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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
음악에 담긴 알싸한 비장미
글 원종원(뮤지컬 평론가·순천향대 교수) 2/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2월호 - 전체 보기 )



그 누구도 ‘거미 여인의 키스’의 성공을 쉽게 점치지 못했다.
하지만 대중은 반응했고, 실험정신으로 빛난 작품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역사는 이야기의 보고(寶庫)다. 사실 그대로의 반영이 아니라 다양한 상상력과 추론, 그리고 현실을 풍자하고 빗대어 바라보는 재미를 담아내기 좋기 때문이다. 여러 대중문화 속에서 사극이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뮤지컬에서도 역사는 다양한 재미를 잉태해낸다. 근대 격변기를 살아가는 한 미국 가족이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과 만나며 벌어지는 상상 속의 일을 그린 뮤지컬 ‘래그타임(Ragtime)’이나 최근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누린 바 있는 일련의 오스트리아 뮤지컬들, 합스부르크 가문 비운의 황후를 그려낸 ‘엘리자벳’이나 황실에서 태어났지만 민중 봉기를 지지하고 슬픈 사랑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던 황태자의 삶을 담은 ‘황태자 루돌프’ 등이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에는 사극을 애국심에 버무리는 경우도 많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비극적으로 명을 달리한 국모의 이야기를 그린 ‘명성황후’, 안중근의 일대기를 극화한 ‘영웅’ 등이 대표적이다.
같은 역사를 두고 다양한 시각이나 입장을 보여주는 경우가 흥미로울 때도 있다. ‘명성황후’와 ‘잃어버린 얼굴 1895’는 그래서 재미있는 작품들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여러 정황과 추론을 뮤지컬이라는 형식에 담아 재연해낸다. 옳고 그름의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무대로 구현되는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재미는 관극 후 ‘할 말’이 많아지게 만든다.


에비타의 또 다른 얼굴을 그리다
영미권 작품들 중에서도 엇비슷한 경우가 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가 남긴 명작 ‘에비타’가 그렇다. 아르헨티나의 국모였던 그녀가 어떻게 자랐으며, 가난한 민중과 노동자 등 데스카미사도스들을 지지의 발판으로 삼아 권력을 쟁취했고,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최후를 어떻게 맞았는지를 극적 구성에 담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에바 페론이 생전 만나보지도 못했던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형상화한 해설자 캐릭터를 등장시켜 이성과 감성의 대립을 효과적으로 배치시킨 것이다. 역사 속 인물의 해석이라는 작가적 상상력이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를 보고 즐기는 맛을 극대화시킨 ‘신의 한 수’이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And The Money Kept Rolling In And Out’ 등 작품에 곁들인 수려한 선율의 뮤지컬 넘버들은 그래서 더욱 진한 뒷맛을 남겨주곤 한다.
실제 역사 속에서 에바 페론의 일생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군부 독재자였던 후안 페론과 온통 이미지들로만 가득했을 뿐인 에바 페론은 지금도 데스카미사도스들에겐 영웅일지 모르지만 상류 계급이나 기득권층,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사실 후안 페론과 에비타의 집권 시기 아르헨티나에선 인권 유린과 정치적 탄압이 자주 벌어졌고, 결국 집권자의 암살 리스트에 오른 지식인들의 망명이나 도피가 심심찮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마누엘 푸이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지만, 고국에서는 판매 금지를 당한 ‘금서’ 작가로 더 유명하다. 후안 페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와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 등으로 논란이 일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건’을 집필한 이래 그는 페론의 암살 대상자 명단에 올라 40대에 고국을 등진 망명길을 떠나야 했고, 결국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거미 여인의 키스’는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한 역작이다.
우리나라에선 이 작품이 연극으로 만들어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활자를 재활용한 2차 생산물로 처음 각광을 받았던 것은 무대가 아닌 스크린에서였다. 엑토르 바벤코가 메가폰을 잡았던 1985년 작 영화가 그 주인공이다. 동성애자인 몰리나 역으로 등장했던 윌리엄 허트는 이 배역으로 오스카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뮤지컬로 제작된 것은 1992년 일이다. ‘에비타’ ‘스위니 토드’ ‘오페라의 유령’ 등을 연출했던 해럴드 프린스가 ‘카바레’ ‘시카고’ 등을 만든 황금 콤비인 작사가 프레드 에브와 작곡가 존 캔더와 의기투합해 무대화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제작 초기에는 너무 주제가 무거워 뮤지컬로는 부적합하다는 평가가 많았던 탓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그래서 결국 미국 브로드웨이가 아닌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이 됐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성과 작품의 완성도는 곧 인구에 회자됐으며, 결국 이듬해 브로드웨이로 화려한 입성이 이뤄지게 된다. 1993년 뮤지컬 ‘거미 여인의 키스’는 토니상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우수 뮤지컬상·남녀 주연상·남자 조연상 등 총 7개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 ‘거미 여인의 키스’ 오로라 역으로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치타 리베라 ⓒCatherine Ashmore

치타 리베라의 목소리로 화제를 모은 런던 캐스트 음반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프레드 에브와 존 캔더다. 이미 전작들에서도 여실히 증명했던 것처럼 이들의 작품에는 알싸한 뒷맛의 현실 풍자와 비판정신이 기저에 깔려 있다. ‘서푼짜리 오페라’의 쿠르트 바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이들은 뮤지컬이 단지 웃고 즐기는 유흥을 넘어 진지한 예술성과 현실 비판 정신을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쿠르트 바일 스스로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태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들의 작품이 지닌 의미는 더욱 자명해진다. 즉 인권에 대한 체제 탄압이나 집단적인 광기·구조가 정신을 지배하는 불합리한 현대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은 이들 콤비에게 있어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정신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현실을 풍자한 ‘거미 여인의 키스’가 이들과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융합이 가능했던 배경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뮤지컬이 흥행을 이루고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자연스레 음반도 화제의 중심이 됐다.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초연 이듬해 발매된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의 음원이다. 음반에는 이 작품의 전설적인 초연 배우들의 음성이 담겨 있다. 먼저 동성애자인 몰리나 역의 브렌트 카버와 마르크시스트 혁명가인 밸런타인 역의 앤서니 크리벨로는 초연 무대에서의 인기를 브로드웨이까지 이어가 토니상 남자 주연상과 조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비록 이제는 그때 무대를 다시 볼 수 없지만, 노래를 통해 무대를 상상할 수 있어 재미있는 체험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단연 몰리나의 환상 속 여인인 오로라 역의 치타 리베라였다. 관록의 여우(女優)답게 그녀는 다양한 연기와 카리스마 넘치는 노래로 무대를 휘어잡았고, 음반에서도 그 흔적을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남자 배역들과 함께 그녀 역시 런던에서부터 브로드웨이까지 초연 무대를 이어갔고, 결국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실 치타 리베라는 토니상과 악연이 있다. 연기나 노래, 무대에서의 장악력 등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명배우지만 유독 토니상과의 인연은 신통치 않았다. 1976년 ‘시카고’의 벨마 켈리 역으로부터 1981년 뮤지컬 ‘브링 백 버디(Bring Back Birdie)’의 로지 역, 1983년 뮤지컬 ‘멀린(Merlin)’에서의 여왕 역, 1986년 뮤지컬 ‘제리스 걸스(Jerry's Girls)’에서의 멀티 캐스트 등 그녀는 1984년 뮤지컬 ‘더 링크(The Rink)’ 애나 역으로 수상한 것을 제외하고는 일곱 차례나 후보로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 오로라 역으로 이룬 토니상 여우주연상 수상은 그녀의 예순 살 배우 인생에서 기념비적인 성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음원으로 만나는 그녀의 음성이 뮤지컬 애호가들에겐 더욱 인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리메이크 공연이 막을 올리며 등장한 또 다른 음반 중에는 1994년 브로드웨이 캐스트의 노래가 담긴 음원도 흥미롭다. 여주인공인 오로라 역으로 바네사 윌리엄스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수이자 영화배우로도 유명한 그녀는 자신의 역량을 잘 살린 비교적 만족스런 무대를 꾸며내 화제가 됐다. 치타 리베라의 오로라가 산전수전 다 겪은 원숙함의 재미를 담아내고 있다면, 바네사 윌리엄스의 오로라는 훨씬 젊고 매력적인 여인의 느낌을 더한 해석이 돋보인다. 노래로만 감상해도 느껴지는 같은 배역의 다른 재미는 뮤지컬 음반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의 즐거움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비교해 감상해보라 권하고 싶은 흥미로운 자료들이다.
‘거미 여인의 키스’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안주하지 않는 실험정신이다. 도박사도 언론도 심지어 공연 관계자들조차도 이 작품의 성공을 쉽게 점치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은 반응했고, 뮤지컬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결국 예술에서 진보는 ‘흥행 공식’의 충실한 구현이나 적용이 아닌 파격과 실험, 그리고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게 만든 사건이 됐다. ‘스타 캐스팅’이 없는 뮤지컬은 자살 행위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요즘 우리나라 공연계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진보가 이뤄질 리 만무하다. 프로듀서는 많지만 기획자는 드문 아이러니가 아쉽다. 변화의 가장 앞자리에서 신화를 만들어내는 창작 뮤지컬 프로듀서의 등장을 갈망해본다.

글 원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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