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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로의 결혼’의 시동 케루비노
발칙한 녀석의 사랑 노래
글 이용숙 1/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1월호 - 전체 보기 )



머릿속이 온통 여자로 가득한 케루비노가 부르는 그리움과 열정의 노래는
십대 소년의 감수성을 넘어 프랑스의 시대상을 상징하고 있었다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 피가로와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는 서로 사랑해 결혼하려고 한다. 편의를 위한 정략결혼의 시대는 가고 바야흐로 사랑에 의한 ‘낭만적 결혼’이 시작되는 시대. 이 낭만적 결혼을 쟁취하려는 수잔나는 자신을 탐내는 백작이 초야권(신랑에 앞서 신부의 결혼 첫날밤을 차지하는 영주의 권리)을 부활시키려 한다고 신랑 피가로에게 귀띔하고, 분개한 피가로는 백작부인, 수잔나와 함께 계략을 꾸며 백작을 혼내주기로 한다. 수잔나는 마치 백작의 소원을 들어줄 듯 ‘밤에 정원에서 몰래 만나자’는 내용의 편지를 건네지만, 그 밀회 장소에는 수잔나로 변장한 백작부인이 나타난다. 수잔나인 척하며 백작의 열렬한 사랑 고백을 듣고 반지까지 선물로 받은 백작부인은 하인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진실을 폭로하고, 골탕을 먹은 백작은 아내에게 무릎 꿇고 사죄한다.

1786년 5월 1일, 빈 궁정극장에서 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됐을 때 관객의 반응은 대체로 미적지근했다. 그나마 가장 인기가 있었던 부분은 2막에서 백작부인 탈의실에 숨어 있던 케루비노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가기 직전 수잔나와 부르는 듀엣. 앙코르를 받은 케루비노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수고를 어쩔 수 없이 되풀이했다.

많은 사람들이 ‘피가로의 결혼’의 주인공은 결혼 당사자인 피가로와 하녀 수잔나라고 생각한다. 피날레의 급조된 화해를 통해 백작과 백작부인은 다시 사랑하는 부부로 돌아갔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오페라의 바탕이 된 프랑스 작가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 중 2편 ‘피가로의 결혼’에 이어지는 3편 ‘죄 많은 어머니’를 읽어보면, 2편에서 본 부부 간의 갈등은 여기서 거의 전쟁 수준으로 첨예해진다. 그리고 이 격전의 핵심에 바로 케루비노의 그림자가 있다. 3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케루비노가 20년 전 백작부인과 저지른 불장난으로 태어난 아들 때문에 부부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으나, 백작부인의 아들과 사랑하는 사이인 처녀가 과거 백작이 혼외관계로 낳은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계는 가까스로 봉합된다.

케루비노는 귀족 부모가 자신들보다 신분이 더 높거나 세도가 있는 귀족 집안에서 일 배우라고 보내는 시동(page)이다. 피가로 같은 하인 신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작은 자기한테서 일 대신 바람기만 배워 성 안의 온갖 여자들을 유혹하고 다니는 이 잠재적 라이벌을 서둘러 군대로 쫓아보낸다. 자기 아내에게까지 눈독 들인다는 걸 알고 제대로 분노했기 때문이다. 귀족이기 때문에 케루비노는 어려도 당연히 장교로 군대에 간다. 백작부인 로지나가 대귀족의 딸이 아닌 평민 출신이라서 케루비노가 그녀를 더 만만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케루비노는 인상적인 아리아를 두 곡 노래한다. 하나는 하녀 수잔나 앞에서 부르는 ‘내가 누군지 나도 몰라요’. 다른 하나는 백작부인 앞에서 부르는 ‘사랑을 아는 여인들이여’이다. 서정적이고 우아한 멜로디를 지닌 두 번째 곡이 더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만, 아침부터 밤중까지 머릿속이 온통 여자로 가득한 10대 소년 케루비노의 특성을 음악적으로 더 잘 드러내는 노래는 첫 번째 노래다. “내가 누군지, 뭘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요. 여자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떨려요.” 비바체의 초스피드로 외치는 케루비노는 “시냇물에 그늘에 산봉우리들을 향해 꽃들에게 풀밭에 샘물을 향해서도 그리고 깨어 있을 때나 꿈속에 있을 때나”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을 노래한다.

뚜렷한 대상 없이도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이 그리움과 열정은 자신의 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소년기의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프랑스 대혁명 직전 격동하는 사회의 특성을 빗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규범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사회, 그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 품게 되는 불안과 희망. 케루비노는 바로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B장조로 시작해 단조로 넘어갔다가 다시 초기 상태로 돌아와 론도 형식을 이루면서 모차르트는 이 인물의 혼돈 상태를 음악으로 절묘하게 포착했다. 케루비노는 극중 이제 막 앳된 티를 벗고 진짜 남자가 되려고 하는 존재다. 이 시기의 중성적인 혹은 양성적인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테너가 아닌 소프라노로 음역이 설정됐고, 오늘날엔 메조소프라노가 부르기도 한다. 가슴 뛰는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면 케루비노의 노래와 함께 한 해를 시작해보자.


▲ 이용숙 이화여대·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을 수학했고, 서울대 인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다 죽어가다가도 공연장 무대만 보면 눈이 절로 번쩍 뜨이는 무대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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