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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엘리소 비르살라제
여왕의 카리스마를 바라보라
글 이정은 기자 2/1/2017 |   지면 발행 ( 2017년 2월호 - 전체 보기 )




▲ ©Jurii Metschetov

엘리소 비르살라제가 온다(Elisso Virsaladze. 때때로 Eliso로 쓰이기도 하며, 간혹 성을 Wirssaladze로 표기). 피아니스트로서 그녀의 이름이 지닌 무게를 아는 이라면 이번 내한 소식이 믿기지 않는 동시에 대단히 반가웠으리라. 그녀의 나이 일흔다섯에서야 비로소 성사된 첫 내한 공연이다. 일본에서는 마스터클래스와 연주를 종종 가지기에, 농담처럼 ‘지나가는 길에라도 한 번쯤 오면 안 되나’ 하고 아쉬워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한국에 온다. 리흐테르 혹은 길렐스 같은 20세기에 활약한 연주자들이 간직했던 일종의 장인 정신과도 같은 경건한 정열에 대한 향수를 지닌 애호가들에게는 비르살라제의 무대가 더없이 반가울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낭만에 대하여

엘리소 비르살라제는 1942년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할머니 아나스타샤 비르살라제(그녀 역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였다)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타고난 테크닉을 지닌 그녀는 열한 살에 쇼팽 에튀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트빌리시 음악원을 거쳐 모스크바 음악원에 진학한 비르살라제는 겐리히 네이가우스와 야코프 자크에게 사사하며 러시아 피아니즘을 계승하는 적통의 길을 걸었다. 스무 살에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했고, 4년 뒤인 1966년 독일 츠비카우에서 열린 슈만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그녀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퍼졌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키릴 콘드라신, 리카르도 무티, 유리 테미르카노프, 쿠르트 잔덜링, 볼프강 자발리슈 등 수많은 스타 지휘자가 그녀와 호흡을 맞췄다. 처음으로 런던에 방문했을 때, 그녀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지휘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연주해 ‘무모할 정도로 대담한 기교(dare-devil virtuosity)’라는 평을 얻었다.
“피아니스트로 산 지 50년이 넘었지만, 스스로 100% 만족스럽다고 느낀 무대는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다섯 번밖에 없다.”

어느 인터뷰에서 비르살라제는 이와 같이 고백했지만, 이는 지나친 겸손 혹은 혹독한 완벽주의의 표출일 터. 1989년 소련은 그녀에게 예술가로서 최고 영예인 인민예술가상을 수여했는데, 조지아 출신임에도 그녀가 러시아에서 이토록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것은 비르살라제가 얼마나 뛰어난 연주자인지를 입증한다.

그녀는 실내악에도 상당한 애정을 쏟았다. 특히 현악 4중주단과 함께 피아노 5중주 구성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기는데, 과거 보로딘 현악 4중주단과 브람스·슈니트케 등을 녹음했으며, 최근에는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현악 4중주단과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첼리스트 나탈리아 구트만은 비르살라제의 단짝으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십 년 동안 함께 연주하고 있다.

비르살라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들을 비교적 많은 음반으로 남겼다. 러시아 레이블인 멜로디야에서 녹음한 슈만 피아노 소나타 2번(1973)과 1번(1980)은 평단의 호평을 받은 슈만 해석이 담긴 앨범이다. 초창기 이후 음반 녹음은 대부분 라이브 클래식스에서 진행됐는데, 모스크바에서 녹음한 쇼팽 전곡 앨범(1985)은 침착한 테크닉과 정확성이 인상적이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앨범들은 주로 1990년대에 녹음된 것들로, 슈만의 여러 작품을 모은 음반(1996)과 1999년 일본 나고야 실황을 담은 쇼팽 음반(2000) 등이 손꼽힌다. 유려한 테크닉은 물론이고 짙은 서정성과 함께 작품에 대한 정교한 이해가 전해지는 명반들이다.

비르살라제의 주요 레퍼토리는 18세기 후반 및 19세기 음악으로, 모차르트·슈베르트·쇼팽·슈만이 그녀의 주 무기라 할 수 있다. 동시에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등 러시아 작곡가들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번 첫 내한 무대에서 그녀는 역시 낭만 시대 작품들을 펼쳐놓는다. 세간의 기대를 가장 많이 모으는 것은 단연코 슈만. 아라베스크 C장조와 환상소곡집 Op.12를 연주할 이번 공연은 리흐테르가 ‘가장 훌륭한 슈만 해석’이라 극찬한 비르살라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여기에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3번 A장조 D664,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2번 D단조, 슈만-리스트 ‘헌정’, 리스트 스페인 랩소디를 더해 낭만의 진수를 유감없이 드러낼 예정이다. 70대 피아니스트의 하룻밤 공연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에너제틱한 프로그램이다. 모두 비르살라제의 손에 익을 대로 익은 곡들로, 한 시대를 이끈 연주자의 원숙한 해석을 만나게 되리라 예상한다.

명연주자, 명스승

어린 시절 모스크바 음악원의 스승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비단 연주력뿐만 아니었다. 러시아 페다고지의 계보를 잇는 그녀는 무섭고 엄한 교수로 잘 알려져 있다. 슈만 콩쿠르 우승 이듬해인 1967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비르살라제는 뮌헨 국립음대와 모스크바 음악원을 오가며 숱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보리스 베레좁스키와 알렉세이 볼로딘은 그녀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며, 떠오르는 신예 드미트리 시시킨 역시 비르살라제에게 배웠다. 한국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박종화와 김태형이 그녀의 문하에 있었다.

뮌헨에서 3년, 모스크바에서 2년. 몇 년 전까지 비르살라제의 제자로 있으면서 그녀를 누구보다도 가까이 오랫동안 봐온 김태형에게 그녀에 대해 물었다.

“레슨은 주로 마스터클래스처럼 진행된다. 다른 학생들이 뒤에 둘러앉아 레슨을 참관한다. 엘리소는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본인이 직접 옆에서 같이 연주하며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학생이 몇날며칠 열심히 연습해간 곡을 ‘내가 몇 십 년 전에 연주했던 건데’라며 너무나 멋지게 들려준다. 덕분에 학생들은 기가 팍 죽어서 나오기 일쑤였다.(웃음) 하지만 그 연주에는 말로 다 전해지지 않는 무수히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연주를 듣는 것 자체가 커다란 배움이고 도전이었다.”

그녀의 천재성은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모양이다. 7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비르살라제는 다양한 국적의 제자들과 각기 다른 언어로 대화한다고. 어떤 방법으로 언어를 공부하느냐는 질문에 ‘신문을 읽으며 말을 익혔다’고 대답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여러 에피소드에 덧붙여, 김태형은 비르살라제가 수년 전 했던 말이라며 오래전 적어둔 메모를 전해줬다.

“예술이란, 긴 시련을 참아 만들어지는, 피아니스트가 일생에 걸쳐 추구하는 것. 콩쿠르는 그저 한때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가는 음악 그 자체에 몸을 바쳐야 ‘초월한 예술가’가 된다.”

세계 곳곳에서 예정된 빽빽한 연주 스케줄은 물론이고 수많은 레슨과 마스터클래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유수 콩쿠르의 심사위원직까지 해내는 그녀는 그야말로 자기 삶을 통째로 음악에 바친 이가 아닐 수 없다. 김태형은 비르살라제에 대해 “수십 년간 피아노와 함께해왔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음악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연주한다”고 기억한다. 눈과 귀로 직접 마주하지 않고서는 결코 온전히 느낄 수 없을 그 열정을 이제 확인할 시간이다. 부디 이번 공연이 한국에서 만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가 아니길 바라며.

글 이정은 기자(el@gaeks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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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김주영이 본 엘리소 비르살라제 | 엄격함 속의 다채로움

검은 머리와 그보다 더 검은 눈매가 매서운 카리스마의 피아니스트. 엘리소 비르살라제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느낀 첫인상이었다.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 시절 그녀는 내게 특유의 엄숙함과 진지한 분위기로 다소의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무서운’ 선생님의 이미지를 주었는데, 어느 해인가 음악회식으로 치러지는 중간고사가 끝난 후 내게 보여준 따뜻함으로 그 이미지는 많은 부분 부드러움으로 바뀌었다. 당시 스스로의 연주가 마음이 들지 않아 의기소침해 있던 내게, ‘그럴 수도 있다. 다음에 더 잘될 것’이라며 건넨 위로는 꽤 오랫동안 내게 위안이 되었다. 평소 자신의 클래스의 학생들에게는 ‘호랑이’로 알려져 있는 비르살라제가 마냥 딱딱한 선생님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주 접했던 그녀의 연주 스타일 속에 그때까지 몰랐던 다채로운 색깔을 발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는 쇼팽의 작품, 그중에서도 대곡인 피아노 소나타 3번이다. 감각적인 색감과 달콤함이 남는 뉘앙스는 그녀의 해석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튼튼하게 짜 맞춰져 흔들리지 않는 텍스트의 전체 구도와 거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논리의 루바토, 엄격하게 조절되는 다이내믹과 페달링을 선보였다. 마치 짙은 선이 그려지는 펜으로 건반 위 음표들을 새기듯 연주해내는 강한 인상의 쇼팽이었다. 고집스런 꼿꼿함과 기초가 잘 다져진 테크닉으로 안정감과 확신을 전달하는 연습곡들의 연주도 호감을 주었는데, 무엇보다 그녀가 사사했던 야코프 자크(1937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의 하드보일드적 스타일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1962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를 차지하며 여성 최초로 상위 입상 기록을 세운 것과 함께 비르살라제의 경력 중 하이라이트를 차지하는 것이 1966년 츠비카우에서 열린 슈만 콩쿠르 우승이다. 그만큼 로베르트 슈만의 독특한 스토리텔링은 그녀의 주특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자칫 장황해질 수 있는 대곡 속의 서사적 표현을 깔끔하고 알기 쉽게 정리해내는 탁월한 표현력은 여성 피아니스트로서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번 내한 공연 프로그램에도 포함된 아라베스크 Op.18과 리스트 편곡의 가곡 ‘헌정’ 등은 가볍지 않은 우아함을 머금은 비르살라제의 시그너처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다.

역시 그녀가 사랑하는 작품인 슈베르트 소나타 A장조 D664를 이번 연주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주로 무채색이 많은 팔레트를 사용하지만 비르살라제의 사려 깊은 터치와 세심함으로 배려된 음색의 뉘앙스는 저마다 고유의 빛을 발하며 움직이며, 슈베르트의 세계는 이런 그녀만의 장점이 유감없이 나타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무표정하게 등장해 흔들림 없이 특유의 개성으로 무대를 채우는 비르살라제는 연주가 모두 끝난 후 비로소 미소를 띠며 청중들에게 인사하는데, 살짝 수줍은 듯한 대가의 웃음이 늘 매력적이었다. 늦게 만나 더욱 반가운 그녀의 첫 내한 독주회가 진중한 학구적 면모와 묵직한 존재감, 그 안에 깃든 삶에 대한 여유와 관조를 온전히 맛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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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소 비르살라제 피아노 독주회
2월 16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슈만 아라베스크 C장조,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A장조 D664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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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은 기자(el@gaeksuk.com)·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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