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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1)
역사를 바꾼 소년
글 하종원 1/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1월호 - 전체 보기 )



잭슨 파이브의 성공부터 ‘스릴러ʼ까지, 황제의 등장을 돌아본다



“우리는 마이클 잭슨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미국의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마이클 잭슨의 자서전 ‘문워크’에 남긴 축문의 첫 문장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누구라도 마이클 잭슨을 알고 있다. 그의 음악, 그의 춤과 의상, 그를 둘러싼 스캔들, 그의 죽음까지도. 마이클 잭슨이 펼쳤던 삶과 음악은 20세기의 끝자락을 가장 화려하게, 그리고 뜨겁게 달구었던, 그 자체로 거대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이 위대한 대중음악 아티스트가 아닌, 가십거리 많은 화제의 연예인으로서 기억되어왔음은 부당하고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프로포폴 과다 투약으로 인한 죽음, 성형중독, 아동성추행사건, 피터팬 콤플렉스, 네버랜드 등에 가려져 있던, 20세기 대중음악의 가장 위대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평가는 그의 죽음이 있은 뒤 비로소 정당하게 조명되고 있다. 2009년 6월 25일, 비운의 죽음으로 세상과 이별한 뒤에야 마이클 잭슨은 더 이상 스캔들 기사가 아닌, 그가 만들어낸 눈부신 음악과 업적만으로 세상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설의 출발

마이클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소도시 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셉 잭슨과 어머니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9남매 중 7번째, 아들로는 막내였다. 아버지는 숙부들과 함께 팔콘즈라는 R&B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던 전직 뮤지션이었으며, 어머니는 마이클 잭슨에게 ‘You Are My Sunshine’을 자장가로 들려주던 가정의 다정한 음악교사였다. 마이클 잭슨과 그의 형제들은 부모의 영향 속에 자연스러운 음악적 친밀감을 누리며 성장했으며, 그가 듣고 자란 R&B는 어린 시절부터 체화되었던, 마이클 잭슨 음악의 뿌리, 자양분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형제들이 팝 음악의 역사에 뜨겁게 등장하는 우연한 사건이 있었다. 음악의 꿈을 접고 철강 회사의 운전수로 일하던 아버지에게는 애지중지하던 기타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기타의 줄이 끊어졌음을 알고 호통을 치던 중 아이들이 기타를 연주하다가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연주를 시켜보았다. 형제들은 놀이로 익힌 독학의 기타 연주와 노래, 다른 악기 연주를 들려주었고,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털어 악기를 구입하고 자식들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조셉 잭슨은 자신의 못 다 이룬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식들에게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시켰고, 그 덕분에 잭슨가의 형제 그룹은 개리시에서 열린 뮤직 콘테스트뿐만 아니라 전국 대회에서도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64년, 조셉 잭슨은 스스로 매니저가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인디애나 전역, 시카고와 뉴욕에까지 돌아다니며 공연을 주선하였다. 조셉 잭슨이 결성한 패밀리 그룹의 처음 이름은 ‘잭슨 브라더스’였다. 처음 리더는 열두 살이었던 장남 재키였으나, 5살의 마이클 잭슨이 여러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출중한 가창력과 귀여운 춤과 무대 매너는 청중들에게 가장 뜨거운 환호를 이끌어냈다. 결국 만장일치의 투표 결과로 팀의 리더는 막내 마이클 잭슨의 몫이 되었고, 이는 팝 음악 역사에 ‘최연소 리더 데뷔’의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마이클 잭슨의 청아한 보이스가 전면에 세워지면서부터 잭슨 브라더스의 인기는 전국구로 확대되었다. 개리 시의 작은 클럽에서 7달러의 출연료를 받던 그룹은 ‘잭슨 파이브’로 체제를 정비하며, 4년의 시간 동안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차분히 인기와 명성을 쌓아갔다.

어린 마이클 잭슨은 형들과 함께 아버지의 적극적인 프로모션에 떠밀려 어른들의 세계, 쇼 비즈니스의 어두운 일면을 너무나 일찍 알아버렸다. 성인이 되어서 네버랜드의 건설, 피터팬 콤플렉스, 기아 아동에 대한 기부 활동에 집착했던 마이클 잭슨의 심리는 학교가 아닌 술과 담배 냄새가 자욱한 나이트클럽에서 성장했고, 아버지의 강압과 폭력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의 상처에 대한 보상, 반작용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 뮤지션으로서 무대 위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행해야 하며, 관객들과의 교감과 환호를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는가를 현장의 교육으로 체득한 시간이기도 했다.

 

▲ 잭슨 파이브의 탄생 ‘I Want You Back’


▲ 솔로로서의 첫 발자욱 ‘Off The Wall’

잭슨 파이브, 잭슨스의 성공

1968년, 잭슨 파이브에게 기회가 왔다. 잭슨 파이브는 그해 시카고 리갈 극장에서 개최된 아마추어 콘테스트에서 3주 연속 우승을 하고, 아마추어 뮤지션들에게 꿈의 등용문이었던 뉴욕 아폴로 극장으로 진출했다. 우연히 이들의 무대를 접하게 된 작곡가 바비 테일러는 잭슨 파이브의 성공을 확신하고 그들을 흑인 음악의 명소 모타운 레코드에 소개했다. 모타운은 다이애나 로스, 제임스 브라운, 스티비 원더, 오티스 레딩, 스모키 로빈슨 등이 소속된 최고의 흑인 음악 전문 레코드사였다. 1969년 잭슨 파이브는 그들의 첫 번째 앨범 ‘I Want You Back’을 발표했다. 열 살의 마이클 잭슨의 맑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앞세워진 그들의 데뷔에 전 세계가 열광했다. 그해 미국에서만 200만 장, 해외에서 4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게 되었고, 데뷔 앨범에 수록된 네 곡은 순차적으로 빌보드 넘버원을 기록했다.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이 역시 초유의 기록이었다.

데뷔 앨범의 성공으로 인디애나의 소도시 빈민가에 살던 가족들은 로스앤젤레스의 저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잭슨 파이브는 미국 음악 역사상 최초의 흑인 아이돌 그룹이 되었고, 팀의 마스코트였던 마이클 잭슨의 인기는 그 중심에 있었다. 1972년에 발표한 또 하나의 히트곡 ‘Ben’은 마이클 잭슨의 맑고 감미로운 미성과 풍부한 감성이 일구어낸 명곡이었다. 1972년 13세의 나이로 가장 권위 있는 대중음악전문지 ‘롤링스톤’의 최연소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던 마이클 잭슨은 십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보컬 능력과 더불어 춤과 안무에 관한 재능을 발전시켜나갔다. 피아노를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지만, 귀로 듣는 모든 음을 악보로 옮기고 피아노로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능력도 발견했다. 하늘이 선물한 천재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그는 직접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는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들은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마이클 잭슨 역시도 키가 자라는 것보다, 여드름이 나는 것보다 두려운 목소리의 변화, 변성기를 맞게 되었다. ‘I Want You Back’ ‘I'll Be There’ ‘Ben’에서 돋보였던 특유의 미성이 사라지면서 마이클 잭슨에게도, 잭슨 파이브에게도 정체성의 혼란이 생겼다. 1974년에 발표한 ‘Dancing Machine’은 그들이 선택한 자구책이었다. 미성을 내세웠던 기존의 보컬 스타일에서 탈피하고 흑인 특유의 리듬감과 당시 유행하던 디스코풍의 리듬과 안무를 특화시키면서 마이클 잭슨은 보컬리스트뿐만 아니라 댄스 천재의 탄생을 공표하였다. 수록곡 ‘Blues Away’는 마이클 잭슨이 레코드에 남긴 최초의 자작곡이었다. 1975년 잭슨 파이브의 매니저 조셉 잭슨은 모타운과의 계약을 종결하고, 새로운 레코드사인 에픽으로 소속사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잭슨 파이브의 명칭은 모타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표권이었기 때문에 팀 이름을 ‘더 잭슨스’로 바꾸고 에픽 레코드에서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차남 저메인 잭슨은 모타운의 회장 베리 고티의 딸과 결혼, 솔로로서 모타운에 잔류하게 되었다.

 

퀸시 존스를 만나 벽을 허물다

에픽에서의 첫 번째 앨범 ‘The Jacksons’도 기대 이상의 성공을 기록했고, ‘Enjoy Yourself’는 빌보드 넘버원 히트곡이 되었다. 에픽에서 두 번째 앨범 ‘Goin' Places’을 발표했던 1977년, 마이클 잭슨은 모타운 시절부터 정신적으로 흠모했던 스승이자 어머니 같았던 다이애나 로스와 함께 뮤지컬 ‘Wiz’에 출연하여 배우, 엔터테이너로서의 가능성을 한층 넓혀나갔다. 1978년 작 ‘Destiny’에서는 대부분의 곡을 마이클 잭슨이 작사, 작곡, 프로듀싱하면서 마이클 잭슨은 혼자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예감케 해주었다. 결국 1979년, 21세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와 형제들 곁을 떠나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솔로 활동으로서의 첫 번째 발자욱을 뗀 앨범이 ‘Off The Wall’이었다.

“나는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홀로서기는 내 인생을 책임지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고통스럽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내디뎌야 할 걸음이었다. 더구나 음악계에 뛰어든 지 15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마이클 잭슨의 연대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퀸시 존스이다. 재즈 트롬본 주자였으며 카운트베이시 재즈 오케스트라의 편곡자로도 활동했던 퀸시 존스는 1960년대부터 작곡, 프로듀싱으로 팝과 재즈, R&B, 영화음악을 누볐던 유능한 프로듀서였다. 마이클 잭슨이 12살 나던 해 처음 조우했던 두 사람은 간간이 음악적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던 사이였고, 마이클 잭슨은 솔로 데뷔를 결심하면서 가족이 아닌 객관적 시선에서의 협력자로 퀸시 존스에게 음악의 구상과 마감을 의뢰했다.

1978년 8월, 마이클 잭슨의 첫 번째 솔로 데뷔작 ‘Off The Wall’의 결과물은 잭슨 파이브, 잭슨스 시절과는 사뭇 달랐다. 마이클 잭슨은 소년 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과감한 성인 솔로 가수로서의 입지를 굳건하게 다졌다. R&B 창법이 중심이 되었던 종래의 스타일을 벗고 록과 펑크, 재즈, 디스코, R&B를 절묘하게 배합한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제안했다. 흑인음악인 소울, R&B의 바탕에 백인음악인 팝과 록의 요소를 적극 가미시켜 그의 음악은 흑, 백의 인종적인 구분과 음악적 경계를 통합하는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Off The Wall’의 성공은 실로 대단했다. 발매 당시 전 세계에서 1,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이는 그때까지 흑인 아티스트의 단일 앨범 중 최고의 기록이기도 했다. 앨범의 수록된 네 곡이 빌보드 톱10에 등극했던 앨범을 향한 평단의 반응도 뜨거웠다. ‘롤링스톤’紙는 앨범에 평점 만점을 헌사했고, 수록곡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로 생애 첫 번째 그래미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뜨거운 영광과 성공조차도 마이클 잭슨이 팝 음악 역사상 위대한 자취를 남겼던 ‘Thriller’를 위한 전조, 예고편에 불과했다. 1982년 마이클 잭슨은 다시 한 번 퀸시 존스와의 조화를 빌려 ‘Thriller’가 안겨준 거대한 폭풍으로 대중음악의 운명과 기록을 한 순간에 쇄신시키는, 위대한 역사를 저술한다. (2편에서 계속)

글 하종욱 사진 소니뮤직

하종욱은 “좋은 음악에는 장르와 경계의 구분이 없음을 신봉하는”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및 음반 기획, 집필·강의 등 음악과 이웃한 일을 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 사망 당시 각계의 추모사

흑백 인종차별 금지 메시지를 세계에 전파한 것은 마틴 루터 킹·오바마가 아니라 마이클 잭슨의 ‘Black Or White’였다. ‘타임’

지금까지 스스로 작사·작곡·프로듀싱·편곡·의상·스타일·안무·공연·영상은 물론 자신의 이미지 로고까지 직접 소화해낸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했지만 대중은 팝의 천재를 만날 수 있었다. ‘빌리지보이스’

그는 인종을 초월한 우상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여 훗날 의식 있는 유권자로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결국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나올 수 있었다.

앨 샤프턴, 흑인 인권 운동가·목사

마이클 잭슨과 견줄 수 있는 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재능·호기심·신비는 그를 전설로 만들어주었고,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생활을 완전하게 컨트롤 할 줄 아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비틀스가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밴드라면 마이클 잭슨은 음악 그 자체다. 폴 매카트니

마이클 잭슨은 우리시대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크로스오버 하였고, 록과 팝, 소울과 재즈, 그리고 일렉트로닉의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묶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냈다. 밥 몰드윈, 음악방송 PD

마이클 잭슨은 수많은 한계를 부수고 음악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유산을 많이 남겼다. 어셔

마이클 잭슨을 잃은 것은 음악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존 메이어

마이클 잭슨이 이룩한 음악적 업적, 그의 재능과 선견지명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이었다. 독특한 음색, 혁신적인 안무, 놀라운 음악적 재능과 스타로서의 천부적 면모에 힘입어 잭슨은 어린 나이에 최정상에 올랐다. 그래미상을 무려 13차례나 수상했다는 점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문화적 경계마저 초월한 그의 음악과 선생은 영원히 우리 마음과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미상 위원회 성명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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