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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아버지의 이름으로
글 이용숙 4/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4월호 - 전체 보기 )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의 사랑! 대개 ‘실장님’의 어머니가 돈 봉투를 들고 아들의 여자를 찾아오는 우리나라 TV드라마와 달리, 19세기 파리에서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이 악역을 담당하곤 했다


아, 길을 벗어난 여인에게 미소를 보내주세요
그녀를, 부디 용서해주시고 당신께 이끌어주세요
아, 이제 모든 게 끝났어, 다 끝났어

알프레도의 사랑을 잃은 뒤 병이 깊어져 죽음을 앞둔 비올레타는 3막에서 거울 앞에 앉아 삶에 작별을 고하는 회한의 아리아 ‘지난날이여, 안녕(Addio, Del Passato)’을 노래한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라는 오페라 제목은 바로 이 노래 속 ‘길을 벗어난 여인(traviata)’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토대인 알렉상드르 뒤마 2세의 원작 소설 ‘카멜리아 레이디’를 읽어보면, 폐결핵 환자인 여주인공 마르그리트(오페라에서 비올레타)는 아르망(오페라에서 알프레도)을 만나기 전에도 이미 스스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가 방탕한 쿠르티잔(courtisane)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화려하고 호사스런 생활에 물들어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다. “과로 덕분에 빨리 죽으리라는 (잔인한!) 희망” 때문이다.
원작과 오페라의 내용에 큰 차이가 없으니, 이제 오페라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바꿔놓고 소설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그녀의 병세를 파악한 알프레도의 진심 어린 근심 덕분에 두 사람은 파리 근교 공기 좋은 곳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세상을 다 얻어 새로 태어난 듯한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한다.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아들과 비올레타의 관계를 정리할 목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TV드라마에서는 이런 경우, 대개 ‘실장님’의 어머니가 돈 봉투를 들고 아들의 여자를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19세기 파리에서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이 악역을 담당한다. 물론 뒤마의 원작소설에서 알프레도의 어머니는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아들에게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뒤다.
소설에서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읍 세무서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계산을 잘 하며 이재에 밝은 인물일 것이라 독자들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으로, 아들 알프레도를 시골에서 파리로 유학 보내 법학 공부를 시킨다. 변호사를 만들 계획에서다. 스물네 살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에게 말한다. “우리 아버진 호인이고 정직한 분이야.” 그러나 비올레타가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좀 다르다. ‘키 크고 위엄 있고 인자해보이는’ 외모였지만 처음 만난 자신에게 “거만하고 무례하며 협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라고 비올레타는 일기에 적어놓았다.
제르몽은 자신의 딸을 “젊고 예쁘고 천사처럼 순결한 아이”라고 묘사하면서도, 같은 또래 처녀 비올레타에게는 “너는 몸 파는 여자에 지나지 않아. 어떤 핑계를 대도 실상 너와 알프레도 사이는 돈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야. 네 과거의 삶은 미래의 꿈을 꿀 권리를 네게 남겨두지 않아”라는 요점을 치밀하게 강조한다. “사랑한다면 남자의 장래를 위해, 그리고 좋은 집안 청년과 곧 맺어질 우리 딸애를 위해 사랑을 희생해달라”라는 제르몽의 부탁은 거의 압력이나 협박에 가깝다.
제르몽은 뒤마의 원작에서나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나 일관성 있게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아들에게 고향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중후한 바리톤 아리아 ‘프로방스의 바다와 대지’를 불러 관객의 우레 같은 박수를 받는다 해도 그가 악역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실 ‘라 트라비아타’에서 연극적으로 가장 관객을 몰입시키는 장면은 ‘축배의 노래’가 나오는 1막 초반도, 2막 2장 플로라의 집 파티 장면도 아니다. 바로 제르몽과 비올레타가 20분이 넘는 긴 이중창을 부르며 대결하는 2막 1장이다. 베르디는 예외적으로 긴 이중창을 통해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형식을 극복하고 연극적 긴장감을 높이려는 시도를 했다.
젊은 시절에 아내와 아이들을 차례로 잃고 깊은 절망에 빠졌던 베르디를 다시 일으켜준 소프라노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그녀와의 오랜 동거에 주위의 비난이 쏟아지자 스트레스를 받은 베르디는 그녀를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나처럼 고독을 즐기는 여인”이라고 옹호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현재 자신의 사생활과 이 뒤마의 작품을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 베르디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중윤리와 가족이기주의를 비판하려는 취지로, 여주인공이 쿠르티잔이지만 고귀한 품성을 지녔음을 강조하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와 빈민들의 비참한 삶이 마치 ‘끝나지 않는 고문’ 같았던 시대. 사생아로 태어나 구빈원에서 자랐을 가여운 소녀의 삶에 누가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줄거리 들여다보기
19세기 파리에서 상류사회 남자들에게 여흥을 제공하고 그들의 후원으로 살아가는 쿠르티잔인 비올레타 발레리는 자신의 파티에 온 젊은 알프레도에게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받은 뒤 화류계 생활을 청산하고 그와 동거한다. 그러나 알프레도 아버지 제르몽의 반대와 설득으로 비올레타는 알프레도를 떠나고, 비올레타가 배신했다고 믿은 알프레도는 분노한다. 이별의 상처로 병이 깊어진 비올레타는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고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데,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알프레도가 돌아오고 제르몽도 사과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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