취임하게 됐다. 국립합창단만의 색깔과 위상을 위하여 큰 작품 위주로 프로그램을 짜기로 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비롯하여 ‘작은 장엄 미사’ ‘메시아’ ‘엘리야’ 등의 오라토리오와 한국 합창곡의 개발을 지속했다. 창작에도 눈을 돌려 이종구의 가극 ‘환향녀’, 박재삼 작·최창권 작곡의 창작 칸타타 ‘계백’, 이강백 작·박영근 작곡의 창작 칸타타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혼례곡’ 등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큰 행사도 무사히 치렀다.

오세종 단장(1993~1996)의 어이없던 취임식 내가 퇴임한 후 전 부지휘자였던 오세종 씨가 4대 단장이 되어 4년간 합창단을 이끌었다. 미국 순회연주를 성사시켰던 그가 퇴임한 후에도 새로운 단장을 구하지 못해 1년 동안 또 공석이었다. 국립극장은 뉴욕에서 음악활동을 한 이병천 씨를 5대 단장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가사 정리하러 뉴욕으로 돌아갔던 그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합창단 봉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였다는 소문이었는데 임명한 쪽이나 임명받은 쪽이나 너무나 경솔한 처사였다.

IMF와 합창단의 재단법인화 다급해진 국립극장은 국립합창단 출신으로 객원지휘를 했던 염진섭 씨를 5대 단장(1998~2004)으로 임명했다. 얼마 되지 않아 IMF라는 암운으로 정부는 국립극장의 몸집을 줄였다. 결국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과 같이 국립합창단은 몸담았던 국립극장을 떠나 재단법인으로 독립하게 됐다. 그 어려운 책임을 염진섭 단장이 떠 맡게 되었다. 단장 호칭도 예술감독으로 바뀌었다. 합창단 운영의 모든 책임을 예술 감독이 지는 것이었고 단원들의 신분도 호봉에 의해 받던 월급직에서 연봉인 계약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일본·러시아·대만 등의 해외 순회 연주를 성사시켰다.

염진섭 감독의 퇴임과 김명엽 예술감독(2005~2007) 취임 제6대 예술감독으로 연세대 교수인 김명엽 씨가 취임했다. 재임 당시 독일월드컵 축하 연주를 성사시킨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재직 3년 동안에 네 번에 걸쳐 유럽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3년의 단임으로 감독직을 그만두고 울산시립합창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은 서울시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나영수, 7대 예술감독(2008~2011)으로 세 번째 취임 세 번째의 취임에서 나는 몇 가지 목표를 세웠다. 국립합창단이 한국 합창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창작의 산실이 될 수 있도록 대작 칸타타 3편, 소품 100편을 제작하고 악보를 만들어 전국의 합창인들에게 배포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합창지휘자가 부족한 현실에서 국립합창단이 지휘자 양성의 도장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지휘 횟수를 줄이고 중견지휘자 4명과 신예 지휘자 10명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라오페라합창단 한때 신문지상에서 떠들썩했던 국립오페라합창단 사태는 염진섭 감독 때 일이다. 국립오페라단의 정은숙 감독은 두 단체의 공연 스케줄이 자주 겹쳐 오페라단 산하에 합창단을 따로 만들었다. 내가 6년간 음악감독으로 지도 했는데, 정은숙 감독 후임인 이소영 감독이 국립오페라단합창단을 해체해버렸다. 갈 데가 없어진 단원들이 민노총 산하에 가입해서 격렬하게 데모를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그들을 3년간 국립합창단에 소속시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그들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해질 것이라 생각한 국립합창단 단원들은 반발했다. 문광부와 노동부, 국립오페라단과 국립합창단, 해체된 단원들과 내가 복잡하게 얽힌 어려운 문제였다. 국립합창단 산하에 나라오페라합창단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에 기록해두려고 이 글속에 남긴다.

이후 제8대 예술감독으로 이상훈이 취임하여 2011년부터 2014년 7월까지 국립합창단을 이끌었고 이제 제9대 예술감독으로 구천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에는 지난 3년간 국립합창단을 이끌었던 이상훈 감독의 추억과 소감을 담았다.



2011~2014 주요 활동 연보

유럽의 성당부터 울릉도까지 울려 퍼진 합창


지난해, 국립합창단이 40주년을 맞아 발간한 ‘국민과 함께 노래해온 40주년’에는 국립합창단의 활동과 그 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합창의 대중화와 합창음악의 예술적 수준을 향상시키며 한국 음악, 특히 한국 성악계의 발전에 공헌하고 있는 국립합창단은 지속적으로 정기·기획공연, 특별공연, 지방순회공연, 오페라 등 연간 60여 회에 이르는 많은 공연을 소화하면서 유럽·미국·러시아·일본·중국 등의 해외 공연을 통해 한국 합창의 높은 수준을 과시하며 한국합창의 세계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

사실 국립합창단의 활동은 이 몇 줄로만 정리될 수는 없다. 국립합창단은 유럽의 유명 음악제부터 울릉도에 위치한 중학교의 음악실까지 널리, 바쁘게 다니며 음악을 전한다. 중요한 건 이러한 국립합창단의 ‘바쁨’이 아닌 노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달려가는 ‘우리의 합창단’이라는 사실이다.

이상훈 예술감독 재직 시 국립합창단의 활동을 연보를 통해 살펴본다. 화제가 되었던 공연마다 그들의 목소리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국립합창단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느꼈으면 한다.



  


국립합창단

그들의 한 마디


1 소프라노 파트장 송정훈

어떤 노래로 이 시대를 채워야 할까요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합창을 할 때면 그 시간만큼은 하나가 됩니다. 행복을 느끼죠. 그 중독을 못 잊어서인지 저는 30년 넘게 국립합창단 단원들과 노래해 오고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세계 최고의 합창단으로 자리매김해온 우리 국립합창단입니다. 그동안 합창문화를 선도하며 합창계의 발전에 기여해왔죠. 저 또한 그 중심에 서서 오랜 시간 동료들과 함께 그 발전에 기여해왔다고 자부합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했던 수많은 명지휘자들과의 호흡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고 기억에 남는 건 연주를 마치고 관객들로부터 듣는 한 마디입니다. “오늘 너무 행복했어요”라는 말. 그 행복은 부르는 이와 듣는 이 사이를 재미와 감동이 잔뜩 채우고 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거죠.

합창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 이루는 음악의 결정체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합창은 소음이며 공해라 생각합니다. 이제 구천 예술감독님이 부임합니다. 이 새로운 변화 앞에서 관객의 입장에서 고민할 줄 알고, 시대가 원하는 문화의 요청에 귀 기울이며, 관객들의 목소리에 관심 가질 줄 아는, 그리고 이 시대를 어떤 노래로 채워야 할지를 고민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2 테너·총무 원종윤

정공법을 택하는 국립합창단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3년간 국립합창단에는 여러 가지 작업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합창지휘 경연대회를 통해 신진 지휘자들에게 기회와 강한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들이 전문합창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정말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도 국립합창단의 연습실은 노래로 가득 찼습니다. 합창지휘아카데미를 통해 합창문화를 이끌고 있는 지휘자와 작곡가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이론이 아닌 실질적인 노하우를 전수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합창단 후원회 활성화를 위해 후원회원들을 초청한 음악회 등 여러 시도와 선례들을 남기고자 애쓰던 일들이 지금 제 머리 속을 스쳐갑니다.

요즘 합창음악은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합창의 대중화를 위해 대중이 선호하는 편한 레퍼토리를 많이 부르는 것이 대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국립합창단은 여타 시립합창단이 예산과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선보일 수 없는 명곡을 대중에게 들려주는 역할을 주도했으면 합니다. 예술과 대중, 물론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정공법으로 국립합창단의 장점과 존재감을 그들에게 알릴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3 테너 파트장 조정환

‘너’와 ‘나’가 ‘우리’의 노래를 만드는 곳

국립합창단은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합창단입니다. 중세 르네상스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오라토리오, 오페라 등 모든 장르를 소화하는 국민합창단이기도 합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으로 내려가 국민에게 희망을 전하고, 세계에 한국 합창의 저력을 전하는 문화사절단이기도 합니다.

합창은 ‘내 음악’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체험하는 인생의 훈련장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감정’과 ‘나의 생각’을 ‘우리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다듬는 세밀한 작업과 노력이 필요하죠. 나의 생각과 색깔을 내려놓으며 각기 다른 소리를 하나로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합창에는 오묘한 매력이 있는 듯합니다.

4 알토 파트장 김미경

국립합창단은 청춘과 미래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입단한 지 어느덧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간 함께해 온 국립합창단은 국내 합창계의 ‘맏형’과도 같은 존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외국의 합창단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고요.

국립합창단은 지난 3년 동안 새롭게 거듭났습니다. 특히 이상훈 감독님은 그 어느 합창단도 쉽사리 택할 수 없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나 멘델스존의 ‘사도바울’과 같은 대곡으로 우리들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셨죠.

그래서일까요. 후임으로 임명된 구천 예술감독님에 대한 기대 또한 매우 클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합창계를 두루 체험하며 습득한 경험과 노하우는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주리라 생각합니다. 음악적 열정과 깊이를 갖추었고, 합창에 있어서는 뒤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구천 감독님. 이번 만남을 계기로 단원들과의 교감을 통해 새로운 음악과 무대를 만들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8대 예술감독 이상훈의 퇴임 소감

함께 했던 것이 ‘노래’여서

행복했습니다




가끔 어린 시절이 생각나곤 합니다. 군악대 지휘자이셨던 아버지와 고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제가 이런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 삶은 늘 노래와 함께했습니다. 유년기의 성가대 활동, 중학교 시절 교내 합창경연대회에 나가며 첫 지휘자가 되었고, 이후 교회 중·고등부 성가대를 지휘했던 기억들··· 청춘 시절에는 음대 챔버콰이어를 조직하여 그 매력에 더욱 빠져들었죠.

저는 국립합창단에 1990년에 입단했습니다. 6년간의 단원과 악보계로 활동했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5년간의 유학 생활과 배움을 통해 합창지휘의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21년 만에 지휘자로서 국립합창단 단원들과 만났습니다. 2011년··· 마치 엊그제 같습니다. 2009년에 객원지휘자로 초빙되어 단원들과 눈빛을 맞추었던 때라, 그리고 함께했던 동료들이 있어서 친정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국립합창단과 함께 했던 매 공연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관심 갖고 공부했던 오라토리오나 칸타타를 많이 연주할 수 있었죠. 수많은 무대 중 지난 3월에 올렸던 바흐의 ‘마태 수난곡’ 공연이 제일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3년 동안 함께 만든 11장의 CD와 DVD는 평생 소중히 보관할 겁니다. 제 임기 중 마지막 음반이 된 ‘Voices of Korea’는 폴란드의 메이저 음반사 둑스(DUX) 사와 공동 기획하여 만든 것입니다. 국제적인 음반 유통망에 올린 국내합창단의 첫 음반이라 더욱더 애착이 갑니다.

연습 시간이 늘 부족한 우리 단원들··· 짧은 시간에 악보를 외우고 익히느라 수고한 단원들··· 어쩌면 그들이 저를 ‘고생시킨 지휘자’로 기억한다 해도 저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고마운 마음으로 한 명 한 명을 기억할 겁니다.

사실 힘겹고 지쳤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악보 보는 시간보다 후원회 조직과 같은 행정적인 일들에 우선을 두어야 했죠. 최선을 다했지만 늘 부족함이 뒤따랐던 게 사실입니다. 바라건대 후임 예술감독에게는 지휘봉을 잡는 시간이 많이 주어졌으면 합니다. 단원들의 운영 매뉴얼도 시대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죠.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혹한 매년의 평정을 통해 연봉이 책정되는 단원평가제도도 재고되어야 하죠. 사실 이를 위한 실제적인 안을 내놓기에는 ‘3년’이라는 재임 기간이 짧게 느껴집니다. 41년의 국립합창단 역사상 처음으로 추진 중이었던 기업후원회 결성을 눈앞에 두고 임기를 마치게 된 것도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는 신임하는 구천 예술감독이 잘 이어가리라 믿습니다.

저는 재임 기간 중 “온 국민이 함께 노래하는 날까지 국립합창단의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란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국립합창단의 정체성은 국민에게 최고의 노래를 들려주는 것 외에도 그들이 합창의 매력에 빠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임 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한 사업들이 많습니다. 합창지휘경연대회와 합창지휘아카데미, 그리고 황혼에 이른 분들을 위한 전국 골든에이지 합창경연대회 등이 그것인데, 이후에도 이 사업들이 잘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부족한 저를 도왔던 단원들과 스태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늘 국립합창단의 발전을 위하여 마음을 보탤 것을 이 글로 약속합니다.


음악평론가 이상만의 제언(提言)


국립합창단의

내일을 위하여

1973년 국립합창단의 창단연주회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지켜봐온 이상만 선생(1935~)이 구천 예술감독의 취임에 맞춰 국립합창단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창단 시 국립합창단이 내걸었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관한 제언이 담긴 글이다.

‘국립’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합창단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국립’이라는 이름으로 예술단체들을 육성하는 전통은 독일에서 비롯됐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고 나서도 지역 제후들의 힘은 막강했다. 그런 힘들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또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지역의 문화적 특색과 지방의 자주성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각 지역마다 국립극장을 건립했다.

인구 5만 명이 넘는 도시에는 극장과 교통 수단인 전차를 마련했다. 연방국가인 독일은 주도(州都)에는 반드시 오페라극장을 건립했다. 19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심지어는 사회주의 종주국가인 소비에트 연방도 이런 제도를 채택했다. 국가나 혹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제각기 국립 혹은 시립·도립의 이름으로 공공시설을 마련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은 독일과의 동맹을 견지하면서 학교·병원·교통 등의 편의시설을 독일 제도로 관리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의 국립공연장의 주종은 오페라극장이다. 오페라극장은 노래와 연기를 하는 주역들 외에 오케스트라·합창단·무용단(발레단) 등이 필수 기구로 존재했다. 그리고 이것들이 분화해서 독립된 오케스트라와 무용단으로 발전하게 됐다. 지금도 빈 슈타츠오퍼의 오케스트라는 오페라 공연 시 오페라 오케스트라로 활동하고, 여타의 기간에는 빈 필하모닉이라는 이름으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단 합창단과 무용단은 그 수요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오케스트라와 같이 두 가지 얼굴을 가진 단체가 드물다. 세계적인 추세가 그럴진대 하물며 우리나라가 경제적·사회적으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약했을 때인 1973년에 국립합창단이 설립되고 첫 공연을 가진 것은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내 기억으로는 국립이라는 이름으로 합창단이 출범된 것이 세계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국립합창단은 올해로 창단 41주년이 된다. 우리가 잊어서 안되는 것은 그들의 창단연주회는 한국 사람이 지은 합창곡으로만 공연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립합창단의 존재 이유와 목표였다.

잠시 국립합창단의 창단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1973년 10월 장충동에 새 국립극장이 개관했다. 당시는 남과 북의 문화적 대치 상태였다. 마침 그해에 중앙방송이 정부(문화공보부)의 직속 아래 있다가 한국방송공사(KBS)로 발족했다.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1958년에 문화공보부 공보실 산하에 있던 중앙방송에 서울방송합창단이 창단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합창단이었다. 초대 지휘자 이남수의 탁월한 능력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합창단을 이룩했다. 이때 단원으로 있던 나영수가 국립합창단의 초대지휘자로 선임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초대·3대·7대의 지휘자를 역임했고, 국립합창단의 오늘의 위상과 성격을 확립하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이후 초대 나영수, 2대 배덕윤, 3대 나영수, 4대 오세종, 5대 염진섭, 6대 김명엽, 7대 나영수, 8대 이상훈 그리고 9대 구천이 취임하게 됐다. 나영수의 창단 이념에 가장 접근했던 지휘자는 오세종이었다.

국립합창단은 창단 공연을 나영수 지휘(반주 지명신)로 우리말로 된, 우리나라 사람이 작·편곡한 작품으로만 공연했다. 살펴보면 ‘민족예술의 노래’(이은상 작사·김희조 작곡), 칸타타 ‘에스터’ 중 ‘변화산상’(김병기 작시·나운영 작곡), ‘해가 지네’(구두회 작곡), ‘연분홍’(김안서 작시·정윤주 작곡), ‘영광’(박목월 작사·김순애 작곡), ‘쾌지나 칭칭나네’(유신 편곡), ‘바우고개’(이서향 시·이흥렬 작곡), ‘꽃 파는 아가씨’(황철익 작시·작곡), ‘염불’(김민부 시·장일남 작곡), ‘그리운 금강산’(한상억 작사·최영섭 작곡), ‘진달래 꽃’(김소월 시·박재열 작곡), ‘무심천을 지나서’(이은상 작시·김성태 작곡), ‘귀뚜라미’(김규한 작사·작곡), ‘당달구’(조인택 시·김동진 작곡), ‘도라지’(김달성 작곡), ‘뱃노래’(김희조 편곡·고수 김종철) 이상 16곡을 국립극장 대극장(현 해오름극장)에 올린 것이다.

당시 국립합창단의 보수는 매우 낮았으며, 공무원들도 생활급이 안 되는 저임금 시대였다. 그러나 긍지를 가지고 활동했다. 대부분의 창단 단원은 KBS합창단원들이 옮겨왔다. 남기고 싶은 얘기 중 하나는 당시 국립극장 극장장이었던 김창구의 열정과 끈질긴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국립합창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고인이 된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국립합창단은 초기의 정신이 살아남기는 했지만 아직도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재단법인 국립합창단으로 독립해서 활동의 폭과 연주의 기량도 향상되었다. 특히 지난 3년간 이상훈 예술감독 이후 큰 업적을 쌓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창단 때의 그 정신이 많이 퇴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연주 횟수의 증가와 합창단의 활동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합창단의 예술적 역량의 심화와 단체 경영의 구조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현재 예술감독에게 주어진 요구가 단원들의 예술력 향상과 경영 구조의 전문화로 이어져야 한다.

결과적으로 예술감독직 외에 경영감독제 도입이 필요하다. 국립합창단의 역할 중 한국 합창음악을 새로 만들어가는 조직도 필요하다. 창법(唱法)의 연구, 한국 음악의 개발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도 수립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예술감독의 임기 연장과 차기 감독의 조기임명제도도 강구해야 한다.

끝으로, 국립합창단에는 초대 단장 나영수이 영향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번 기회에 그를 계관 혹은 명예지휘자로 추대해 국립합창단의 창단정신을 되새겨보았으면 한다.

사진 심규태 자료제공 국립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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