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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쇼팽 발라드와 스케르초
김탄의 동그라미를 꺼내다
글 김탄 7/1/2013 |   지면 발행 ( 2013년 7월호 - 전체 보기 )


얼마 전 영화 ‘피아니스트’를 다시 보았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주인공 슈필만은 독일군 장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필사의 각오로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한다. 피아노 줄이 끊어지고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그는 열정적인 연주로, 자신을 죽일 수 있었던 독일군 장교를 감동시켰다. 그가 연주한 쇼팽 발라드 1번은 19세기 초 빈 체제 이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러시아 등 열강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폴란드의 시인 미츠키에비치의 서사를 배경으로 1831년에 작곡된 곡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전쟁의 참화들과 19세기 초·중반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 공간을 무겁게 채우며 발라드를 연주하는 쇼팽의 모습이 그려졌다. 동시에 발라드 1번을 처음 접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쇼팽 발라드 1번과의 인연은 중학교 2학년, 녹턴을 연주하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때 독일 출장을 떠나시는 아버지께 “쇼팽 음반 괜찮은 것 있으면 사다주세요”라고 무턱대고 졸랐다. 출장길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지인이 추천했다며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발라드와 스케르초가 담긴 앨범을 선물로 주셨다. 기쁜 마음에 음반을 넣고 듣다 보니 당시 한창 연습을 하던 녹턴이나 왈츠·연습곡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발라드 1번을 그때 처음 들었다. 전반부 제1주제에서는 꾸벅꾸벅 졸다가도 묘하게 후반부 코다에서 열정적인 연주에 정신을 되찾으면서, 그 부분만은 꼭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나는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은 연습곡이나 녹턴을 배우고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나온 호기였는지 그때부터 매일같이 음반을 무한 반복해 들으며 아슈케나지의 연주를 따라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피아노 교습을 그만둔 이후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던 적은 지금까지도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발라드 1번을 ‘어느 정도’ 밉지 않게 연주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였다. 그때 아슈케나지의 연주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나름의 한계 속에서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곡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누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슈케나지의 쇼팽 발라드와 스케르초 음반은 나에게 작은 스승이었고, 애호가로서의 열정을 가지고 곡을 듣고 연주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처음 들었던 음반의 익숙함 때문인지 아슈케나지의 안정적 기교 덕분인지, 지금도 쇼팽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로 주저 없이 아슈케나지를 먼저 꼽는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치열하게 연구하고, 군대에서 장교로 시간을 보내며 각종 훈련에 심신이 지칠 때면 어김없이 아슈케나지의 쇼팽 연주를 듣는다. 그 중에서도 발라드 1번은 변함없는 위로이자, 또 다른 열정의 동기를 부여하는 곡이다. 클래식 음악에서 ‘열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쇼팽을 거론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실향의 아픔을 음악으로 담아낸 쇼팽의 열정, 발라드 1번에서 시작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열성 그리고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인 슈필만의 연주를 떠올리며 인생의 열의를 새롭게 그려보곤 한다. 군 생활이 1년 정도 남았다. 발라드 1번 후반부 코다의 열정적인 연주처럼 지금의 시간을 조국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열정으로 이어가야겠다.

‘동그라미를 꺼내다’에서는 ‘내 생애 잊지 못할 음반’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이번 호에는 현재 공군 제18전투비행단에서 단기장교로 복무 중인 김탄 씨의 동그라미를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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