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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성합창단을 만나다
아버지의 노래하는 얼굴
글 빅용완 기자 6/1/2013 |   지면 발행 ( 2013년 6월호 - 전체 보기 )



아버지. 아버지가 노래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던가. 아마도 몇 해 전 생신일것이다. 회갑을 기념하여 작은 식당을 빌려 친척들과 점심을 먹었던 그날, 아버지는 식당의 보잘것없는 반주 기계에 맞춰 ‘산장의 여인’을 부르셨다. 껄끄러운 기계 반주 소리에 한동안 넋을 잃고 멍하니 있자니, 문득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래전, 나는 아버지의 충실한 반주자였다. 내가 피아노 앞에서 뻘뻘 땀 흘리고 있으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방문을 노크하셨다.
“시험곡 한번 쳐봐. 아빠도 좀 들어보게.” “아빠, 나 힘들어.”
“그럼 ‘뜨거운 안녕’(토이가 아닌 자니 리의 노래) 한번 쳐봐. 아빠도 노래 좀 불러보게.”
투덜대는 것도 잠시, 나는 아르페지오며 글리산도며 ‘쿠세’를 잔뜩 넣어 ‘뜨거운 안녕’의 서주를 장대하게 연주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바리톤의 중후한 음성으로 유행 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당당하고, 당신의 남은 길에는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피아노를 조금은 칠 줄 알아서 아버지 노래에 반주를 해줄 수 있기에, 아버지가 당신의 몸통을 한껏 울려 소리 내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기에 행복했다. 우리 부녀는 행복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목요일 저녁, 서울 신당동 어느 건물에 자리한 음악 연습실. 빗소리에 맞춰 아버지를 추억하고 있는데, 아버지 또래의 중년 남자들이 하나 둘 연습실로 들어섰다. 그 배경으로 ‘55’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공연 포스터가 눈에 띈다. 올해로 창단 55주년을 맞이하는 어느 아마추어 합창단의 연습실 풍경이다. ‘한국남성합창단’은 1958년 6월 11일에 열아홉, 스무 살 청년들이 대학 강의실에 모여 노래를 부르면서 시작됐다. 창단 이듬해인 1959년 5월 6일 명동 시공관에서 당시 주한미군 중령 휴고 괴츠의 지휘로 창단연주회를 열었다. 가끔은, 우리가 방금 지나온 미시적 순간들이 모여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한국남성합창단의 일상적인 연습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렇게 55년을 버텨왔다는 사실은 거짓말처럼 아련해진다. 지휘대를 중심으로 의자를 놓고 있는 단원은 이십 대임이 분명하고, 그를 제외한 단원들의 평균연령은 얼핏 보아도 쉰은 족히 된다. “청년!”이라고 부르면 뒤돌아볼 사람,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리라. 낯선 이의 방문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중년 남성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응원했다. ‘이 정신없는 나라의 아버지로서, 노래 부를 여유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요?’
초대 지휘자 휴고 괴츠에 이어 서수준·김치석·유병무·김홍식·최영주·박신화를 지나 6대 지휘자를 역임한 김홍식이 9대 지휘자로서 다시 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부천시립합창단 전임지휘자·서울음대 합창지도교수를 거쳐 현재 국립국군교향악단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활동 중인 김홍식은 조용하고도 강한 내공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별 말 없이 연습실에 들어섰고, 별 말 없이 지휘대에 올랐다. 외부인은 모르는 신호가 있나? 언뜻 “대앵~” 하는 작은 종소리를 들은 것도 같고…. “지휘자님 오셨다! 어서 제자리로!”, 이런 식의 호들갑은 노래하는 남자들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별 언지 없이, 노래는 시작됐다.
하필이면 ‘이등병의 편지’. 하필이면 남자들만의 노래.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테너·바리톤·베이스가 한 음으로 부르는 노래의 첫인상은 그 엄청난 무게다. 곧 포근한 추억이 찾아온다. 이어지는 ‘월워리 청청’ ‘Jericho’는 흥을 돋운다. 이미 ‘이등병의 편지’에서 지휘자 김홍식의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 지도를 목격한 터라, 지켜보는 사람도 주어진 악보집을 넘기며 가장 부르고 싶은 파트를 열심히 따라 부를 수밖에 없다. 제1테너를 택하고, 최선을 다했다.
노래방 아닌 곳에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노래를 불렀는지 어디 좀 볼까’ 하며 시계를 찾은 적이 있었을까. 때마침 몇 분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남자들은 다시 자연스럽게 흩어져 인스턴트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털어 넣거나, 혹은 최근 새로 뽑았다는 ‘55주년 포스터’ 속에서 자기 얼굴을 찾았다. 합창단 50년사를 정리한 기념책자를 보면, 20·30대 단원은 거의 전무하고 40·50대가 합창단의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신규단원 입단이 감소되는 추세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익히 추측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궁금하다. 결코 많지 않은 ‘젊은이’ 중 세련된 외모가 눈에 띄는 단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바리톤 파트의 장양수이고, 나이는 마흔일곱입니다.” 예상 밖의 나이에 우선 놀라고, 2001년 입단해 올해 13년 차 단원이 됐다는 말에 더 놀란다.


▲ 악보를 보는 방식도 시간의 흐름을 반영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할 것도, 놀 것도 너무 많아요. 특히 20·30대는 취업이다 업무다 해서 정말 바쁘죠. 밤늦게 퇴근하면 연습에 참석하기 힘들고요.” 과연 여기 모인 사람들은 시간 여유가 있어 매주 이틀이나 모여 노래를 부르는가. 젊은 나도 집중해서 노래를 따라 부른 지 겨우 한 시간 만에, 한 시간 전 먹은 백숙이 흔적조차 남지 않을 지경인데, 지친 그들을 여기까지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열정이죠. 또 혼성합창과 다른 남성합창만의 매력이 있습니다. 무대에 서본 사람만이 아는 느낌도 있고요. 언제까지 할 거냐고요? 죽기 전까지는 해야죠.” 장양수 씨는 “이곳에 계신 70대 단원들도 대부분 20대에 시작하셨다”라며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합창의 매력을 역설했다.
“열정”이 필수라는 ‘젊은 단원’의 말은, 이곳 연습실로 향하며 내가 품었던 여러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됐다. 노래하는 곳이지만 분명 조직이다. 단체의 50년사를 정리한, 무려 653쪽의 ‘대사전 급’ 책자를 받아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압도는, 그 653쪽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더욱 놀랍고 압도적으로 변했다. 특히 편찬팀이 쓴 ‘합창단은 지금 변신 중’이란 글은 이곳이 얼마나 ‘조직적인 조직’인지 보여준다. 소제목만 정리해도 이 정도다. “1.모이는 시간을 정확히 지킵시다. 2.악보 관리가 철저해졌습니다. 3.정기연주회 마치고 4주일 만에 내년도 레퍼토리가 제시됐습니다. 4.더 열심히 모이게 됩니다. 새로운 곡들이 나오니까 결석할 수가 없습니다. 5.모든 관리가 매뉴얼화되었습니다. 6.연습CD로 연습의 능률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7.기타.”
행복하고 싶어 노래를 부르지만, 여럿이 하나 되어 부르려면 “열정”이 보증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이마저도 숨막히니 모여서 노래 부르지 않겠다며 돌아설 것이다. 그런 이도 있고, 이런 이들도 있다. ‘이런 이들’, 생활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50년을 지냈고 55주년을 맞았다.
‘한국남성합창단 50년사’ 90쪽에 실린 황영선 씨의 회고. 그는 창단해인 1958년 입단, 단장을 역임한 제1테너 파트 단원이다. 글의 제목은 ‘한국남성합창단 창립과 첫 공연’이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장차 합창단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우리는 돈도 없는 학생들이지 않은가. 악보 만드는 일도 괴로웠다. 당시 우리는 줄판(일본어로 가리방)에 악보를 필사하여 등사판에 걸고 검은 잉크로 밀어댔다. 합창단의 이름은 어떻게 할까. 많이 나온 의견이 주피터·프리마 서울남성합창단 등이었다. 외래어는 적당치 않다고 하여 탈락시키고 나니 남은 것이 서울남성합창단이었다. 특정 학교를 나타내므로 쓰지 말자고 한 것도 당시 압도적으로 많던 서울고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이름이 한국남성합창단이었다. 규모가 너무 커보이므로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이름이 나오면 그때 바꾸면 된다고 하여 임시로 쓰자고 했던 것인데 임시가 아니라 영구적인 명칭이 됐다. … 1959년 창단 무대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소프라노 장혜경 씨의 찬조로 무대는 한결 빛났다. 평단의 글들이 신문에 나기 시작했다. 혹평이 대부분이었다. 유한철 씨는 심한 편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만든 무대를 주목하여준 것 자체가 성공이었다고. 이 혹평이 1959년이 넘어가기 전에 2회 연주회로 돌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58년 합창단을 만든 스무 살 청년들. 그들은 생애 가장 뜨거운 피로, 무엇도 아닌 음악으로써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청년들은 알았을까. 그 후 오랜 세월, 일방적이고 경직된 ‘개발의 시대’를 살아내고, 결국 우리의 아버지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노래할 수 있는 오늘은, 그래서 슬프도록 다행이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박진호

창단 55주년 기념 한국남성합창단 정기연주회는 6월 3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다. 이날 한국남성합창단은 채동선 서거 6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노래 ‘향수’ ‘고향’ ‘새야새야파랑새야’를 선보인다.


▲ 해방 기념, 채동선 일가

한국남성합창단이 기념하는

민족음악가 채동선 1901-1953

우리가 일제 밑에 신음하던 시절,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변절하여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때, 매우 드물게나마 지조를 지키며 민족의 혼을 보존하고자 노력한 귀한 분들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근대사에 빛나는 위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면면히 이어져온 민족의 전통적 가치를 해방된 이 땅에 전수할 수 있었고 또한 이를 계승하여 오늘의 자랑스러운 한국의 문화를 일궈냈다고 할 수 있다. 음악가 채동선도 이런 분 중 한 분이다.
채동선은 경성고보 4학년을 마칠 무렵 3.1운동에 가담하여 중퇴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독일에 건너가 베를린의 슈테르셴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전공하고 돌아온 음악계의 선구자이다. 당시로선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엘리트 중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는 귀국하자 민족시인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부치는 작업뿐 아니라 4회에 걸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어 서양음악의 불모지였던 당시의 한국 사회의 신문화 창달에 이바지하였다.
그의 많은 업적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고향’을 비롯한 주옥 같은 많은 가곡을 만들어 일제하에 신음하는 겨레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달래준, 민족음악가다운 겨레사랑이다.
채동선은 일제가 강압적으로 한국민에게 시행한 창씨개명에도 거부하여 끝까지 자기 이름을 고수하였고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을 신민 정치의 수단으로 몰고 갈 때, 채동선은 성북동 자택에서 수유리를 오가며 오직 농사일에만 몰두하며 지조를 지킨 흔치 않은 선비정신의 지사였다.
해방과 더불어 많은 음악활동을 펼치며 민족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애석하게도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그야말로 우리 음악계를 선도한 큰 별이었고 어른이었는데 너무도 큰 아쉬움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평범한 진리가 음악가 채동선에게는 더 적절하다 하겠다. 그는 53세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민족의 가곡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고, 영원한 애창곡으로 겨레의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화가 창운 이열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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