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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의 신 헤르메스와 화로의 신 헤스티아
올림포스 12신 중 놓치면 안 될 숨은 감초들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12/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12월호 - 전체 보기 )



‘그리스신화로 만나는 명곡 이야기’를 지난 일 년 간 진행하면서 그 중심을 올림포스 12신에 두었다. 그중 지난 호까지 다루지 않은 두 신이 바로 전령의 신 헤르메스와 불,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다. 신의 세계를 다루는 마지막 연재로 헤르메스와 헤스티아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헤르메스, 재기발랄한 올림포스의 심부름꾼


▲ 도나티 크레티 ‘헤르메스와 파리스’

헤르메스(로마신화의 메르쿠리우스)는 부친 제우스의 뜻을 세상에 전하고, 온갖 심부름까지 해내는 부지런한 일꾼이다. 때문에 올림포스 12신이라는 최고 지위에 있음에도 다른 신의 조역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심부름을 잘하려면 우선 빠른 이동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헤르메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양쪽 신발에 달린 작은 날개는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속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훌륭한 심부름꾼의 자질이 단순히 ‘빠르다’는 것으로만 충족될 수는 없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영리함’이다.

제우스가 헤라에게 들킬까 염려하여 암소로 변신시킨 이오를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100개의 눈을 가진 괴물 아르고스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헤르메스의 완력이 아닌 꾐이요,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가려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진 제우스를 돕고자 목동 파리스에게 심판의 중책을 넘긴 영악한 수도 모두 그의 잔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우스가 가장 총애한 아들은 단연 모계 혈통이 좋은 아폴론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수족이 되어 일을 수행하는 것은 헤르메스였기 때문에, 모친 없이 자라야 했던 어린 디오니소스의 보호와 양육 같은 섬세한 일도 전적으로 헤르메스가 도맡았다.

헤르메스의 영리함은 갓난아이 때부터 두드러졌다. 태어나자마자 강보를 풀고 동굴 밖으로 나온 헤르메스는 아폴론의 소 수십 마리를 훔쳐 숨겨둔다. 사실 이 소는 아폴론의 것이 아니고, 아폴론이 제우스가 내린 벌로 테살리아의 왕 아드메토스 소유의 가축을 돌보던 중 일어난 사건이다. 동굴로 돌아온 헤르메스는 입구에서 발견한 거북이를 잡아 리라를 만드는 여유를 부렸다. 소를 몰고 사라진 범인이 헤르메스임을 알게 된 아폴론이 그의 모친인 마이아를 찾아가 항의하는데, 그 와중에도 헤르메스는 요람에 누워 자기처럼 어린 아이가 어떻게 도둑질을 하겠냐며 태연히 둘러댔다. 심지어 화를 내는 아폴론에게 독한 방귀까지 뀌어댔다.

하는 수 없이 아폴론은 제우스를 찾아갔고,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훔친 가축을 돌려줄 것과 용서를 구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아폴론은 이복형제 간에 화해의 정표로 헤르메스가 거북이 등으로 만든 리라를 얻고, 대신 목동의 수호신이라는 직분을 넘겨준다. 이때 목동의 수호신임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뱀을 휘감은 지팡이도 헤르메스의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유년기의 일화를 통해 헤르메스의 본질이 여행과 모험, 재빠른 이동, 잔머리와 속임수, 손재주 등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헤르메스는 훗날 리라에 이어 또 다른 악기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목동의 악기’라 일컫는 팬 플루트, 즉 판(Pan,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목신)의 플루트다. 판의 족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이 팬 플루트 때문에 헤르메스의 아들로 보는 견해에 무게가 실린다.

인상주의 음악의 상징적 명곡인 드뷔시의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1894)’은 보들레르를 잇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묘사한 판의 나른한 시간을 음화로 그려낸 것이다. 원작은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 원고지 20매 분량에 이르는 긴 내용인데, 드뷔시는 ‘한 쌍의 요정들이여, 안녕! 나는 그대가 둔갑한 그림자를 보리라’는 마지막 행에 주목했다고 전해진다. 곡은 장단조가 명확하지 않고 그리스의 선법 혹은 나른한 아라비아풍 선율이 지배하고 있으며, 소나타 형식과 같은 음악 형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오케스트라가 부풀어 오르는 경우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전통적 의미의 관현악 총주와도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곡의 첫 선율을 플루트가 담당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팬 플루트 대신 사용한 것인데, 모호하여 포착하기 어려운 관능적인 꿈과 흐릿한 감각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헤르메스를 닮은 작품 속 인물들


▲ 조반니 다 볼로냐 ‘날아오르는 헤르메스’

헤르메스라는 이름의 어원인 ‘헤르마(Herma)’는 길가의 돌무더기나 동네어귀에 놓인 사각석주를 일컫는다. 전령의 신인 헤르메스가 길의 신, 여행자 혹은 나그네의 신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다 보니 죽은 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일은 물론 하데스에게 납치당했던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데려와 모친 데메테르에게 넘겨준 이도 헤르메스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재해석한 헬무트 디틀 감독의 영화 ‘사랑의 추구와 발견(2005)’에서도 헤르메스가 죽은 주인공의 영혼을 황천에 데려가는데, 여기서는 헤르메스가 양성성을 지닌 신으로 묘사된다. 이는 특별한 의미보다는 올림포스 신들이 지닌 변신의 보편적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오페라에서 헤르메스는 로마식 이름인 메르쿠리우스로 등장하는 예가 종종 있다. 물론 조역이어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1858)’처럼 희극적 해석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 하겠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전야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1869)’에서는 보탄의 심부름꾼으로 로게가 등장하는데, 이는 헤르메스의 캐릭터와 거의 흡사하다. 로게가 ‘불의 신'이란 점에서는 헤르메스와 다른 듯하지만, 여행이 본업인 헤르메스는 나무를 문질러 불을 일으키는 법을 습득한 신이기도 하니 로게를 헤르메스의 바그너식 재창조로 해석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의 소지가 없을 듯하다.

헤르메스의 로마식 이름인 메르쿠리우스는 ‘장사하다’는 뜻의 ‘메르카리(Mercari)’에서 파생했다. 영어로 상인(Merchant)을 뜻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 그래서 메르쿠리우스는 상업의 신이요, 심지어 도둑의 신이기도 하다. 스위스의 글로벌 금융 그룹인 UBS가 헤르메스의 두상과 그의 지팡이를 기업의 상징물로 차용한 것은 사업을 돕는 은행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은행업의 속성을 빈정거리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 외에도 굿이어 타이어가 헤르메스의 신발에 달린 날개를 기업 로고로 사용한다. 전령 또는 여행자의 의미로 ‘잘 달린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홀스트의 관현악 모음곡 ‘행성’의 제3곡 ‘수성(Mercury)’에는 ‘날개 달린 전령’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태양계에서 공전주기가 가장 빠른 행성이기 때문인데, 그런 사실에 잘 어울리는 익살스러운 스케르초풍 곡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의 가장 친한 친구는 머큐시오인데, 이탈리아식으로는 메르쿠티오라 부른다. 즉, 메르쿠리우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성격이 유쾌하고 몸이 날쌔며 칼싸움에도 능하니 신화 속 캐릭터를 이름에 녹여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티볼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닌, 방심한 틈을 티볼트가 비겁하게 노린 까닭이다.

헤스티아, 만인의 숭배를 받은 화목의 여신

헤스티아(로마신화의 베스타)는 올림포스 12신 중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신이다. 올림포스 1세대인 제우스·헤라·데메테르와 자매지간이며 그중 맏이로 실상 서열은 가장 높다. 그러나 처녀 신으로 지낼 것을 맹세하고 화로를 지키며 올림포스를 떠나지 않았다. 거처에만 머물러 있으니 신화 속에서 다룰 만한 소재로 환영받지 못했다.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헤르메스와는 정반대여서 헤르메스는 바깥일, 헤스티아는 안살림의 상징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헤스티아가 관장하는 불과 화로는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지닌 ‘불’과는 달리 가정과 공동체의 화목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의미다. 제우스는 안살림을 살뜰하게 챙기는 누이를 존중하여 인간의 가정과 모든 신전에서 숭배받도록 했다.

그리스의 헤스티아에 비하면 고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베스타는 국가행사를 주관하는 중요한 신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마땅한 에피소드가 없음에도 베스타의 이름이 들어간 오페라 한 편이 남아 있다.


▲ 오페라 ‘베스타의 여사제’에 등장한 마리아 칼라스

로마 시대의 베스타 신전을 무대로 하는 스폰티니의 ‘베스타의 여사제(1807)’가 바로 그것이다. 스폰티니는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프랑스로 건너가 19세기 그랑 오페라(프랑스 특유의 대규모 오페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인데, ‘베스타의 여사제’는 그의 대표작이다. 사실 이 오페라에서도 베스타 여신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사제 줄리아가 주인공이다. 줄리아는 옛 애인인 리치누스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가 되어 남자와의 사랑을 포기하는데, 큰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리치누스는 함께 도망칠 것을 청한다. 그러나 결국 도망에 실패하여 줄리아는 홀로 붙잡히고, 함께 달아나던 남자가 누군지 밝힐 것을 거부해 처형될 위기에 놓인다. 물론 줄리아는 이때 신의 도움으로 처형 직전에 구원받는다. ‘베스타의 여사제’는 18세기 프랑스 궁정오페라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이탈리아 작곡가의 오페라답게 선율이 풍부할 뿐 아니라 도식화된 옛 스타일을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오랫동안 공연되지 않았지만 마리아 칼라스가 줄리아 역을 맡아 노래하면서 20세기 후반에 한동안 인기를 끌기도 했다.

(내년에는 신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로 연재를 이어간다. 1월-페르세우스, 2월-테세우스와 페드라, 3월-이아손과 아르고 원정대, 4월-메데아, 5월-헤라클레스, 6월-오이디푸스 왕과 딸 안티고네, 7·8월-트로이 전쟁, 9월-오디세우스, 10월-아가멤논, 11월-이피게니아, 12월-아이네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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