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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김지훈
젊은 성악가의 초상
글 김선영 기자 2/1/2017 |   지면 발행 ( 2017년 2월호 - 전체 보기 )




송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웅장한 소리,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찬가’가 건네는 인류애와 평화의 메시지는 한 해의 아쉬움과 새해에 대한 기대를 염원하는 이들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1824년 초연된 베토벤 교향곡 9번은 당시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전통적 양식의 교향곡 형식과 템포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성악과 기악이 분리되어 취급되던 시절, 교향곡의 마지막 4악장에 사람의 목소리를 등장시킨 것은 가장 큰 반전이었다. 2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듣기 위해 온 이들이 가장 숨죽이는 순간 역시 바로 4악장일 것이다.

다양한 송년 음악회 중에서도 ‘서울시향의 합창 교향곡’ 공연은 지난 몇 년 사이 해외에서 활동 중인 실력파 성악가들을 국내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과 대중에게 소개하는 통로가 되어왔다. 소프라노 캐슬린 김, 테너 김석철, 베이스 박종민 등 그간 무대에 오른 이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그러하다. 그리고 2016년 ‘서울시향의 합창 교향곡’ 공연에서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으며 기자의 눈에 들어온 솔리스트는 베이스 김지훈이다.

지난 2016년 12월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작곡가 의도에 따라, 기승전결을 향해 변화무쌍하게 나아가던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4악장 서주를 지나고, 이내 기악을 끊으며 베이스가 외친다.

“오 나의 친구여! 이런 곡조는 아니오, 더 즐겁고 기쁜 곡조를 노래하자!”

실러의 시가 등장하기에 앞서, 베토벤이 직접 쓴 가사로 시작되는 베이스의 첫 소절. 작곡가의 진심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김지훈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보편적인, ‘기쁨(freude)’을 외치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가사 의미와 선율, 그에 걸 맞는 풍부한 음색이 어우러져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2000여 명 관객을 향한 찬란한 외침으로 다가왔다.

서울대에서 서혜연을 사사한 후,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한 베이스 김지훈은 영국으로 건너가 로열 오페라하우스(이하 ROH)의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Jette Parker Young Artists Programme)에 선발되어 극장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로열 오페라하우스 컴퍼니 전속 가수(company principal)로 활동하면서 네 시즌 동안 180회 가량 무대에 오른 그는 현재 세계무대 곳곳을 활보하는 중이다. 가깝게는 5월, 에셴바흐의 간택으로 런던 심포니와 함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로열페스티벌홀에서 공연하며, 매년 여름 영국 햄프셔에서 열리는 그랜지 파크 오페라, 런던버로 페스티벌 오페라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2017/2018 시즌엔 로열 오페라 무대에 다시 오를 예정이다. ‘서울시향의 합창 교향곡’ 공연을 마친 직후, 웨일스 내셔널 오페라의 푸치니 ‘라보엠’ 리허설로 출국을 앞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2016년 ‘서울시향의 합창 교향곡’으로 한국 무대에 데뷔했다. 소감이 어떤가?

학창 시절, 합창단으로 베토벤 교향곡 ‘합창’ 무대에 자주 올라 모든 가사를 다 외울 정도지만 솔리스트로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번째 리허설을 하면서 좋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그리고 평소 선망하던 솔리스트들과 한자리에 선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감격스럽기도 했다.

에셴바흐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상당히 깔끔하고 담백했다. 너무 무겁거나, 지나치게 감정에 호소하지 않아서 오히려 작품의 진가를 또렷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리허설에서 지휘자의 요구사항은 어떠했나?

솔리스트와 합창단에게 소리에 앞서 가사, 단어의 색깔을 잘 보여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템포의 경우 모든 성악가에게 독일어의 복자음을 다 발음하도록, 오케스트라도 그것을 제대로 듣고 맞춰서 연주하도록 조율했다. 내겐 첫 소절 ‘오 나의 친구여’가 자칫 ‘오 나의 적이여’ 같은 느낌이 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노래하라고 주문했다. 무대에 섰을 땐 작품을 대하는 지휘자의 마음이 눈빛과 미소와 손끝을 타고 흘러나와, 함께하는 이들의 능력치를 자연스레 높여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울대를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 음악원을 2년 만에 졸업한 후, 영국으로 건너갔다. 대부분의 남성 성악가들이 택하는 독일행과는 달랐는데.

밀라노 음악원 성악과 교수들의 동의로 단기간에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직후, 어디로 가야 할지 정보가 많지 않았다. ‘성악가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제공해준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지원서를 냈고, 최종 합격해서 2011/2012 시즌부터 ROH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소속됐다. 한국인 중에는 그간 소프라노 이하영, 테너 박지민, 바리톤 임창한, 테너 김지현이 이곳을 거쳤고, 프로그램이 생긴 지 10년째 되던 해에 들어간 다섯 번째 한국인이 됐다.

로열 오페라에서 연기력을 인정받기까지

독일어권에선 오페라극장 내 오펀 스튜디오에 합격한 성악가들이 교육과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크고 작은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지고, 이후 평가에 따라 극장 전속 가수로 활동하거나 다른 극장 데뷔 기회를 얻는 편인데. 영국에선 어떤가?

다른 극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ROH의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은 젊은 가수를 선발해 오페라 무대에 세우고, 필요한 것을 지원해주는 성격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극장 프로덕션에 참여하고, 타이틀 롤 커버도 한다. 1차 지원자가 매년 400명이 넘는데 그중에서 오페라 가수는 1년에 5명씩 선발하고, 그 외에 오페라 지휘, 무대감독, 발레 음악 코치 부문은 2년에 한 번씩 정해진 인원을 뽑아 총 14명이 한 시즌을 같이 보낸다.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서 얻은 유익은?

실전에 필요한 것을 배우고,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 음악과 보컬뿐 아니라 언어, 동작과 연기, 무용 등 모두 극장 메인 프로덕션 코치들이 영 아티스트에게 일대일로 가르친다. 오페라 음악감독인 안토니오 파파노와의 마스터 클래스는 영 아티스트에게 언제든 열려 있다. 프로덕션 공연 때문에 극장에 오는 다른 아티스트에게 세션을 요청해 그가 수락하면 지도를 받을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요나스 카우프만,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 등을 만났다. 현재 개인 레슨을 받고 있는 소프라노 조세핀 바스토우 역시 이를 통해 만났다.

지난 몇 년 간 소프라노 조세핀 바스토우에게 어떤 영역을 주로 지도받았나?

소리뿐 아니라 캐릭터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에 관해 많이 배우고 있다. 프로로 활동하며 무대에 서는 가수들 대부분이 공연 외 시간에 지속적인 레슨을 받으며 발전과 보완의 시간을 가진다. 조세핀은 내 일상에서 나오는 표현과 노래에서 드러나는 표현에 차이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선,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그분이 쌓아온 50년의 커리어 경험을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배움이 되고 있다.

*1940년생 소프라노 조세핀 바스토우는 ‘맥베스’ ‘살로메’의 타이틀 롤을 맡아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브리튼 ‘글로리아나’ 등을 비롯해 현대 오페라 작품 초연에도 참여했다. 카라얀이 서거하면서 솔티가 지휘를 맡은 1989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베르디 ‘가면무도회’에 조수미가 오스카 역을 맡아 국제적 스타로 발돋움한 무대에서 아멜리아 역을 맡았다. 노래뿐 아니라 탁월한 연기로 인정받아온 바스토우는 영국 왕실로부터 키리 테 카나와(1982),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1992), 엠마 커크비(2007)에게 수여된 ‘데임(dame)’ 작위를 1995년 받았다.

ROH 영상물 중 헤르하임이 연출한 베르디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2013)에도 이름이 올라 있더라. 무대에서 연기할 때 서양 문화권의 제스처나 감정 표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극복해왔는지?

처음엔 문화 차이에서 오는 제스처나 움직임의 한계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우연히 로열 발레 퍼스트 솔리스트인 요하네스 슈테파네크와 이야기를 나누다 평소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됐고, 2년 정도 그에게 걷고 서서 뛰는 것뿐 아니라 표정과 시선 처리 등을 배우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무대 위 연기가 풀리니 극장에서도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더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선 프랑스 병사 로베르트를 맡았는데, 뛰어다니고 넘어지는 등 난해한 연기를 소화하며 노래해야 했다. 연습 초반에 잘할 수 있을지 걱정하던 헤르하임이 내가 해내는 걸 보더니 2막에 총 맞고 죽었어야 할 캐릭터를 5막 끝까지 살려뒀다. 그래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노래 없이 무대 위에서 연기만 했다(웃음).

2014/2015 시즌 컴퍼니 전속(company principal) 가수가 됐다. ROH에 이런 직급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2년간 소속됐고, 과정 중 좋은 평가를 받아 제트 파커 전속 아티스트(principal artist) 자격으로 1년 더 활동했다. 프로그램이 생긴 이래 기간이 연장된 경우는 테너 박지민 등을 포함해 나까지 딱 3명뿐이라고 들었다. 이후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의 하나로는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할 수 없어 ROH 측이 새로 만든 것이 컴퍼니 전속가수다. 이전에 극장에서 계속 일해왔던 제레미 화이트와 함께 컴퍼니 전속가수라는 직급으로 새롭게 계약해 2014/2015 시즌을 보냈고, 작년부터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흔히 중저음 가수의 전성기를 40, 50대로 보곤 한다. 베이스는 다른 음역대에 비해 늦은 나이에 빛을 보거니와, 젊은 나이에 할 수 있는 배역들도 상당히 제한적인데. 시기에 대한 조급함은 없나?

베이스 안에서도 여러 음역대가 있는데 나는 바소 칸단테이다. 베르디, 바그너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데 베이스임에도 고음역을 잘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시절에 가능한 바소 부포는 소리나 캐릭터 면에서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시기에 서포트 롤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정말 많다. 예전에 토머스 햄슨과 ‘시몬 보카네그라’를 할 때, “네 연기가 내 표현력을 이끌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늘 기억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호흡을 어떻게 맞춰갈 수 있는지 배워가는 지금의 시간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조바심이나 성급한 마음은 없다. 시간이 지나서 베르디나 슈트라우스, 바그너의 주요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사진 황필주
헤어·메이크업 협찬 유지승·유혜령(Total Beauty Salon Gees Ryu)
의상 협찬 HUGO BOSS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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