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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디스트 염은초
가볍고 단단하고 자유롭게
글 김선영 기자 2/1/2017 |   지면 발행 ( 2017년 2월호 - 전체 보기 )




지난 2015년 여름 끝자락, 한국에 들어온 염은초는 1년 만에 클래식 음악계, 그리고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리코더’라는 익숙하고도 낯선 악기를 통해서다. 솔리스트이자 협연자로 무대에 오르는가 하면, 리코더 전도사를 자청하며 학교로 찾아가고,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해 아이돌 가수에게 팝송과 가요를 가르치며 대중에게 ‘피리의 재발견’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후 온라인에선 이 ‘피리 부는 아가씨’가 스위스 바젤 스콜라 칸토룸에 최연소로 입학해 석사과정 중 독일 니더작센 리코더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1위를 차지했고, 이후 영국 런던 길드홀 음악연극학교 최고연주자과정 중 칼 젠킨스 클래시컬 뮤직 어워드에 결선 진출한 이력에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92년생, 이 젊은 음악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나고 있다. 유튜브에선 비르투오소 넘치는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고, 개인 SNS에선 카메라를 앞에 두고 유쾌하게 연습하는 아티스트의 ‘민낯’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며 신비주의를 멀리하고, 자신의 집 텃밭에서 유기농 채소를 키우며 땀 흘리는 걸 즐기는 그녀. 160cm 남짓, 작은 체구에 숨겨진 다양한 스펙트럼과 라이프스타일은 다양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중이다.

2월 25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국내 첫 리사이틀을 앞둔 그녀를 만났다. 같은 달 삼호뮤직을 통해 내놓을 단행본 ‘염은초의 판타스틱 리코더’의 인쇄 가안을 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유학 시절 쓴 에세이와 직접 찍은 사진, 그리고 SNS에서 영상으로 선보인 다양한 곡을 누구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편곡한 리코더 악보 20곡이 함께 수록됐다. 때마침 야마하에서 새로운 리코더가 출시되어 함께 쇼케이스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하는 염은초의 스케줄러는 귀여운 손 글씨로 써 내려간 일정이 빽빽했다.

간절함이 이끈, 런던 길드홀 음악연극학교

염은초의 연주를 처음 본 것은 지난해 롯데콘서트홀에 내한한 앙상블 마테우스 공연에서였다. 메인 협연자인 소프라노 황수미의 순서 사이에 텔레만의 리코더와 플루트를 위한 협주곡 TWV 52:e1을 위해 나선 그녀는 까다로운 이중 협주곡에서 섬세하게 호흡을 맞춰가며 자칫 묻힐 수 있는 리코더 음색을 잘 살려냈다.

“앙상블 마테우스의 첫 내한이었고, 저 역시 한국의 큰 콘서트홀에는 처음 서게 되어 엄청 떨었던 기억만 남아있어요. 모니터로 공연을 보면서 제 순서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에 펑펑 울다가 무대에 올라갔거든요. 런던에서 한국 들어오기 직전, 우연히 앙상블 마테우스 리코더 주자 세바스티앙 마르크에게 레슨을 받았는데, 그분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한 공연에 제가 오르게 되어 신기했고, 또 영광이었죠.”

열여섯 살에 유학을 떠나며 홀로서기를 시작한 염은초에게 지난 10년은 그야말로 돌을 고르고 밭을 갈며 씨를 뿌리는 시간이었다. 농사꾼의 손에 박힌 굳은살처럼, 엄청난 연습량을 버텨낸 리코디스트의 손가락은 거칠어졌다. 음악의 밭을 가꾸는 동안 머리 위엔 화창한 햇빛보다, 먹구름에 집중호우가 쏟아지던 날이 잦았다.

“중학생 시절 홈스쿨링을 시작하고 유학 기간 내내 혼자 생활하다 보니 우울할 때가 많았죠. 열여섯 살에 스위스 취리히 음대에 학사 입학을 했고, 이후 바젤 스콜라 칸토룸 석사 과정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니더작센 리코더 콩쿠르에서 우승했는데, 그날 딱 하루만 엄청 즐거웠던 것 같아요. 결선 진출자 모두 친한 친구들이고 실력이 대단했는데 반주자 운이 따라주지 않았죠. 대회 이후 학교에서 저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그리 좋지 않아서 앙상블을 해도 불편한 기운이 주위를 맴돌았고, 그렇게 석사과정을 모두 마친 순간, 행복하다는 감정이 잠시 들었어요.”

7년 간의 스위스 유학 생활. 연습량이 늘어나면서 테크닉은 좋아졌지만 음악성은 따라가질 못한다는 느낌이 날로 커져갔다. 선생님들은 “지금도 충분하니 즐기며 살라”고 말했지만 그녀에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갔다. 테크닉이 괜찮아도 소리는 점점 나빠지는 상황… 슬럼프였다. 석사 졸업 후 쉼을 위해 찾은 런던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소개받고 얼떨결에 지원한 박사 과정 오디션. 그곳이 길드홀 음악연극학교였다는 사실은 이제껏 경험한 것과는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예고와도 같았다. 염은초는 오디션 곡으로 헨델의 소나타 중 가장 기본적인 곡을 골랐다. 누군가 자신의 문제를 알아보고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서였다. 학교에 왜 입학하고 싶은지 묻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지금 발전이 없는 슬럼프인데, 이런 상태를 고칠 수 있는 선생님이 학교에 있다면 나를 가르쳐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완벽하게 연주해도 합격을 예측할 수 없는, 대개의 오디션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에 이윽고 이어진 심사위원의 말.

“너는 잘할 수 있는 아이인데 지금 그렇지 못하구나. 네가 너무 부족하기에 우리는 너를 택하려고 한다. 박사과정 일 년 동안 재정뿐 아니라 음악적인 부분을 최대한 도울 테니 잘해보길 바란다.”

관악주자라면 대부분 오케스트라 입단을 목표로 삼기에 최고연주자과정까지 거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염은초는 달랐다. 리코더라는 악기의 특수성,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한 간절함이 길드홀 음악연극학교에서 첫 관악기 전문연주자과정으로 향하게 했다. 그녀의 입학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스승이 된 이가 라이프치히 음대와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 총장을 지내며 길드홀 음악연극학교에 객원교수로 출강한 리코디스트 로베르트 에를리히다. 이후 그녀의 이력 가운데 기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길드홀 음악연극학교에서 연기를 배운 계기와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염은초의 퍼포먼스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코더 연주자가 ‘연기 처방’을 받은 이유

길드홀 음악연극학교 입학 한 달 만에, 염은초는 현대음악 작곡가 칼 젠킨스의 이름을 딴 클래시컬 뮤직 어워드에 출전한다. 런던 클래식 FM이 공동 주최하는 이 대회는 BBC 프롬스 무대에 세울 신인 음악가 발굴의 장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이 연주한 유튜브 영상 링크를 첨부해 이메일로 1차 예선 지원을 하며 악기 제한이나 참가비도 따로 없다. 별다른 기대없이 예전에 촬영해둔 비발디 협주곡 영상을 제출한 그녀는 며칠 후 학교 총장실로 불려간다.

“우리 학교에서 딱 한 명, 너만 예선 통과했어!”

이날부터 길드홀 음악연극학교 총장과 교수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매일 후드 티셔츠를 뒤집어쓰고 등교하던 ‘먹구름 피리 소녀’를 학교 대표로 내보내기 위한 긴급 처방이 상담과 논의를 거듭하며 이어졌다. 결국 2% 부족한 그녀의 퍼포먼스를 ‘심폐소생술’로 살려준 이는 다름 아닌 BBC 방송 배우 출신으로 대니얼 크레이그·올랜도 블룸·이완 맥그리거·주드 로 등을 가르친 디나 스태브이다.

“할머니뻘 되는 선생님 앞에 서서 연주한 건 1분도 채 안 됐던 것 같아요. 저를 보시더니 ‘그저 네 실력이나 뽐내러 무대에 선 것이 아니며, 돈을 낸 관객에게 연주를 보여주러 왔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관객과 소통하면서 곡에 담긴 너의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 매 공연을 헌정하듯, 관객에게 아름다운 밤을 선사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연주에 임하는 제 마음가짐부터 틀렸다는 말에 무척 놀랐죠. 그 이후론 무대 매너부터 얼굴 표정, 제스처, 작품의 서사에 따라 이미지를 어떻게 그려낼지… 연주에 필요한 모든 퍼포먼스를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대회를 앞두고 2주 동안 집중적으로 연기 지도를 받기 시작한 것이 결국 반 년 넘게 이어졌어요.”

이후엔 연기자 그룹 수업에 들어가 ‘미래의 올랜도 블룸’들과 함께 발성 연습이며, 신체 훈련을 받는 나날이 계속됐다. 연기원 학생들의 졸업 공연에도 작은 배역을 맡아 참여할 수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연습하는 단체 생활이 계속됐고 공연의 막이 오른 후에도 연기자와 연주자의 패턴은 너무나 달랐다. 자신의 레퍼토리를 모두 소화하면 무대를 내려오는 연주자와 달리, 단 몇 초 동안 등장하는 장면을 위해 무대 뒤에서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대기해야 하는 배우 생활은 그야말로 새로운 ‘정신 트레이닝’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는 그동안 어려워하던 감정이 저절로 표현되고, 컨디션을 관리하는 방법까지 자연스레 터득하게 됐다.

한 달 간의 연극 공연을 마치고 일주일 뒤 이어진 그녀의 졸업 연주회. 모든 연주가 끝난 뒤 연기 선생님은 “이제 너는 무대 위든, 밖이든, 심지어 거리에서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온 염은초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따스한 숨결에 담아 전하고 있다. 리코더로 언제, 어디서든 말이다.

리코더로 찬란하게 빛나는 바로크 음악

염은초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국내 첫 리사이틀 무대엔 하프시코드 연주자 나오키 기타야가 함께한다. 스위스 취리히 음대에서 반주법 교수를 거친 그는 니더작센 콩쿠르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지난해 취리히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하프시코디스트로 내한한 바 있다. 국내에서 흔치 않은 리코더·하프시코드 듀오 콘서트는 바로크 음악 애호가뿐 아니라 리코더의 매력을 새롭게 알아가고 싶은 이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공연은 ‘토털리 바로크(Totally Baroque)’라는 부제답게 텔레만·폰타나·셰데빌·헨델·코렐리 등 다양한 바로크 음악 작곡가들이 각기 다른 스타일로 그려낸 서정과 인간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동시에 그간 염은초가 독일·이탈리아·스위스·런던에서 연주하며 걸어온 길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무대에는 그녀의 음반에 수록된 텔레만 리코더를 위한 12개의 환상곡 중 3번을 시작으로,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가장 선호하는 곡으로 손꼽히는 폰타나의 소나타 테르차가 리코더 편곡 버전으로 연주된다. 하프시코드의 기교가 인상적인 헨델 리코더 소나타에선 나오키 기타야와 염은초의 퍼포먼스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코렐리의 소나타 5번 ‘라 폴리아’로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인터뷰 말미, ‘먼 훗날 꿈꾸는 무대’에 관해 묻는 질문에 “모든 사람이 기분 좋게 와서, 웃으면서 돌아갈 수 있는 공연, 문을 열었을 때 모든 사람이 보석처럼 빛나는 무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염은초.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자유로운 음색의 리코더를 통해 앞으로 그녀와 마주할 모든 날이 그러하길 바란다.

사진 봄아트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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