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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독 김문정
우리의 음악은 날마다 새롭다
글 김선영 기자 5/1/2013 |   지면 발행 ( 2013년 5월호 - 전체 보기 )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에필로그. 촛불처럼 일렁이는 인생 끝자락, 장발장은 무대 한구석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다. 그 곁으로 흰옷을 입은 판틴과 에포닌이 다가와 선다. 무대 밑 지휘에 따라 하나하나 마음을 담아 부르는 노래는 뜨거움이 되어 객석을 향해 울려 퍼진다.
“그 누군가를 사랑하면 신의 얼굴 보리.”

지난해 11월 경기도 포은에서 시작한 첫 공식 라이선스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대구와 부산을 거쳐 마지막, 서울에 도착했다. 이번 공연은 오리지널에서 상당 부분 달라진, 레미제라블 25주년 기념의 새로운 버전이다. 눈에 띄는 변화는 회전무대 대신 무대 전면에 등장한 최신 영상 기법이다. 송스루 뮤지컬인 만큼 음악적 변화가 작품 전체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몇몇 브리지 음악은 사라지거나 생략됐고 오케스트라 편곡도 달라졌다. 음악적 대비뿐 아니라 전체적인 템포도 당겨져 전체적으로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준다. 한껏 달라진 ‘레미제라블’ 무대 아래에 자리 잡은, 무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객석과 가장 가까운 오케스트라 피트. 그 경계에 서서 지휘봉 하나로 배우와 작품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는 음악감독 김문정을 만났다. 

“저희 악보예요.” 인터뷰 초반 ‘레미제라블’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김문정이 묵직한 스코어를 건넨다. 한 눈에 봐도 손때 탄 수험생 교과서 같은 느낌이다. 곳곳에는 가사 부분을 연필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흔적이 눈에 띈다. 라이선스 공연이 피해갈 수 없는 난관 중 하나는 가사 번역. 원곡의 운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결코 종속될 수도 없는 것이 라이선스 공연의 노랫말이기에, 무대에 올리기 전까지 개사를 맡은 작가 조광화뿐 아니라 배우와 연출, 음악감독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가장 고생한 노래는 ‘룩 다운(Look Down)’이었어요. 처음에는 ‘내리깔어’라고 가사를 정했다가 원어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서 결국 ‘낮-춰’로 바꿨죠. 제일 고민한 곡은 판틴이 부르는 ‘아이 드림 어 드림(I Dreamed a Dream)’이에요. 원곡의 의미와 느낌을 살리기 위해 배우도 연출도 작가도 저도 가사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를 계속했죠. 어느 날은 연습하다가 각자 몇 분 동안 생각한 뒤 다시 정하자고 약속하고는, 무조건 생각나는 대로 악보 빈 곳에 쭉 적고 그중에서 단어를 다시 조합하기도 했어요.”
개사에 관련된 비화를 듣다 보니, 주연 배우 모두가 원캐스팅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블·트리플 캐스팅이 주를 이루는 뮤지컬들을 떠올려보면, 한 명의 음악감독이 여러 배우의 호흡을 기억하고 맞춰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모차르트’는 한 배역에 배우 네 명이 캐스팅됐어요. ‘레베카’도 주요 배역이 트리플 아니면 더블 캐스팅이라 매 공연마다 촉각을 세웠죠. ‘레미제라블’은 장기 공연이기 때문에 원캐스팅을 두고 배우 컨디션이나 관객의 배우 선택 폭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도 초반에는 있었어요. 그런데 작품을 하면 할수록 이 작품은 원캐스팅이 옳다는 확신을 모두가 갖게 됐어요.”
김문정이 ‘레미제라블’ 음악감독 자리를 제안 받은 것은 2011년 여름이었다. 같은 해 가을부터 시작된 스코어 분석과 가사 및 음악을 다듬는 과정, 이듬해 초 이뤄진 배우 오디션, 이후 배우들의 음악 연습 및 오케스트라 연습까지 쉴 새 없이 모든 시간들이 흘러갔다. 이 모든 준비 과정을 지나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의 막이 내려가기까지 그녀 없이 이뤄진 순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에는 음악감독과 별개로 지휘자나 보컬 코치가 분리된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리에선 이 모든 과정이 음악감독의 몫이다.
하나의 작품이 무대화되기까지, 음악적인 변수를 예측하고 컨트롤하며 책임지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것일까. 진심, 부러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비결을 물어봤다. “길들여진 게 아닐까요. 어릴 적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도 마늘을 까거나 김을 재우거나 빨래를 개거나, 하다못해 설거지를 하면 영어 테이프라도 틀어야 했어요(웃음).”
어린 시절부터 호되게(?) 멀티태스킹 훈련을 받았다지만, 음악에 대한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지금의 김문정을 꽃피우게 한 자양분이다. 어릴 적 피아노 치는 걸 좋아했던 김문정은 당시 국민학생 시절 쉬는 시간이면 풍금 앞에 앉아 TV 외화 시리즈물 ‘맥가이버’ 주제가를 치곤 했다. 초·중·고 시절에는 고적대와 합창단에 들어가 늘 단장 아니면 지휘자로 졸업했다. 우연히 합격한 서울예대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면서 학교 선배를 따라 국내에 처음 보급된 노래방 기계 노래 수 천 곡을 편곡했고, 여러 콘서트의 세션으로도 경험을 쌓았다. 뮤지컬 음악감독이라는 직업이 생소했던 시절, 리허설 피아니스트로 시작해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10년 전 ‘레미제라블’ 영상을 보며 황홀해 했던 그녀가 지금, 그 뮤지컬을 만들고 있다. “시대적 운을 타고나, 지금의 일을 하도록 이끌려왔다”라는 말로만 설명 가능한 시간들이었다.


“음악이 내 것이 되는 순간”
음악감독 김문정은 뮤지컬 전문 오케스트라 The M.C를 이끌고 있다. 단원은 총 열여덟 명. 한때 서른 명까지 규모가 늘어났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최소 인원으로 정리됐다. 해외의 경우 연주자 조합이 있어 그 층이 두텁거니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연주자들의 실력도 매우 높은 편이다. 적은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원하는 작품에서는 악기 군에 따라 멀티 플레이를 하는 연주자들도 상당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정이 좀 다르다. 김문정을 비롯해 여러 음악감독들이 전문 오케스트라를 꾸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나라는 뮤지컬 공연 연주자 층이 굉장히 얇죠. 그런 상황에서 훌륭한 연주자를 만나면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제 스타일을 이해하고 호흡을 잘 표현해주는 연주자들과 계속 작업하고 싶은 마음에 2005년에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죠. 저흰 민간단체예요. 지금은 아티스트 매니저를 자청하는 분이 생겨 전용 연습실도 있지만, 그전까진 저희끼리 모은 돈으로 연습실을 구하곤 했죠. 이제는 뮤지컬 오케스트라에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지려고 하는 분위기예요. 저도 워크숍 등을 통해 연주자 층을 넓히고 싶은 생각이고요. 우리나라에서 음대 졸업한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특히 클래식 음악 전공자 중에는 뮤지컬을 상업예술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다 보니, 실력 있는 연주자를 찾기도 어렵고 인식을 바꾸기도 힘들어요.”
척박한 환경에서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온 이들이기에, 오케스트라와 음악을 만드는 시간은 날마다 새롭다. 같은 악보를 연주하더라도, 그 시간이 쌓이다 보면 “음악이 내 것이 되는 순간”이 있다. “연주자들의 소리나 활의 깊이가 달라지는 때가 있어요. 특히 장기 공연일 경우에 약속하지 않아도 연주자와 배우의 호흡이 맞는 짜릿한 순간, 음악과 혼연일체 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이 있죠. 그런 일들이 제 손끝에서 이뤄진다는 황홀감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게 돼요. 크고 작아지고 나타나고 사라지고… 세상에 이런 마법이 어디 있나 싶어요.”
오케스트라 피트에 설 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향해 책임을 다짐하고 맹세한다. “손끝으로 공연을 이끄는 자리인 만큼 리더십과 추진력, 인내심과 조화력이 필요해요. 또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죠. 지휘자가 대충대충 하면, 금방 티가 나요. 반면에 즐거운 에너지를 불어넣으면 연주자와 배우 모두가 열정적으로 변하죠.”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성실함과 철저함. 김문정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그녀가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환영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김문정이 나서는 대부분의 작품은 재공연되는 경우가 상당수다. 2011년에는 한 해 동안 참여한 열한 작품 중 앙코르 공연만 여덟 개였다. “흥행을 계산하기보다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작품을 택하는 편이에요. ‘레미제라블’은 음악이 끌어당겼고, ‘서편제’는 소리꾼 이자람이 궁금했어요. ‘광화문 연가’는 고(故) 이영훈 작곡가의 스타일이 좋았고, ‘아가씨와 건달들’은 분위기가 즐거워서 하게 됐죠. 그렇게 선택한 작품들이 관객에게 사랑받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2011년부터 한세대학교 공연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문정이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무대의 소중함’이다. 화려한 무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스태프로서의 경험담을 살려, 공연이 오르기 전까지의 고생스러운 과정을 늘 강조한다. 여기에 “철저하게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라는 말로 책임감을 덧붙인다. 한편으론 무대에 대한 경외심을 조장(?)하는 스승이라 하겠다. 그 경외심과 겸허함으로 요즘 김문정은 연출가 조용신과 함께 상반기 중 워크숍 형태로 올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위한 작곡에 매진하는 중이다.
‘내 안에 더 보여줄 것이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그녀를 매일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는다. ‘무대 아래에서 그 누구보다 치열한 사람’을 만나기 원한다면, 무대와 객석 사이를, 언제든 들여다보길.

음악감독 김문정
‘명성황후’ ‘렌트’ ‘시카고’ ‘맘마미아’ ‘맨오브라만차’ ‘영웅’ ‘미스 사이공’ ‘에비타’ ‘모차르트’ ‘조로’ ‘엘리자벳’ ‘두 도시 이야기’ 등 다수 뮤지컬에 참여하여 음악감독·편곡·지휘를 맡았고,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에서 작곡을 담당했다. 제2·3·5·6회 더뮤지컬어워즈 음악감독상, 제14회 한국뮤지컬대상 작곡상, 제9회 YWCA 젊은지도자상을 수상했다.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심규태(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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