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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고통의 길 끝에 마주한 예술성
글 최은규(음악 칼럼리스트) 6/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6월호 - 전체 보기 )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교향곡 작곡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연 구스타프 말러(1860~ 1911)라 말하고 싶다. 물론 베토벤과 브람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이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하는 말러의 교향곡의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연주상의 난점에도 불구하고 말러의 교향곡은 꽤 자주 연주되고 있다. 올해 초 코리안심포니와 KBS교향악단이 며칠 간격으로 말러의 교향곡 1번을 연주해 열띤 호응을 얻어낸 데 이어, 지난 4월 교향악축제에 참가한 18개 오케스트라 가운데 3개 교향악단(울산시향·강남심포니·충남교향악단)이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했고, 서울시향의 ‘어게인 말러 시리즈’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덩달아 말러의 교향곡을 해설하는 음악 강좌도 인기를 모아 필자 역시 개인적으로 ‘말러의 교향곡 전곡 강의’ 사이클을 네 번 이상이나 돌았다. 그러니 “왜 말러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말러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마다 개인적으로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러의 교향곡의 다채롭고 현란한 소리에, 어떤 이들은 그 심오한 사상에, 또 어떤 이들은 그 현란한 작곡기법에 매력을 느낄 것이고, 혹은 단순히 말러의 음악이 왜 인기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의 음악을 들을 수도 있으리라. 이렇듯 말러를 듣고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왜 말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변은 ‘그의 음악엔 사람이 있고 인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찍이 말러는 “내가 작곡한 교향곡은 내 삶 전체의 과정”이라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그가 지내온 인생과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음악적 메시지는 우리 마음속을 더욱 깊이 파고드는 힘이 있다. 말러는 그의 음악을 통해서 인간적인 고뇌와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는 인간의 고통, 신과 인간의 관계, 구원과 천국 등 인간 삶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그 해결을 모색해왔다. 그래서 때때로 말러의 교향곡을 듣는 일은 철학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불안정한 삶 속에서 싹튼 음악적 감수성

말러가 그의 음악을 통해 인간적인 고뇌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삶 자체가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인 것 같다. 1860년 7월 7일 보헤미아 지방의 칼리슈트에서 유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말러는 유태인이었으나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해 기독교 사회에 융화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평생 유태인 태생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갔으며, 어디서나 안정을 찾지 못했다. 일찍이 말러는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으로, 오스트리아 사람 중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요, 독일인들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요, 세계에서는 유태인이다.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요,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 말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도 말러에게 결코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와 지나치게 유순한 어머니 사이의 끊임없는 불화, 그리고 계속되는 동생들의 죽음으로 말러의 상처는 매우 깊었다. 술집 겸 여관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가게에선 술 취한 손님들의 떠들썩한 소음이 들려오는 가운데 뒷문으로는 어린 동생의 시신이 빠져나가는 걸 지켜봐야 했던 모순적인 상황. 이러한 극단의 모순 상황은 말러의 작품 속에서 천박한 선율과 장송행진곡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가 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들었던 군대 나팔소리와 소박한 민요 선율도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이토록 예민한 감수성과 뛰어난 음악성을 타고난 말러는 15세에 빈 음악원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율리우스 엡슈타인에게서 피아노를, 로베르트 푹스에게서 화성법을, 프란츠 크렌에게서 작곡을 배운 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말러는 다른 한 편으론 여러 분야의 책을 탐독하며 문학적인 소양을 키웠다.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문학 서클을 설립할 정도로 강렬해 직접 시를 쓰기도 했으며, 그 자신을 시인이자 작곡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마도 말러가 자신의 초기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가사와 교향곡 2번 5악장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가사를 직접 쓴 것도 젊은 시절부터 익힌 문학적인 훈련 덕분일 것이다. 시인이자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던 탓에 말러는 그의 작품 속에서 좀더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피력할 수 있었다.

지휘대 위의 독재자

음악원을 졸업한 후 지휘자로서 음악 경력을 시작한 말러는 놀랄 만큼 뛰어난 재능으로 당대 청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뿐 아니라 청중마저 감염시키는 그의 열정적인 지휘는 경이로웠다. 1890년 함부르크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모차르트 ‘돈조반니’ 공연을 지켜본 브람스도 말러의 재능에 탄복해 공연 후 무대 뒤로 직접 찾아갈 정도였으며, 빈의 음악평론가 로베르트 히르슈펠트 역시 말러의 바그너 ‘로엔그린’의 지휘에 대해 “압도적인 승리”라 격찬했다. 물론 당대 최고의 지휘자이자 음악평론가인 한스 폰 뷜로도 말러의 지휘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말러는 그가 만 37세가 되던 1897년에 당시 지휘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당시 그 누구도 말러의 음악적 능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젊고 활동적인 음악가가 빈 슈타츠오퍼와 빈 필하모닉과 계약을 맺자 빈 음악계는 일대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가 유태인이란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공교롭게도 말러가 빈 슈타츠오퍼와 계약을 맺을 당시 반유태주의의 선봉이던 카를 루거가 빈의 시장으로 선출됨에 따라 말러의 빈 음악계 입성은 정치적 문제로 불거졌다.

말러는 빈 슈타츠오퍼 지휘자가 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긴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반유태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유태인이란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종족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카를 루거 시장은 선동적인 연설을 통해 이 유태인 지휘자를 서민에 대항하는 ‘엘리트주의자’로 몰아세웠고, 말러가 빈 슈타츠오퍼에 있던 10년간 말러는 반유태주의자들의 독설과 논쟁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말러는 빈 슈타츠오퍼 무대를 최고의 공연으로 채워넣으며 찬사를 받았다.

말러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시절, 빈 슈타츠오퍼의 오페라 공연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실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한스 리히터가 지휘할 당시 바그너 오페라 공연에서 생략되곤 했던 부분이 말러에 의해 모두 복원되었고, 바그너의 음악극은 음악과 드라마가 한데 어우러진 정교한 대작으로 거듭났다. 현대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오페라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호흡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빈 필하모닉 콘서트 역시 성공의 연속이었다. 필하모닉 콘서트가 열리는 황금 홀은 청중들로 꽉 들어찼고, 빈 필하모닉의 연주는 훌륭했으며, 말러의 지휘는 탁월했다. 음악회 프로그램은 베토벤부터 드보르자크에 이르는 정통 관현악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가끔씩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동시대인들의 작품이 소개되거나 장 필리프 라모 등의 옛 음악이 새로운 레퍼토리로 개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말러의 과도한 ‘완벽주의’ 성향은 주변 사람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말러 치하의 빈 슈타츠오퍼와 필하모닉 단원들은 완벽한 공연을 위해 아주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도 일일이 말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비록 공연 수준은 훌륭했지만 말러의 독단적인 운영 방식에 대해선 지엽적인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특히 옛 거장의 작품을 마음대로 개작해 무대에 올리는 말러의 행동은 반감을 샀다. 연주 효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작품도 수시로 수정했던 말러에게 거장들의 작품을 약간 수정해서 연주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손을 댄 작품 가운데는 베토벤과 슈만과 같은 옛 거장들의 작품도 있었다. 1900년 11월 18일에 말러가 개작한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이 빈의 황금 홀에서 연주되었을 때, 원곡에서는 본래 고요하게 시작하는 도입부가 시끄러운 심벌즈의 타격으로 시작하자 청중 모두 경악했다. 말러가 대가의 작품을 망쳐놓았다고 분노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 1907년 8월 빈 슈타츠오퍼 로비에서

운명의 해에 찾아온 세 번의 망치

비록 여러 가지 외부적인 저항에 시달리기는 했으나, 말러에게 있어 빈 슈타츠오퍼 시절은 최고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그는 지휘자로서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음악어법을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내면서 초기 교향곡에 비해 기법적으로 더욱 성숙해진 교향곡 5·6·7번을 완성했고, 중세 성령찬미가인 ‘오소서 창조의 성령이여’와 괴테 ‘파우스트’ 마지막 장면을 엮어 만든 교향곡 8번으로 ‘교향곡’이란 장르의 음악을 극한까지 발전시켰다. 특히 초연 당시 천 명이 넘는 연주 인원이 동원되어 ‘천인’이라 불리는 교향곡 8번은 작곡가 스스로 “지금까지의 내 교향곡들은 이 작품을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연주 시간 90분에 달하는 이 대작 교향곡은 처음부터 사람의 목소리와 기악이 어우러져 노래 되는 교향곡으로 그 소리는 마치 전 우주를 뒤흔드는 환희의 함성과도 같다. 그러나 교향곡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천인’을 완성한 이듬해인 1907년, 말러에겐 세 가지 비극적인 사건이 닥쳐왔다. 장녀 마리아가 성홍열로 목숨을 잃고, 그 자신도 건강 악화의 징후를 느끼게 되었을 뿐 아니라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직을 사임하게 된 것이다. 이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로 이주한 말러는 급격한 삶의 변화를 겪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그의 부인 알마 말러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기면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탄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알마는 말러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여인이다. 유명한 풍경화가의 딸로 태어나 직접 작곡을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던 알마는 화려한 미모와 정열적인 성격으로 주변 남성들을 사로잡았다. 그녀와 소문이 있었던 남성들만 해도 빈 분리파 화가 클림트, 작곡가 쳄린스키, 화가 코코슈카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었다. 말러 역시 알마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고, 그녀와 만난 지 넉 달 만에 그녀와 결혼했다. 말러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다.

알마는 말러에게 끊임없이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은 여성이었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말러는 자신의 음악활동을 위해 알마의 창작활동을 제한했고 그녀의 생활을 완전히 자신한테 맞출 것을 강요했다. 젊고 생기발랄한 알마는 말러에 대한 반항심과 그의 재능에 대한 존경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했고, 결국 젊은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사랑에 빠졌다. 이 일로 말러는 몹시 괴로워하며 알마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다. 그리고 자신의 교향곡 8번 ‘천인’을 알마에게 헌정했다. 당시 알마의 마음은 이미 그로피우스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그녀는 1911년에 말러가 삶을 마치는 날까지 말러의 곁을 지키며 그의 뮤즈로 남았다. 그리고 말러 사후에 그로피우스와 재혼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말러는 가정불화와 동생의 죽음, 아내의 외도와 자식의 죽음에 이르는 갖가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을 영감에 찬 음악으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값진 선물을 남겼다. 일찍이 말러는 그의 교향곡 2번 ‘부활’ 5악장 마지막 가사로 “그대가 받은 고통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리라!”라 쓰기도 했지만, 고통을 승화시킨 그의 음악이야말로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는 듯하다.



1860 칼리슈트(보헤미아 지방) 출생

1875 빈 음악원 입학, 작곡 시작

1884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작곡

1894 교항곡 2번 작곡

1897 빈 슈타츠오퍼 카펠마이스터 데뷔

1900 교항곡 4번 작곡

1902 알마 쉰들러와 결혼, 교항곡 5번 작곡

1905 교항곡 7번 작곡

1906 교향곡 8번 작곡

1909 교향곡 9번 작곡

1910 교향곡 10번 초고 완성

1911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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