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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보 두다멜(1)
행복의 아이, 시몬 볼리바르가 되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5/1/2013 |   지면 발행 ( 2013년 5월호 - 전체 보기 )



“성공하든 못 하든 가족을 돌보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오스카르의 고백이다. 가족의 사랑을 먹고 쑥쑥 자란 구스타보 두다멜은 이제 베네수엘라를 지키는 크고 푸르른 나무가 되었다.

 


▲ ⓒMathew imaging/Los Angeles

지난 3월 5일 암으로 세상을 떠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만큼 찬반양론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인물도 드물다. 그는 미국 위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며 21세기식 사회주의를 표방, 외국 자본과 결탁한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던 석유회사와 주요 사기업을 국유화했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빈민층에게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지원해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없는 자, 가난한 자들에게 차베스는 19세기 초 스페인 제국주의를 중남미 대륙에서 몰아낸 영웅 시몬 볼리바르와도 같은 위대한 지도자로 비쳐졌을 터. 하지만 미국과 서방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음악계의 입장에서 보면 차베스는 참으로 고마운 정치가였다. 1975년부터 시작된 음악교육 시스템 ‘엘 시스테마’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베네수엘라가 ‘가난ㆍ폭력ㆍ마약’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계 정상의 음악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베네수엘라의 각종 통계 자료를 보더라도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98년부터 엘 시스테마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는 1983년 오픈한 공연장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테레사 카레뇨 극장이 있다. 베네수엘라 국립교향악단이 상주한 이 극장에 ‘눈치 보며 세 들어 살던’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SBYO)는 2007년 완공한 ‘음악을 통한 사회 행동 센터(Center for Social Action through Music)’로 이사했다. 오르겔바우 클라이스 파이프오르간이 전면에 당당히 버티고 있는 시몬 볼리바르 홀을 메인 콘서트홀로 쓰고 있는 이 공연장의 건립은 차베스의 지시가 아니면 애초 불가능했다. 개관하기 전, 시몬 볼리바르 홀에서 아직 비닐 보호 커버도 뜯지 않은 객석 의자를 앞에 두고 유럽 투어 리허설을 하고 있는 SBYO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의 모습은 그 자체로 무한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엔리케 산체스 란슈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음악의 약속(The Promise of Music)’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DVU0111/073 442-7, DVD)
2009년 10월 8일 로스앤젤레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는 에사 페카 살로넨의 뒤를 이어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음악감독의 취임 연주회가 열렸다. 그 주인공은 바로 27세의 구스타보 두다멜이었다. 차베스 정부 이후 미국과 베네수엘라는 그야말로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창단해 90주년을 맞이한 미국 대표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토종 베네수엘라 사람 두다멜이 임명되었으니, 이는 음악계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클래식 음악으로 보자면 베네수엘라는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하지만 예술의 힘은 모든 정치적인 난제들을 극복하고 심지어 이길 수도 있음을 두다멜과 LA 필은 보여주었다. 실로 위대한 승리였다. 또한 2005년 9월 두다멜이 할리우드 볼에서 LA 필을 지휘하며 미국 무대에 데뷔할 때부터 기적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취임 연주회 전 두다멜이 LA 필 측과 공식적인 첫 만남을 위해 월트 디즈니 홀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총감독 데보라 보르다는 물론 악장을 비롯한 오케스트라 단원 전부와 행정 스태프까지 모두 나와 젊은 마에스트로를 맞아준 것이다. 이러한 환영 행사는 단원노조의 입김이 센 미국 악단 시스템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LA의 주요 도로는 두다멜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나온 현수막과 가로등 배너로 물결쳤다. 심지어 노선버스에서도 두다멜은 움직이는 광고판의 주인공이었으니 ‘영웅의 귀환’보다 더한 환대였다. 시민들을 위한 무료 공연 ‘구스타보 환영합니다!(I Bienvenido Gustavo!)’는 10월 3일 티켓 오픈을 한 지 한 시간 만에 매진돼 유명 팝가수 이상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이제는 미국에서 고유명사화된 ‘두다마니아(Dadamania)’의 신호탄이었다.
취임 콘서트의 시작은 존 애덤스의 ‘시티 누아르’의 세계 초연이었다. 두다멜은 미국인보다 더 미국 분위기를 띄우며 LA의 어두운 과거를 명쾌하게 표출했다. 새 오케스트라와의 교감은 이미 문제될 것도 아니었다. 두다멜의 지휘봉에 단원들은 자석처럼 반응했다. 이어진 말러의 교향곡 1번은 두다멜에게 음악의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17세에 처음으로 이 곡을 지휘했고 ‘엘 시스테마’에서 호세 아브레우 박사에게 처음으로 배운 총보이기도 했다. 1악장, 영원할 것처럼 지속되는 A음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는 두다멜과 LA 필은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긴장감을 엄습하게 한다. 두다멜의 전매특허인 역동성은 우렁찬 총주에서나 실내악적인 부분에서나 어김없이 드러난다. 백미는 2악장 ‘렌틀러’다. 이글라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말러가 아버지의 선술집에서 매일 밤 보았던 술 취한 사람들의 리듬과 가락이 변화무쌍한 템포로 재현된다. 누구나 일어서서 춤판을 벌일 것 같은 충동이 꿈틀댄다. 중간부를 지나 반복되는 부분에서 ‘인 템포’로 일관하며 마무리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4악장의 활화산 같은 에너지가 분출하고 두 손을 내렸을 때 LA 청중의 박수 소리는 참으로 따뜻하다. 음악으로 베네수엘라와 미국이 화해하고 하나 된 모습을 먼저 보여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DVU0131/073 453-1, DVD)


타고난 천재성과 끼,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1552년에 초석을 놓은 인구 200만의 바르키시메토는 라라 주의 주도이자 베네수엘라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1978년 바르키시메토에 사는 스무 살 동갑내기 커플인 오스카르 두다멜과 솔랑게 라미네스는 여느 연인처럼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교제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솔(Sol, 태양)’이라는 애칭이 더 잘 어울렸던 솔랑게는 아기를 가졌음을 알았다. 당시 오스카르는 살사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 ‘수크레 이 가이타스’의 트롬본 주자였다. 수입도 보잘것없었고 이들에게는 음악적인 성취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여기에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의 임신은 어린 커플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스카르의 부모는 아들 내외를 반갑게 맞아 집에서 지내게 했으며 1981년 1월 26일 아기는 모든 가족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그가 바로 구스타보 두다멜이며 오스카르와 솔랑게 사이의 유일한 외동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두다멜을 거의 키우다시피 한 할머니 엥그라시아는 ‘내 새끼(Mi Chiquito)’가 처음 병원에서 집으로 왔을 때 눈물을 흘리며 기쁨으로 집안이 가득 찼다고 회고한다. 동네에서 ‘거버 베이비’(유명한 유아식품 브랜드 이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구스타보는 이웃들이 누구나 안아주고 싶어 했을 만큼 인기를 독차지했다. 할머니는 돌이 지나고도 말이 없던 손자 때문에 의사와 상담했다. 의사는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려주라고 조언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세 살 된 두다멜은 또래들과는 음악에서 월등히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1년이 더 지나자 그는 장난감을 오케스트라처럼 펼쳐놓고 작은 나무판을 찾아 지휘대로 사용했다. 나무판 중앙에 사람 모양 인형을 올려놓고 거길 떠날 때면 할머니에게 “청소할 때 내 오케스트라를 만지지 말아요!”라며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7세에 할머니가 지휘봉을 사주자 두다멜은 이젠 음악을 틀어놓고 장난감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여기에 제동을 건 사람은 두다멜의 할아버지 호노리오였다. 아들 오스카르가 살사 음악을 위해 트롬본을 불었지만 안정적인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할아버지는 집에 또 하나의 음악가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트롬본으로 들려주는 살사는 두다멜에게 춤의 리듬감을 온몸으로 각인시켜 향후 지휘자가 되었을 때 음악의 해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2008년 1월에 녹음된 두다멜의 세 번째 앨범 ‘Fiesta’에 수록된 라틴아메리카 작곡가들의 곡들은 두다멜에게서만 감지할 수 있는 탁월한 춤의 기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DG 00289 477 7457)
타고난 천재성과 끼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원래 두다멜의 꿈은 아버지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었으나 팔이 짧아 포기하고 대신 리코더를 불었다. 할아버지는 “손자 녀석이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상상해봐. 집안을 가득 채우는 소음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라며 할머니에게 불평했다. 할머니도 여기에 동조했다. 그래서 음악 수업 대신 두다멜에게 가라데와 수영을 익히게 했다. 하지만 고집불통의 악동을 말리기는 불가능했고 오히려 두다멜은 이렇게 말했다. “난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 음악가요!”
할아버지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두다멜은 10세가 되자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작곡 공부도 병행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는 한 두 시간이면 모든 것을 외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악보 암기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보면 즉시 콘서트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신토 라라 음악원에서 호세 루이스 히메네스 선생님이 하나를 가르치면 그는 셋, 넷을 배웠다. 무엇보다 두다멜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엘 시스테마’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린이 오케스트라 연습이었다. 베네수엘라 음악교육 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인, 혼자 하는 독주보다 여럿이 함께 하는 오케스트라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지휘자의 손짓 하나하나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바이올린을 배운 지 1년 만에 어린이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된 두다멜은 어느 날 지휘자가 지각한 틈을 타 운명처럼 지휘대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웃었지만 그는 계속했다. 이때 지휘자가 들어와 두다멜의 지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몇 년 동안 지휘를 한 전문 지휘자처럼 그는 음악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키시메토의 거칠 것 없던 ‘분더킨트’는 드디어 수도 카라카스로 유학을 떠난다. 라틴아메리칸 바이올린 아카데미에서 호세 프란시스코를 사사하던 두다멜은 드디어 1995년 로돌포 사글림베니에게 처음으로 지휘법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미 2년 전 SBYO를 지휘하며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어린 지휘자로 데뷔한 경험이 있는 소년은 지휘의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1996년 15세의 두다멜은 카라카스의 아마데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3년 뒤 그는 엘 시스테마의 창립자이자 인생의 멘토이기도 한 호세 아브레우 박사에게 직접 지휘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처음 공부한 말러의 교향곡 1번은 두다멜에게 음악의 이정표와도 같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드디어 SBYO의 상임지휘자직을 맡으며 두다멜은 날개를 달았다. 엘 시스테마 전체의 음악감독이라는 중책을 함께 진 것도 물론이었다. 아직 10대의 젊은이는 자만하지 않고 여전히 배움에 목말라했다. 2001년 샤를 뒤투아의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했으며 2003년에는 잘츠부르크와 베를린에서 사이먼 래틀의 보조지휘자로 일하기도 했다.
2000년 뉴밀레니엄의 역사적인 시작은 두다멜과 SBYO의 최초의 유럽 순회공연으로 이어졌다.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데뷔했고 독일 각지에서 찬사를 받았다. 콩쿠르에도 도전했다. 2002년 마젤/빌라 지휘 콩쿠르에서 파이널리스트로 이름을 올리더니 2년 뒤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후 그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본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프란스 브뤼헌을 대신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카라카스에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사이먼 래틀은 두다멜의 초청을 받고 카라카스를 방문해 SBYO를 지휘하며 어린 단원들의 자긍심을 한껏 끌어올렸다.
2005년은 두다멜에게 본격적인 세계 무대로 진출하게 된 의미 있는 한 해였다. 국제 지휘자 아카데미의 일환으로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다시 지휘했고, 이스라엘 필하모닉과의 연주는 평단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네메 예르비를 대신해 예테보리 심포니와 함께 BBC 프롬스 축제에 데뷔하며 행운의 여신이 그의 곁에 있음을 알게 했다. SBYO와 두 번째 독일 연주 여행을 성공리에 마쳤고,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콘서트의 포디움에도 섰다. 그리고 마침내 LA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미국에서 데뷔했다.
그해 말 두다멜은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전속 계약서에 사인했다. 첫 결과물은 2006년에 녹음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7번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악기’ SBYO와 일체감을 형성하며 약진하는 ‘운명 교향곡’의 1악장부터 약관 25세 지휘자의 젊은 피가 솟구친다. 물론 지휘자보다도 어린 단원이 많은 SBYO의 세상에 물들지 않은 청명함이 더 빛을 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교향곡 7번의 1악장과 4악장에서 약동하는 두다멜의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댄스 감각은 탁월하다. 베토벤의 혈기와 두다멜의 ‘살사 기운’이 만나 배가되는 음의 널뛰기는 “고난을 뚫고 환희로”를 외치는 악성(樂聖)의 모토에 근접한다. (DG 00289 477 6228)
“두다멜은 내가 음악인으로 꿈꾸었던 모든 것을 대신 이뤘습니다. 바르키시메토에서 신 나는 사람을 ‘나 과라(Na Guara, ‘와!’ 같은 일종의 감탄사)’라고 부르는데 그게 바로 두다멜입니다. 아들에게 나는 인간적인 면에서 더 많이 배우곤 하지요. 성공하든 못 하든 그가 가족을 돌보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오스카르의 고백처럼 두다멜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버팀목인 가족 속에서 자신을 다독이고 있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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