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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거슈윈
아메리칸 드림의 음악
글 최은규(음악 칼럼리스트) 2/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2월호 - 전체 보기 )




1898 미국 뉴욕 맨해튼 생
1924 ‘랩소디 인 블루’ 작곡
1925 피아노 협주곡 F장조 작곡
1928 ‘파리의 미국인’ 작곡
1935 오페라 ‘포기와 베스’ 작곡
1937 뇌종양으로 작고
1985 미국 의회황금메달 수상

클라리넷의 F음이 마치 세이렌 소리처럼 위로 치솟는 동안 화면 속의 선도 함께 치솟는다. 그리고 화면은 어느새 쓸쓸한 도시의 풍경으로 가득 찬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 2000’ 중 ‘랩소디 인 블루’의 첫 장면이다. 도시의 애환을 담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덕분에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는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졌다. 오는 2월 7일 국내 음악팬들은 바로 그 ‘랩소디 인 블루’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됐다. 내한 공연 예정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와 ‘파리의 미국인’을 연주하며 미국 악단에 의한 미국 음악의 정수를 선보인다.


▲ ‘판타지아 2000’ 중 ‘랩소디 인 블루’의 도입부

재즈와 클래식의 경계선
사실 음악계에서 작곡가 조지 거슈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재즈와 클래식 음악의 경계선에 서있는 듯한 그의 음악적 위치가 다소 애매모호한 까닭이리라.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와 ‘서머타임’의 멋진 선율에 열광하면서도 과연 거슈윈을 예술성이 뛰어난 진지한 음악가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랩소디 인 블루’가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고 구조적으로 약점이 있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 거슈윈이 탁월한 선율적 재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아이 갓 리듬’을 비롯한 500곡에 이르는 그의 노래들이 오늘날 각종 음악회 무대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거슈윈은 슈베르트 이후 가장 뛰어난 ‘선율 작곡가’라 할 만하다.
사실 거슈윈은 그 이상이다. 거슈윈은 그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선율들을 오페라 ‘포기와 베스’, 피아노 협주곡 F장조 등의 대작에서 통일적으로 구성해냈을 뿐 아니라 재즈의 요소를 전통적인 고전음악의 어법과 결합시켜 훌륭하게 융합시키는 능력을 보여줬다. 급변하는 이 시대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엮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은 음악가가 갖추어야 할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다만 3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거슈윈이 그의 재능을 좀더 오랫동안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산물
가난한 러시아 이민 2세로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인기 음악가로 급부상한 거슈윈은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다. 일찍부터 대중의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탁월한 재능 덕분이겠지만, 그가 각고의 노력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낸 인물이라는 점도 큰 몫을 했던 것 같다. 조지 거슈윈의 부친 모리스는 본래 러시아 태생의 유태인이다. 부유한 상인의 딸 로즈를 사랑하게 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따라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영어 한 마디 못하면서 오직 사랑 때문에 미국 이민을 감행한 모리스는 결국 그가 사랑하는 여인 로즈를 찾아냈고,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어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유태인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맨해튼 로워 이스트사이드에 살림을 차린 두 사람 사이엔 모두 네 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중 둘째 아들이 바로 조지 거슈윈이다.
네 남매 가운데 조지의 형이자 장남인 아이라는 나중에 조지와 함께 뮤지컬 제작의 완벽한 동반자로 일하며 훌륭한 노래 가사를 써낸 인물이다. 형은 시인, 동생은 음악가로서 평생을 함께한다는 건 매우 특별한 일이다. 어릴 때부터 두 형제의 성격은 판이했다. 형 아이라가 차분한 성격으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반면, 조지는 다소 활발하고 거친 성격에다 음악을 좋아했다. 어머니 로즈는 형 아이라를 위해 집안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들여놓았으나 그 피아노는 조지에게 더 흥미로운 악기였다. 피아노 연주 기량에 빠른 진전을 보인 조지는 피아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에게 음악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유난히 음악에 민감했던 조지는 어느 날 학교 강당에서 누군가 연주하는 드보르자크의 ‘유머레스크’ 선율에 강하게 매료됐다. 그 아름다운 선율을 잊을 수 없었던 그는 그 감흥을 나누기 위해 방과 후 비를 맞으면서 연주자를 직접 찾아가 감격스런 마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1914년, 상업 고등학교에 다니던 16세의 조지 거슈윈은 학교 공부가 적성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돌연 학업을 중단했다. 그러고는 악보를 출판하는 레믹 출판사에 취직했다. 음반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 조지가 음악 출판사에서 맡은 일은 고객들에게 악보에 나온 노래를 직접 피아노로 쳐주며 출판된 노래를 선전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는 틈틈이 자신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리고 18세가 되던 1916년 그의 첫 노래가 출판되었다. 그때 그는 악보 표지에 본명인 제이컵 거슈와인 대신 조지 거슈윈으로 표기했고, 그때부터 그는 조지 거슈윈이라 불리게 되었다.

뮤지컬 작곡가로서의 시작
1917년에 레믹 출판사를 그만둔 그는 여배우의 순회공연 때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연주 경험도 쌓고 또 다른 음악 출판사에서 새로운 일을 맡으며 시야를 넓혀갔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는 유럽 오페레타 등의 영향을 받은 뮤지컬이 급부상하게 되자 거슈윈은 뮤지컬 작곡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음악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천부적인 리듬감각을 갖춘 거슈윈은 귀에 쏙쏙 들어오는 달콤한 선율로 큰 인기를 모았다. 몇 편의 노래를 브로드웨이 뮤지컬 쇼 무대에 올리며 영역을 넓혀간 거슈윈은 1919년 ‘라 라 루실(La La Lucille)’의 모든 노래들을 작곡해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전성기가 도래했다.
거슈윈이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1920년대 초반, 재즈 밴드를 이끌던 폴 화이트먼은 거슈윈을 눈여겨보았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뿐 아니라 재즈 오페라풍의 색다른 시도를 보여준 거슈윈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는 화이트먼에게 강한 인상을 전해줬던 것이다. 이는 ‘랩소디 인 블루’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24년 화이트먼은 거슈윈에게 재즈 밴드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의뢰했고, 그때 거슈윈이 완성한 작품이 바로 ‘랩소디 인 블루’다. 재즈와 클래식의 이상적인 만남을 보여준 이 작품은 특히 도입부의 인상적인 클라리넷 글리산도와 경쾌하고 변화무쌍한 피아노의 표현력, 재즈 풍의 연주 방식을 도입한 관악기 색채 등의 다양한 매력을 갖추고 있다. 그해 2월 12일에 열린 음악회에서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이 작품은 자주 연주되고 있다.
그러나 거슈윈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랩소디 인 블루’는 거슈윈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완성해낸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의 관현악은 폴 화이트먼 악단의 편곡자 그로페가 맡았고. 도입부 클라리넷의 인상적인 글리산도 효과도 같은 악단의 클라리네티스트 고먼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랩소디 인 블루’는 작곡가 거슈윈 자신에겐 완전히 만족스런 작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피아노 협주곡 F장조, 오페라 ‘포기와 베스’
‘랩소디 인 블루’의 성공 이후 당시 뉴욕 필하모닉 상임지휘자였던 월터 담로슈로부터 피아노 협주곡을 위촉 받은 거슈윈은 전통적인 협주곡 형식에 대해 새롭게 공부하면서 새 협주곡 작곡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몇 차례의 수정 작업을 거치고 관현악법을 손질하며 작곡에 몰두한 거슈윈은 1925년에 마침내 재즈풍의 스윙 리듬과 참신한 화성, 세련된 선율이 빛나는 피아노 협주곡 F장조를 완성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다시 한 번 재즈와 클래식의 접목에 성공했다.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에서 우리는 다양한 문화가 한데 녹아있는 미국 음악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물론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재즈의 영향과 유럽 정통 협주곡 형식이 드러나지만 흑인 음악의 영향도 엿보여 주목된다. 1악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찰스턴 리듬은 본래 흑인의 춤곡 리듬으로, 춤곡의 명칭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도시 찰스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재즈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던 거슈윈은 그의 작품 속에 미국을 대변하는 다양한 문화를 한데 녹여내 미국 음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거슈윈은 한때 흑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찰스턴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1934년 여름, 아예 찰스턴에 인접한 해변가에 집을 빌려 흑인의 생활을 경험하며 오페라 작곡에 몰두한 그는 흑인의 말투와 생활 양식, 흑인 영가 등에 영향을 받은 여러 가지 노래를 작곡했고, 이를 오페라 ‘포기와 베스’ 속에 담아냈다. 흑인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을 담아낸 이 오페라는 특히 ‘서머타임’이란 노래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비록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포기와 베스’는 거슈윈의 선율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세련된 작곡 기법과 어우러져 있어 거슈윈의 진정한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너무 일찍 찾아온 죽음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작곡가로서 좀더 세련된 기법을 구사할 필요성을 느껴왔던 거슈윈은 1932년부터 돌연 학생의 자세로 돌아가 이오시프 실린게르에게서 4년간 작곡법을 배웠다. 그리고 당시 미국으로 건너온 쇤베르크와 교류하며 그의 영향을 받았고, 쇤베르크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 기간 중 여러 가지 작곡 기교를 익힌 거슈윈은 이후 작곡한 작품에서 새로운 작곡법을 시험했고 이는 ‘아이 갓 리듬 변주곡’과 ‘포기와 베스’ 등 한층 세련된 작품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거슈윈에게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포기와 베스’ 공연 리허설 중 지휘를 하던 거슈윈은 강한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이후 원인 모를 현기증이 계속됐고, 1937년 7월 9일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수술 도중 뇌종양이 발견됐으나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틀 후인 7월 11일 미국 음악의 대가 조지 거슈윈은 숨을 거두었다. 30대 중반에 작곡법을 새롭게 공부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기 시작한 이 재능 있는 음악가는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펼쳐보이지 못한 채 아까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거슈윈이 39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 남기고 간 작품들은 재즈와 흑인 음악, 그리고 유럽 클래식 음악의 형식과 기법의 성공적인 접목을 보여주며 현대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전해주고 있다.

글 최은규


▲ 1 1936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이라와 조지 거슈윈 형제


▲ 2 1932년,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폴 화이트먼과 함께


▲ 3 리카르도 샤이와 거슈윈 작품집 낸 피아니스트 스테파노 볼라니


▲ 4 월트 디즈니 ‘판타지아 2000’ 중 ‘랩소디 인 블루’


▲ 5 2008년 시카고 리릭 오페라의 ‘포기와 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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