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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김민
음악으로 그린 인생이라는 그림
글 국지연 기자 12/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12월호 - 전체 보기 )




2016년은 김민에게 어느 해보다 의미 있는 해였다. 작년에 창단 50주년을 맞았던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는 올 한 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안정된 연주로 꾸준히 무대에 서며 음악적 호흡을 가다듬었고, 서울 센트럴 콘서바토리(SCC) 개원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예술 교육의 장을 넓혀나갔다. 음악으로 빚어진 그의 인생은 이제 더 깊고 넓은 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2014년 12월,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구 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50주년을 맞아 가득 메워진 기자회견장에 그가 등장했다. 핏이 잘 맞는 수트에 남색 행커치프를 한 김민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타나 감격스런 소감을 밝힌 후 기자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누구보다 타고난 예술성과 끼를 지녔고 자유로운 에너지가 가득했던 그였지만, 김민은 늘 누군가와 어울리며 그동안 무대에서 아름다운 음악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는 우리나라 실내악의 역사이자 그의 음악 발자취이기도 하다.

김민과 함께 음악 작업을 해온 연주자들은 그가 평소에는 편하고 털털한 성격이지만 음악과 경영에서는 굉장히 섬세하고 철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포용력과 책임감을 지닌 리더였고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꾸준히 무대에서 들려준 훌륭한 솔리스트였다.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가 창단 25주년을 맞았던 해, 그는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세계에 나가 우리만의 색깔이 깃든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2015년 월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는 해외 언론으로부터 ‘연주에서 그들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평을 받았다. 2016년 1월부터 서울바로크합주단에서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꿔 시작된 첫 항해는 성공적이었다. 그들만의 정체성을 지닌 앙상블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김민의 꿈이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꿈의 시작, 운명이 된 바이올린


▲ 1958년 연주회에서의 김민

생각해보면 김민만큼 중·장년 세대와 젊은 세대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며 무대에서 함께 현역으로 연주 활동을 해온 연주자는 흔치 않다. 우리나라 음악 역사의 궤를 같이하는 그이지만 그는 언제나 무대 위 의자에서 동시대인과 호흡하며 음악을 공유하고 나눠왔다. 단원들과 눈을 맞추며 음악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김민 나이의 원로 음악가들과는 또 다른 에너지를 품고 있다.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 역사는 아주 짧아요. 그러나 전쟁 통에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고 포기하지 않았던 걸 보면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이 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잘 말해주죠. 음악이 절실하던 우리 세대부터 해외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거장들과 어깨를 견주는 지금의 젊은 세대까지 우리 음악사는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이 꿋꿋이 발전해왔어요. 그리고 난 그 현장을 지켰던 사람일 뿐이지요. 생각해보면 내 능력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행운도 따르고 사람들도 모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 후회는 없어요.”

김민이 바이올린을 시작한 건 일곱 살 무렵이다. 아버지는 플루트를 좋아했고 어머니가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니 예술 쪽 재능을 유전적으로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이 건축 등 예술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걸 보면 우리 집안이 예술에 재능이 있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성격이 급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꽤 꼼꼼한 면이 있는데, 그런 건 아버지의 착실한 성격을 닮아서예요. 아마도 그 덕분에 꾸준히 한 단체를 이끌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부모님은 내가 태중에 있을 때 이미 바이올리니스트로 키울 작정으로 일본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소장하던 바이올린을 구입했을 만큼 교육열이 남다른 분들이셨죠. 일곱 살 무렵 어린 제 손을 잡고 정봉렬 선생님께 데려가 레슨을 받게 한 게 지금도 생각이 나요. 한국전쟁이 났을 때 부모님이 보따리에 먼저 챙긴 것도 내 바이올린이었으니까요.”

부모의 열성에도 김민은 바이올린을 공부하면서도 화가가 되는 걸 꿈꿨다. 그는 미술에도 소질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색깔과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다. 개성을 살려 옷 입는 데에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부모님께 인사할 땐 똑바르게 쓴 모자를 문을 나서며 비스듬히 바꿔 쓴 아이가 김민이었다. 보성중학교 시절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음악과 미술을 전공하는 갈림길에서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가 음악가가 되길 원했다.

“미술이 하고 싶어 바이올린을 팔아 가출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지만 그땐 상황이 무척 심각했어요. 사실 그때 가출을 할 수 있었던 건 평소 좋아하던 영화 때문이에요. 제가 중·고등학생 시절엔 학생들이 영화관을 출입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지요. 청소년 관람 영화를 제외하곤 보기 어려웠는데, 그래도 난 친구들과 종종 몰래 영화관에 들어가 보기도 했어요.(웃음) 학교에서 가끔 영화 단체 관람을 하기도 했는데, ‘톰 소여의 모험’ ‘쿼바디스’ 같은 작품을 보여줬어요. 특히 중학교 때 본 ‘톰 소여의 모험’이 너무 재미있어 여러 번 봤죠. 바로 그 영화가 가출을 하는 데 어떤 용기 같은 걸 준 것 같아요.(웃음)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나, 레슨을 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초등학교 때 친구 놈을 만났죠. 그리고 그 길로 친구랑 악기점에 들러 제 바이올린을 팔아버렸어요. 친구에게 돈을 얼마 떼어 주고는 그 돈을 갖고 제주도까지 줄행랑을 쳤죠.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밀항해 미술 공부를 할 생각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집을 나온 지 40일 만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어요. 민이가 돌아왔다며 어머니는 맨발로 뛰어나오시고 아버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시더군요. 실종신고도 하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더라고요. 그 사건을 계기로 일 년은 바이올린을 안 하고 미술반에 들어가 신나게 그림만 그렸어요. 그런데 결국 고등학교 진학할 땐 음악을 택했죠. 그 이후부터는 제게 운명이 되려던 것인지 바이올린을 열심히 했어요.”

후회는 없는 걸까? 그는 후배들에게 말한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하하! 그때부터는 한 번도 한눈팔지 않고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믿고 지금까지 왔는걸요. 미술을 할 걸 하는 후회는 없어요. 다만 나이가 더 들면 그림을 다시 그려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지금까지 못 그린 그림을 여행을 다니면서 자유롭게 그려보고 싶어요.”

김민의 다른 이름, 서울바로크합주단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 함부르크 국립음대를 졸업한 그는 베를린 라디오심포니에서 활약했고 한국인 최초로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한 연주자였다. 19790년 국립교향악단악장에 이어 1981년부터 1994년까지 KBS교향악단 악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9년, 김민은 운명처럼 서울바로크합주단과 만나게 된다. 그는 1980년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재조직, 재창단하여 오늘날 한국실내악단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그의 음악 인생 여정을 함께 해온 서울바로크합주단은 1956년 故 전봉초 교수에 의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많은 음악 팬을 보유하고 있고 수많은 해외 초청 연주로 한국을 대표하는 실내악단으로서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1979년 귀국하여 초대 악장이 된 그는 서울바로크합주단을 국내 최초 악장 중심의 전문 실내악단으로 재편성하여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큰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경쟁력 있는 단체가 되기 위해서는 합주단의 캐릭터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뛰어난 연주력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 상품 가치가 있는 실내악단이 되려면 결국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확실한 색깔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계 속의 바로크, 바로크의 세계화’라는 슬로건은 그렇게 지금의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의 핵심 철학이 되었다.

“전봉초 선생님이 서울바로크합주단을 만드셨을 때 전 서울대 4학년에 재학 중이었어요. 이후 유학을 하고 귀국해서 보니 합주단의 활동이 중단되어 있더군요. 5년 정도 솔로 연주 활동을 하다가 옛 멤버들을 추슬러 다시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재창단하기로 했죠. 실내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는 실내악단이 존재하기도 어려웠는데 거기에 좋은 연주까지 계속 무대에 올린다는건 기적 같은 일이었죠. 그러면서 그때 절실히 느낀 것이 우리만의 독창적인 음악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 신념으로 단원들과 지금까지 달려왔죠.”

김민은 말로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솔선수범해 보여주는 리더십으로 권위를 쌓았다. 단원들과 같이 연주하며 고민하고 또 배우는 김민의 모습은 여느 단원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케스트라가 힘들 때면 가장 먼저 앞장 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서로 모난 부분은 감싸주고 북돋우며 신뢰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단원끼리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다 보니 세월이 흘러 그들은 이제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실내악과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균형이에요. 아름다움은 조화에서 비롯되죠. 특히 앙상블은 말할 것도 없어요. 그 조화는 단원들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중요한데, 리더는 그 조화가 잘 이뤄지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 역할이 쉽지는 않았지만요.”(웃음)

세계를 향한 비상,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


▲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 창단 50주년 월드 투어 연주 모습

2015년이 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50주년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해였다면, 2016년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이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바꾸고 첫 출발을 한 의미 있는 해였다.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지도를 펴 든 선장의 마음으로 그는 묵묵히 파도를 가르며 나아갔다. 그리고 일 년. 작년과는 다른 자신감이 지금 그를 미소 짓게 한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이라는 이름이 워낙 오래되어 새 단체명이 잘 홍보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우려를 깨고 많은 사람이 이제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신 것 같아 다행스러워요. 작년에 월드 투어를 마치고 올해는 새로운 한국 창작곡과 현대곡도 꾸준히 연주되며 우리만의 정체성을 다듬고 매만진 해가 아니었나 싶어요. 무엇이든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지요. 2016년은 우리만의 정체성이 깃든 음악을 연주하고 세계무대에 나가기 위한 초석을 다지며 충전할 수 있었던 시간이어서 더 의미있었던 것 같아요.”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가 세계 속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정체성을 띠게 된 건 오랜 시간 정통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뿐 아니라 현대 작품과 우리 창작곡을 꾸준히 무대에서 연주한 덕분이었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려야 하는 건 음악가의 의무이지만 대중의 기호를 무시할 수 없는 음악계의 사정을 생각하면 사명감 없이는 지속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잘 알려진 작품과 현대 작품들을 자연스럽게 같이 무대에 소개하며 청중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꾸준히 레퍼토리를 확장하며 그 길을 걸어온 결과, 내년에는 오작교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지원도 받게 되었다. 그는 그때 느꼈다고 한다. “아! 그래도 우리가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구나!” 그리고 놀라움과 감사, 뿌듯함이 밀려왔다.

“돌아보면 나의 음악 인생은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해왔지요. 기획, 디자인, 섭외 등을 혼자 다 한 적도 많아요. 혹시 다른 데서 수입이 생기면 여기에 쏟아 부었죠. 행정이란 건 배워본 적도 없어요. 어쩌면 행정이 예술가에겐 가장 약한 부분이죠. 따로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잘 점검해보고 균형만 잃지 말자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균형을 잡아주고, 한 사람만 손해 보지 않도록,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약점이 있어도 궁지로 몰지 않으려 했어요. 서로의 좋은 점을 찾아주려고 노력하면서 말이지요.”

내년에도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의 공연 일정은 쉴 틈 없이 빼곡하다. 특히 5월 27일부터 28일까지 독일 마부르크에서 있는 에컬스하우제너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는데 기돈 크레머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어 기대를 모은다. 그 밖에 이탈리아와 홍콩에서도 다양한 초청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다.

함께 꾸는 꿈, 예술 교육

얼마 전에는 새로운 소식도 들려왔다. 그가 서울 센트럴 콘서바토리(Seoul Central Concervatory, 이하 SCC)의 이사장으로 클래식 음악 교육의 더욱 넓은 장을 열었다는 소식이었다. 서울대 음대학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그는 10년 동안 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아카데미를 통해 청소년 음악 교육과 영재 교육에 힘써왔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이끌면서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예술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왔죠. 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아카데미에서는 미취학 아동부터 초·중·고교생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연주와 기초 교육을 병행해왔는데, 반응이 꽤 좋았고 꾸준히 성과가 있었어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런 교육을 어린 학생들뿐 아니라 전공생과 비전공자들도 함께 받게 할 수 없을까 생각했었죠. 그러려면 공연과 연주, 교육이 하나가 되고 전공자와 비전공자, 젊은 세대와 중년, 노년이 배우고 즐길 수 있는, 모두가 음악으로 행복한 그런 예술 교육 프로그램과 공간이 필요했어요. 다양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모인다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있던 차에 단원들과도 뜻이 잘 맞아 SCC를 오픈하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단원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여 복잡한 행정상의 시스템에 의해 교육의 본질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고 훨씬 융통성 있고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한 점은 SCC만의 특별한 자랑이다. 전문 교육의 경험과 세계적인 음악 교육의 흐름을 연구한 전문가들이 만든 새로운 커리큘럼 또한 돋보인다. 기존 클래식 음악 교육의 획일화된 방식을 완전히 탈피한 신선한 프로그램으로 벌써부터 음악계의 반응이 뜨겁다.

“많은 시간 동안 충분한 역량을 쌓아왔고, 교육은 그동안 우리가 늘 해오던 것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훨씬 빨리 듣고 정확히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지요. 또 그것이 기존 예술 교육기관과는 가장 차별화될 수 있는 우리의 정체성일 테고요.”

SCC는 먼저 교육 시설에 파격적으로 투자해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쾌적하고 안정된 교육 공간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현재의 서울바로크합주단 아카데미 교육 공간을 1층부터 4층(SCC홀)까지 확장해 건물 전체를 교육의 장으로 마련했다.

오랜 시간 교단에 서온 김민에게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자 가장 먼저 ‘교육의 퀄리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체계화된 시스템 속에서 얼마나 좋은 질의 교육이 이루어지느냐가 교육의 성공을 가른다는 것이다.

“우선 무엇을 배우고 가르쳐야 할지를 서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이 진정성있게 전해질 때 학생도 좋은 것을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 무조건 테크닉부터 가르치는 선생님은 당연히 좋은 교육자라 할 수 없겠죠. 내용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질 때 좋은 교육도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그는 서울대에서 훌륭한 학생들도 가르쳐봤고 퇴임 후에는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도 가르쳐봤지만, 결국 음악은 작품을 쓴 작곡가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복잡한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작품 자체에 대한 공부와 분석뿐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테크닉 연습과 분석도 필요하지만 그 밑바탕에 인문학적 지식과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공부가 바탕이 되어야 해요. 문학과 영화, 건축, 미술, 철학 이 모든 것은 음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또 자신의 악기뿐 아니라 다른 악기, 음악학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좋은 음악가가 될 수 있지요.”

황혼의 꿈, 예술은 내 자신을 찾는 여정


얼마 전 루이스 슈포어 영바이올린 콩쿠르 심사에 다녀온 김민은 힘든 일정이지만 젊은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으면 생동감이 넘친다고 말했다.

“요즘은 국제 콩쿠르 심사에 갈 때마다 정말 놀랍니다. 연주 수준이 무척 높아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필리핀, 싱가포르에서 온 젊은이들의 연주력이 특히 뛰어나죠. 중국의 경우 예전엔 교육이 오로지 한 분야에 뛰어난 인재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면, 요즘은 좀 더 다양한 면에서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이번 콩쿠르에서도 훌륭한 젊은이를 많이 만날 수 있어 기뻤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올해 국제 콩쿠르에서 좋은 소식을 많이 전했지요. 최근 바이올린과 성악 분야에서 특히 국제 콩쿠르에서의 두드러진 성과가 많은데, 반가운 소식이면서도 이제는 테크닉보다는 클래식 음악의 전통 위에 우리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연주에 대한 공부와 교육이 더 능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요즘 젊은 연주자들이 콩쿠르 준비와 바쁜 연주 일정 탓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보여 마음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난 권혁주의 얘기가 나오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혁주는 무척 재능이 많고 훌륭한 음악가였지요.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국제 콩쿠르에서 함께 심사하던 교수 중 혁주 군을 가르친 스승도 있어서 비보를 나누며 많이 놀라고 슬퍼했어요. 솔리스트가 연주 때마다 갖는 긴장감, 그리고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시간이 부족하고 마음이 조급하더라도 몸과 정신을 쉴 수 있는 여유를 우리 마음에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그이지만, 그 역시 음악가의 길을 걸으며 많은 고통과 어려움과 싸워야 했다.

“어디 인생에 기쁨만 있을 수 있나요? 국비 유학생으로 유학을 갔지만 첫 번째 레슨을 받고는 바이올린을 그만두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음악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미국으로 유학가려 했는데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포기하고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런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냈냐고요? 그땐 힘들어도 그냥 계속 음악을 했어요. 막연히 좋아질 거라 믿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어려운 시절도 지나가더군요. 무엇보다 힘든 시절, 누군가와 함께 연주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실내악을 더 하게 됐는지도 몰라요. 실내악 활동은 내가 자연스럽게 음악을 계속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지요. 새로운 곡을 익히고 공부하고 의논하고 연주하면서 음악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었어요. 계속 나를 움직이게 하고 궁금하게 하고 열정을 갖게 한건 결국 음악이었으니까요.”

그는 누구보다 예술성이 뛰어나고 음악적으로 끼와 재능을 지녔지만 혼자 눈에 띄기보단 늘 사람들과 함께 무대에 서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함께 연대해서 가는 길을 택했다.

“예전부터 누군가와 함께 연주하는 걸 좋아했어요. 제가 잘 못하는 건 못한다 하고 도움을 청했죠. 나의 음악 인생은 함께 걸어온 음악 동료들,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했어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사람이지요. 나는 실내악을 하면서 그렇게 소중한 음악과 사람을 동시에 얻었던 거죠.”

그는 단원들을 이끌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땐 늘 변하려고 노력했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나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지요.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길이 앞으로 뒤를 이을 음악인들에게 좋은 길이 되어주었으면 해요. 더 멋진 길을 만들어갈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앞으로 들려주고 싶은 음악은 어떤 빛깔일까? 화려한 계절을 지나 이제 황혼에 이른 그. 은발이 이토록 어울릴 수 있는 건 마음속에서 샘솟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눈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음악이 좋아요.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할 때 그런 걸 많이 느껴요. 그렇게 짧은 생애 동안 그런 음악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경이로운 뿐이죠.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이겠지만요. 저는 인생을 살면서 균형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아야 음악도 인생도 편안하고 자연스럽죠. 음악은 고여 있지 않고 생명처럼 흘러야 해요.”

인터뷰를 마친 그가 연주 리허설이 있다며 급하게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멘 채 굿바이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그가 영혼의 젊음을 유지해온 비결은 결국 음악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똑같은 악보를 연주해도 매번 다른 연주를 해내려는 열정이 지금의 그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예술가의 길은 고독한 길이지요. 외롭고 끝이 없어요. 그렇게 연습하고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다시 활을 잡는 것이지요.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최고를 추구하는 욕심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연주를 목적으로 무대에 서야 해요. 사람들이 가끔 나이가 더 들면 뭘 하고 싶냐고들 묻더군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생각해둔 나만의 꿈은 있지요. 예전에 남미 칠레에 간 적이 있는데,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 풍경이 너무나 근사했어요. 화구 하나 차에 싣고 일주하면서 가다가 잠시 멈춰 멋진 풍광을 화폭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꿈이 있다면 그렇게 자연 속에서 음악을 그려보고 싶어요.”

‘내 한계를 인정하고 함께 하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끊임없이 긴장하며 가져야 할 것을 향해 욕심을 멈추지 않는 갑갑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문득 정현종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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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O 제154회 송년음악회
12월 12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토벤 교향곡 1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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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심규태(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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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2016-10-01)  작곡가·지휘자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2016-09-01)  피아니스트 김대진
(2016-08-01)  발레리나 서희
(2016-07-01)  피아니스트 김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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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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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지휘자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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