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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해수
그가 바라본 심연
글 김선영 기자 8/1/2013 |   지면 발행 ( 2013년 8월호 - 전체 보기 )




‘속마음이 들리는’ 드라마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이다. 드라마에선 여주인공을 비롯해 대다수 등장인물이 마음과 다른 말들을 내뱉는다. 그 모습에 다소 씁쓸한 웃음과 공감의 눈빛을 보내게 되는 것은, 그들의 모습과 다름없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거다. 많은 관객들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두고 “단순하다” “다층적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에 정말 한 겹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것이 인간이기에, 감정이든 생각이든 자아든 여러 겹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애태우고, 때로는 날을 세운다. 여러 겹이니까, 웃다가도 울 수 있고 한숨짓다가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누군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인간 그리고 배우, 그 사이에 서서
올해 초 대학로 창작 뮤지컬 화제작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 이번 여름 다시 무대에 올랐다. 한국전쟁 중 포로 수송선이 난파되어 무인도에 불시착한 북한군 네 명과 남한군 두 명이 생활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작품은 언뜻 단순해보이지만, 그 겹겹을 들춰낼수록 복잡하다. 특히 무인도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긍정적 심리전은 등장인물 각각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를 수면 위로 올리며 새로운 위로와 공감을 끌어낸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급격한 심리변화를 보이는 사람은 박해수가 연기한 북한군 이창섭이다. 얼굴에 난 칼자국과 무뚝뚝한 말투로 대변되는 ‘센’ 군인이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그 역시 전쟁의 희생양이다. 그래서인지 이창섭의 트라우마는 초연보다 이번 무대에서 한층 부각되어 관객에게 다가온다.
“전쟁 앞에선 누구나 처절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공연을 준비하며 개인에게 드리워진 트라우마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데에 최대한 초점을 뒀어요. 그래서 초반에 이창섭의 무섭고 사나운 부분을 부각했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려고 했어요. 좀더 사실적이고 연극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었죠.”
전쟁이 주는 공포에 지금의 세대가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괴리감은 공연 전 박해수에게도 동일했다. 그는 포로수용소 사진이며, 연출가가 건넨 전쟁 트라우마 관련 책들을 살펴보며 전쟁의 불안감 속으로 차츰 몸을 담갔다. 어느 전시회에서 볼 법한 사진 한 장,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은 고증자료들이 고통의 전부를 다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그 파편만으로도 전쟁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처절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느끼기엔 충분했다.
스스로를 원망하며 쌓아올린 이창섭의 트라우마는 그의 마음속 여신님과 마주하는 순간 완전히 녹아버린다. 누군가에게는 누이동생이고, 누군가에게는 연모하는 여인이던 여신님은 그에게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어머니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아들이자,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사람이 된다. 이 장면에서 박해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저란 사람은 굉장히 본능적이고 충동적이에요. 끈기도 없고 인내심도 부족하죠. 한 없이 감추고 싶은 부분인지라, 그런 저 자신을 미워했던 적도 많아요. 극중 ‘나는 내가 싫습니다’라는 이창섭의 대사를 읊조리면서, 실제로 우리 어머니 앞에서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너무 죄송한 마음 때문에 차마 할 수 없는 말이거든요.”
그동안 박해수가 거쳐 간 작품들을 헤아려보면 유독 어머니의 그늘 아래에 있는 어두운 캐릭터가 많다. 많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더 코러스-오이디푸스(이하 오이디푸스)’ ‘갈매기’처럼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픔이 드러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특히 어머니와 동침해야 하는 ‘오이디푸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악몽을 꾸거나 가위에 눌릴 정도로 정서적인 소모가 엄청났다. 인간 박해수와 배우 박해수 사이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루며 마음을 다잡는 기도가 때마다 이어졌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을 그저 받아들이고 넘겼을 때 이전보다 단단해지는 것이 세상의 원리이듯, 그 역시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배우로서 통과의례를 차근차근 넘긴 듯싶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시간들을 통해 올가을 재공연하는 ‘오이디푸스’ 무대에서는 좀더 의연하게 설 수 있지 않을까.

‘사서 고생하기’가 건넨 선물과 숙제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중에서 박해수는 매번 후자를 택해왔다. 그 선택은 지금껏 맡아온 캐릭터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첫 뮤지컬 데뷔작인 김운기 연출의 ‘사춘기’에서 냉소적인 고교생 영민뿐 아니라 조광화 연출의 ‘됴화만발’에서 무사K는 거칠지만 외로운, 그래서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이고 오경택 연출의 ‘갈매기’에서 트레플레프는 타인에게 예민하게 구는 동시에 사랑을 갈망한다. 단조로운 갈등도, 내면의 층이 홑겹인 것도 없다.
“제가 맡은 캐릭터처럼 거친 모습은 실제로 거의 없어요. 오히려 전 순둥이에요. 사납지도 않고 예민하지도 않고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만사 행복한 사람이죠. 그런데 외모 때문에 유독 심각한 캐릭터들이 주로 들어오는 편이에요. 단순한 캐릭터는 들어온 적이 거의 없어요. 학교 다닐 때, 배우는 다층적인 캐릭터를 많이 해야 한다고 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런 선택을 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릴 때 갈등 많은 배역을 해야 나이 들어서 단순한 캐릭터를 연기해도 프리즘 같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배웠거든요. 그래서 고통스럽고 힘든 배역들을 일부러 많이 했죠.” 사서 고생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다층적인 캐릭터가 배우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서다.
‘사서 고생하기’가 주는 선물을 경험한 것은 단국대 연극영화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3학년 무렵 연출가 김홍기가 담당한 연극 동아리에 들어간 것이 시발점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한 해에 열 작품 정도를 무대에 올렸다, 한 달 연습해서 이틀 공연하고, 또 한 달 연습해서 하루 공연하는 식이었다. 관객은 교수님과 조교 두세 명이 전부였다. 정작 학과의 정기공연에 참가하지 못할 정도가 되자, 학교에서는 동아리를 폐쇄하라는 조치가 내려왔다. 그와 친구들은 비밀 결사대처럼 수면 밑으로 들어간 동아리, 아니 동아리의 탈을 쓴 훈련소에서 졸업 때까지 담금질에 들어갔다.
“그때 진심으로 연기하는 법을 배웠어요. 다른 기술이나 표현법은 거의 생략되다시피 했죠. 연출이 따로 없기도 했고, 모두가 좀 거칠어도 본능적으로 연기했어요. 연습할 때 가슴속에서 뭔가 뜨겁지 않으면, 그 대상이 선배든 후배든 상관없이 서로 이야기하고 그 무언가가 느껴질 때까지 계속 연습하는 식으로요. 학생이 소화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많았는데, 정말 뭣 모르고 열심히 했죠. 그때 가슴속에서 끌어올린 에너지와 열정이 저를 단단하게,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만들어줬어요.”
졸업 후 몇 년간 그 열정과 패기로 무대에 서왔다면, 최근 그에게 맡겨진 새로운 숙제는 ‘배역의 방’을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극에 대한 몰입이 일상까지 지나치게 스며들어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유독 예민하게 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차’ 싶을 때가 있다. “선배들이 배역의 방을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해요. 연습할 때는 그 방안에서 하고, 끝나면 그 방을 나와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전 늘상 머무는 큰 안방에 이 작품 저 작품을 마구 쌓아놓고 그 방에서 나오질 못하니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언젠가는 여자 친구와 다투다가 순간 ‘내가 오이디푸스 왕이야!’라고 외친 적도 있어요. 작품에 너무 몰입했더니 일상에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온 거죠. 나중엔 웃으면서 화해했지만, 스스로는 정말 충격 받았죠. 이젠 무대 위에서 완전히 몰입하고, 무대 아래에서는 제대로 내려놓는 것이 저 자신과의 숙제예요.”


인생의 중요한 키워드, 관계
박해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관계’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 나뉜 관계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그가 꿈꾸는 모습이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택한 이유도 관계의 힘 때문이었다. “작가와 연출에 대한 신뢰가 컸어요. 작품 내용도 믿음을 통해 사람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이야기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작진과 동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도 많이 받아서 감사해요. 또 관계 회복에 관한 작품을 하니 저 자신도 치유되고 회복된다는 걸 느꼈어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됐죠.”
그의 시선은 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닿아 있다. 사람을 참 많이 좋아하는 그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스스로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부단히 노력한다. 박해수는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며 “의식적으로 겸손했던 시간”이라고 고백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속으로는 거만한 자신을 알기 때문에 겸손하고 싶었고, 그렇게 보였으면 했다. 그래서 속상하고 불만에 가득 찰 때도 많았다. 2012년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받았을 무렵엔 내면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상을 받으면서 주위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됐어요. 정말 큰 상이라 제가 과연 이걸 받을 만한 위치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죠. 감사한 만큼 부담감도 컸어요. 게다가 연극을 쉬고 TV 드라마에 얼굴을 비추던 시기에 상을 받으니까 사람들의 축하인사마저 부담스럽게 느껴졌죠. 더 힘내서 연극하라고 주신 상인데, 아이러니컬하게 전 드라마에 나오고 있으니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했죠. 마음속에 드러나는 여러 감정들과 마주하면서 제가 그저 겸손한 척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죠. 그 상이 정말 감사하지만 무서운 존재였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저에게 필요했던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음속 폭풍의 계절을 보내고 그에게 자연스레 남겨진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겐 각기 다른 역할과 임무가 있다는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가야 할 지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시금 명확하게 세우니 욕심은 줄어들고 감사함은 늘어났다. 더욱이 ‘감사’라는 단어가 주는 마법은 모든 것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바라보게 하는 시야를 갖게 해주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물건에 사용설명서가 있듯이 저도 제 인생이 어떻게 사용되어질지 궁금해요. 언젠가는 예술과 문화 혜택에 굶주린 나라에 직접 가서 제가 선보이는 작품들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채워주고 싶어요.”
날들이 흘러가고 계절이 변한다. 그토록 쏟아지던 빗방울의 끝은 청명한 하늘, 뜨거운 태양과 맞닿아 있다. 차가운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모두 이겨낸 사람의 마음은 한 겹 한 겹 다른 빛깔로 채색되어 날로 깊어진다. 바다처럼 넓고 깊은 곳에서 빼어난 사람이 되라는 그 이름처럼.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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