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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오페라의 마탈론 ‘벤체슬라오의 그림자’ & 파리 오페라의 생상스 ‘삼손과 델릴라’
참신한 기획과 실험, 기다림 끝에 오른 무대
글 배윤미(파리 통신원) 12/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12월호 - 전체 보기 )



아르헨티나 출신 작곡가 마르틴 마탈론의 현대 오페라 ‘벤체슬라오의 그림자(L’Ombre de Venceslao)’가 지난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수도, 렌 오페라극장(Opéra de Rennes)에서 세계 초연되었다. 한편 파리 오페라는 10월 7일부터 11월 5일까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에서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가 25년 만에 올라 세계 초연 못지않은 관심을 모았다. 후한 페론의 독재 시절과 기원전 성경적 진실을 각각 담은 이 두 작품은 진실과 신화 사이에서 표류하는 인간 조건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렌 오페라의 마탈론 ‘벤체슬라오의 그림자’


▲ 거센 자연과 투쟁하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벤체슬라오의 그림자’ ©Laurent Guizard

지난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렌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벤체슬라오의 그림자’는 아르헨티나 출신 예술가 3명에 의해 나온 작품이다. 작곡가 마르틴 마탈론(Martin Matalon), 연출가 호르헤 라벨리(Jorge Lavelli), 코피(Copi)라 불린 극작가이자 만화작가였던 라울 다몬테 보타나(Raul Damonte Botana, 1939~1987)가 그들이다. 이들은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많은 경력을 쌓았고, 특히 마탈론은 미국에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런 그들의 재능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 작품이 지닌 특별함 때문이었다.

작품 기획의 출발은 젊은 성악가들을 프로 음악가로 무대에 데뷔시키기 위해 발족된 프랑스 리리크 프로모션 센터(Centre Français de Promotion Lyrique)에서 비롯된다. 설립 취지에 따라 젊은 음악가들의 기량이 돋보이고, 실제 무대 체험을 가속화할 수 있는 작품이 구상돼야 했다. 첫 번째 기획으로 선정한 작품은 로시니의 ‘렝스로의 여행’이었는데, 소프라노 최윤정 같은 한국 성악가들이 대거 발탁되어 일 년 넘게 프랑스 순회공연을 가진 바 있다.

올해는 코피의 작품을 택했다. 코피의 작품 대부분을 연극으로 각색한 호르헤 라벨리가 당연히 연출을 맡고, 현대 오페라 버전으로 제작하기 위해 작곡가 마탈론이 발탁됐다. 이들은 연극적 한계를 두고 끊임없이 토론하며 음악을 만들어갔고, 성악진의 가능성과 한계 등을 체험적 관점에서 감안해 수정 또한 뒤따른 점이 특별하다. 덕분에 상당히 연극적이면서 매우 성악적일 수밖에 없는 독창적인 작품이 탄생했다.

각색을 맡은 호르헤 라벨리는 이 작품을 거대한 팜파 지방에서 거센 자연과 투쟁하며 생존하는 사람들의 꿈과 좌절을 그린 일종의 여행기로 서두를 그려냈다. 작품은 주인공 벤체슬라오와 딸 시나, 아들 로젤리오, 그리고 정부 메시타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라르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남미에서 벤체슬라오 가족의 격동적인 인생 역정을 그린 서사시로 90분가량의 단막 오페라였다. 때문에 빈번한 무대의 변화를 리드미컬하게 처리하기 위해 아주 간소하면서도 이동이 유연한 소품과 미니멀한 장치가 무대미술에 구성됐다. 무대 배경은 파라나 강에서 멀지 않은 팜파 지방으로 얼음처럼 딱딱한 땅에 끝없이 비가 내리는, 살기 어려운 곳이다. 로젤리오가 마차를 타고 나오는 장면으로 작품은 시작되는데, 이런 분위기가 잘 느껴지도록 조명 디자이너 장 라페르는 어두운 검푸른 조명 아래 스모그를 써서 비가오고 습진 팜파 지방의 모습을 묘사했다.


바리톤 티보 데스프랑테가 맡은 벤체슬라오는 진흙땅에 바퀴가 빠져 마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악조건에서도 논밭을 가꾸며 사는 강한 캐릭터다. 우루과이의 작은 부족 출신인 그는 이곳까지 이민한 억척스러운 유랑민으로 난폭하고 고약한 성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소름 돋을 정도로 벤체슬라오를 무시무시하게 연기한 티보 데스프랑테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바리톤 마티외 가르동이 맡은 마을의 부자 상인 라르기는 벤체슬라오와는 정반대 인물이다. 부드러운 성격에 벤체슬라오의 정부 메치타를 짝사랑해, 그녀와 사는 것이 꿈인 노이지만 문제는 육체적 한계였다. 초콜릿을 들고 그녀를 찾아가 아랫도리를 벗지만, 그는 끝내 욕망을 이루지 못한다. 메치타의 앵무새는 라르기가 성행위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저속한 언어로 반복한다. 이 외에도 공연에선 저속한 성적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데, 작품의 배경인 농부들의 일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한 듯 보였다. 어쨌든 이 앵무새는 웃음과 익살을 끌어내며 작품의 우화적인 면을 강조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토론을 발발시킨 작품의 결말

미래를 꿈꾸는 두 연인, 시나(소프라노 에스텔레 포스시오 분)와 로젤리오(테너 지아드 네메 분)다. 이들은 겉보기엔 형제, 자매처럼 보이지만 사실 로제리오는 메치타와 라르기의 아들로, 벤체슬라오가 입양했다. 배 다른 남매인 이들은 결혼을 꿈꾼다. 무대에 라디오가 보이고 시나는 그 앞에서 티타의 노래를 들으며 흥겨워한다. 시나의 꿈은 티타 메레요(1904~2002)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탱고 춤을 추는 것이다. 티타, 즉 로라 아나 메레요는 생존했던 아르헨티나 탱고 가수이자 배우로, 그야말로 당대의 우상이었다. 결국 벤체슬라오는 시나와 로젤리오의 결혼을 승낙하고, 모든 것을 두 사람에게 맡긴 채 메치타, 그리고 앵무새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구와주 폭포로 떠난다.

변호사가 된 로젤리오와 함께 가정을 꾸리던 시나는 출산을 하지만, 쥐약을 섞은 우유를 실수로 잘못 먹여 아기는 죽고 만다. 이후 194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난다. 자동차 오염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시나는 탱고를 추는 카바레를 전전하며 행복해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둑들을 그린 초상화가 가득 걸린 재즈풍 카바레에는 반도네온 연주자들이 여러 탱고음악 선율을 연주한다. 마탈론은 기존에 존재하는 100여 곡의 탱고 음악 중 라벨리와 함께 이 장면에 인용될 곡들을 골랐다.


▲ 소프라노 에스텔레 포스시오의 뛰어난 탱고 퍼포먼스는 놀라웠다 ©Laurent Guizard

카바레를 전전하는 사기꾼 같은 탱고 무용수 코코 펠리그리니(호르헤 로드리게즈 분)를 만나 함께 탱고를 추는 장면에서 소프라노 에스텔레 포스시오의 퍼포먼스는 놀라웠다. 코코는 시나에게 영화배우를 시켜주겠다고 유혹하지만 티타 같은 은막의 스타를 꿈꾸던 시나의 꿈은 갑작스러운 기관총 소음 아래 무너진다. 1955년 후안 페론의 쿠데타로 시나와 펠리그리니는 마지막 스텝을 끝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진다.

메치타 없이 살 수 없는 라르기는 그녀를 찾아 이구아수 폭포로 떠난다. 해후한 그들은 벤체슬라오가 구해온 붉은 오랑우탄과 순간의 행복을 나눈다. 어느 일요일 하얀 셔츠를 챙겨 입은 벤체슬라오는 목을 매단 채 자살한다.

마지막 대단원은 벤체슬라오의 그림자, 즉 유령이 세상을 뜨는 푸른 밤이다. 여전히 풀어헤친 머리결의 메치타는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녀를 찾아온 벤체슬라오는 안부를 묻는다. 그녀는 노인 라르기와 죽은 자식들의 소식을 전한다. 그러면서 메사 디 보체로 “또 한 번 너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대답과 함께 벤체슬라오는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아주 시적인 장면에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객석으로 흘러들었다.

벤체슬라오는 왜 집과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떠나 자살했을까? 이 작품은 시적인가, 아니면 정치적인가? 공연을 관람한 기자들은 토론을 멈출 수 없었다. 작곡가 라벨리는 이것은 코피의 작품이 지닌 진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며, 원작이 지닌 심오한 작품성을 엿보게 했다. 어느 평론가가 말했듯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박사 논문을 써야 할 정도로 방대하고 쉽지 않다. 그러나 라벨리는 그의 관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벤체슬라오는 유랑민으로 계속 이동하며 사는 캐릭터다. 그렇기에 그가 폭포 근처로 떠난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게 이 작품은 아주 시적이면서 정치적이다. 하지만 벤체슬라오의 자살은 그가 스스로 삶의 여정을 다 살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반면 어느 평론가는 “후안 페론이 우루과이 출신으로 정권을 쥔 까닭에, 역시 같은 지역 출신인 벤체슬라오는 이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자살했을 것”이라는 정치적 분석을 강력하게 내놓았다. 음악적 측면에서 마탈론의 곡은 비 조성이나 신 조성 음악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악 부분을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났다. 극적인 강세와 효과는 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의 ‘병사들’을 떠올리게 했다. 특히 탱고 장면에서는 ‘병사들’에서의 카바레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탈론은 반도네온을 토속적인 아르헨티나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쓰기보다는 성악을 효과적으로 돕는 수단으로 활용해 실험성이 돋보였다. 각각의 캐릭터는 성악 면에서나 연기 면에서 아주 뛰어났다. 반면 대사만으로 이뤄진 장면에서는 객석까지 선명하게 들리지 않아 아쉬웠다. 브르타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에르네스트 마르티네스 이스퀴에르도의 지휘도 성공적인 공연에 한몫을 했다.

파리 오페라의 생상스 ‘삼손과 델릴라’

▲ 권력자와 희생된 계층, 남녀의 사랑을 보여준 ‘삼손과 델릴라’ ©Vicént Pontet/Opéra national de Paris

파리 오페라는 10월 7일부터 11월 5일까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에서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를 필립 조르당 지휘, 이탈리아 출신 젊은 연출가 다미아노 미첼레토의 모던하면서 미니멀한 무대로 올려졌다. 어느 사회든 권력자와 그 아래 노예처럼 희생된 계층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선과 악, 죄와 벌 같은 성경적 요소를 벗어나 삼손과 델릴라는 일종의 희생자들로,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캐릭터로 표현하기 위해 현대적 무대미술과 의상으로 무대가 꾸며졌다.

1막 히브리인들이 학대당하는 장면은 크리스토퍼 로이 연출의 베르디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와 흡사해 보였다. 파올로 팡탕이 선보인 무대미술은 1970년대풍 시멘트 건물 같은 아파트로, 1층이 거대한 유리와 발코니로 장식되었다. 델릴라의 침실은 정권자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며, 그 아래는 히브리 노예들이 사는 땅속으로 상하격차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후 속옷 차림으로 발코니를 오가는 델릴라는 스카프를 삼손에게 주며 유혹을 던진다.

극적 긴장감은 델릴라가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는 장면으로, 델릴라 역의 아니타 라슈벨리슈빌리는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가운 차림으로 육체미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삼손 역의 알렉산드르 안토넨코 역시 탄탄한 가슴을 자랑하는 미남으로 두 남녀는 시각적인 면에서 막상막하였다. 게다가 조지아 출신인 라슈벨리슈빌리는 풍부하고 강렬한 성량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또한 삼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2막 1장의 아리아 ‘내 사랑! 연약한 내 마음에 힘을 주오’와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에선 메사 디 보체로 은근한 분위기를 자아내 청중의 큰 박수를 받았다. 삼손 역의 안토넨코 역시 균질한 테크닉을 선보였다.

삼손은 사랑의 증거를 달라고 조르는 델릴라 앞에서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하이라이트 장면임에도 동선은 아주 단순하다. 반면 3막에서 장님이 된 후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에서는 성악적 에너지와 감정적인 부분을 강렬하게 표현하며 호평을 받았다.

3막은 델릴라가 클레오파트라로 변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모두 로마식 의상에 가면을 쓰고, 자유분방한 쾌락적인 분위기를 즐긴다. 여기에 찬란한 색채로 대조를 이루는 삼손이 등장하고, 이후 삼손에 의해 궁전이 파괴되는 장면에서 델릴라는 그의 손을 잡고 궁중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이어서 무대 각 옆 창문으로 처리된 세트가 갑자기 폭파되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나 단순하게 처리된 연출 때문에 관객들이 작품 전개에 따른 의도를 다 이해했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한 예로 어느 관객은 오페라극장 문을 나서며 “왜 델릴라가 삼손을 도와주지?”라고 묻자 그의 부인은 “그녀가 삼손을 사랑하기 때문이지”라고 답했다. ‘삼손과 델릴라’는 누구나 다 알지만, 이 신화가 신의 벌보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임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러한 면에서 이번 공연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이번 프로덕션은 파리 오페라가 25년 만에 올렸다는 점에서 성공작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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