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 Life
박정희 정권의 국민개창운동과 한국창작가곡
‘관리되는 노래’ 순수지상주의에 갇힌 음악적 상상력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12/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12월호 - 전체 보기 )



음악은 문화 내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체제 안에서의 음악정책과 이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은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1961년 5·16 군사정변과 함께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의 철통같은 단결’ ‘대동단결’ 등과 같은 국민의 화합을 강조했다. 그래서 박정희식 공동체주의의 또 다른 이름은 ‘총화(總和)’로 대변된다.

이러한 총화 이데올로기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등장한 이데올로기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10월 유신은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로 대통령의 간선제 시행, 의회 권한 제한, 언론 탄압 등이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의 음악정책을 보면 1960년대 집권 초부터 등장하여 노골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노래의 보급과 창작을 통한 국민개창운동은 국가의 국민 동원과 공동체 실현이라는 박정희식 공동체주의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국민개창운동은 일제강점기이던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주최)과 조선음악협회(주관)가 1940년대에 행한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 음악정책으로, 노래로 조선의 대중을 전쟁 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 취지를 이어받아 국민정신을 개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1960년대 초,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민개창운동을 추진했으며, 1967년을 전후하여 국민개창운동 성격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국민개창운동은 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공동으로 주관한 것이었다.

국민개창운동과 순수음악가들


▲ 경향신문 1966년 3월 26일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았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혼란스런 정국을 수습하며 ‘사회 정화’라는 기치 아래 직속기관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치했다. 이후 재건국민운동본부는 1961년 6월부터 국가재건 범국민운동, 이른바 ‘신생활 재건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며 생활 영역 곳곳에 대한 실천 요강을 제시했다. 이는 절미, 절전, 절수, 외래사치품 배격, 유흥의 자제, 간소복장 착용 등은 물론 건전한 예술적 취미를 갖게 하기 위해 국민가요의 보급운동과 국민개창운동의 전개를 위한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1962년 국민개창운동의 하나인 ‘노래의 메아리’ 사업이 있었다. 이 사업의 목표는 “전 국민이 누구나 ‘건전’한 내용을 담은10곡 이상의 건전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0곡이 발표되었다. 동요 ‘반달’의 작곡가 윤극영(1903~1988)은 물론, 당시 서양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던 이들이 참여했다.


▲ 국민개창운동 ‘노래의 메아리’ 지정 10곡

참여한 이들은 이른바 상아탑의 음대 교수들이었다. 1963년 대통령 문화훈장을 수상한 이흥렬(1909~1980)은 당시 숙명여대 음대에, 김성태(1910~2012)는 서울대 음대에 재직했다. 1967년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을 위한 칸타타 ‘민족의 축원’을 작곡한 김동진(1913~2009)과 지휘자 출신인 김대현(1917~1985), 두 사람은 서라벌예술대(현 중앙대)에 재직 중이었다. 일본에서 기악과 작곡을 공부했던 이들은 이른바 순수음악으로 취급되던 양악 종사자들이었다.

1967년에는 ‘노래의 메아리’의 연장선상으로 ‘다함께 노래 부르기’의 지정곡 20곡이 발표됐다.


▲ 국민개창운동 ‘다함께 노래 부르기’ 지정 20곡

김희조(1920~2001)는 1961년에 예그린악단에 작·편곡자로 입단했고, 1965년에 한국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인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작·편곡자로 기용되었다. 나운영(1922~1993)은 일본 도쿄 제국고등음악학교 본과에서 유학한 후, 여러 대학을 거쳐 1960년대에 연세대 음대에 재직 중이었다. 박태현(1907~1993)은 일본동양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1966년 박태현은 서울시향 여성 단원들을 주축으로 하여 서울여성스트링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이 단체는 올해 9월 창단 50주년 기념공연(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가졌다.

국가주도형 노래 보급 운동의 연원은 일제강점기 문화전략의 하나였던 국민가요 및 국민가요 개창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50년 해방 이후 그 성격을 달리하면서 이어져나갔다. 국민개창운동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 공보부 및 정부 각 기관에 의해 확대·추진되며 음악 외의 국가시책과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예컨대, 박정희의 제6대 대통령 당선(1967)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 실시 이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추진에 이바지한다”는 목표나, 새마을운동(1970)과 유신체제(1972) 이후 “새마을운동과 10월 유신의 정신 구현”이라는 목표 아래 움직였다.

그렇다면 작곡가들은 박정희 정권의 이러한 사업들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일까? 아니면 당시 정권에 의해 수동적으로 동원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다만 근래의 근현대역사학계의 연구들처럼 박정희 정권기에는 ‘억압’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일정한 동의―저항―순응을 넘나드는 일상성이라는 회색지대가 존재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현대사를 ‘억압’과 ‘저항’이라는 틀로만 파악해온 기존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가 진행되고 있으며, 1960년대 음악계 역시 정치와 음악의 협력과 저항을 통해 발전과 퇴보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당시 ‘유행가=대중음악≠순수음악’이라는 도식이 팽배했기에 이른바 순수음악과 고전음악에 종사하던 이들이 동원, 참여했으리라 본다.

반공과 왜색 추방을 주장한 나운영


▲ 경향신문 1967년 4월 29일

그들 중 나운영은 좀 달랐다. 그는 일본 도쿄 제국고등음악학교 본과에서 유학한 후, 여러 대학 교수를 거쳐 1960년대에 연세대 음대에 재직 중이었다. 1968년 효성여대 강당에서 본인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발표(이기홍/대구시향, 이강숙 협연)하여 “국내 작가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되기는 처음(경향신문 1968년 3월 6일)”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른바 ‘클래식’과 ‘양악’으로 불리는 순수음악 작곡가였다.

한편 그는 행동주의 작곡가였고 사회참여적 자세가 그 어떤 작곡가보다 짙었다. 1960년대에 음악 ‘정화’ 사업을 주창했는데, ‘정화’를 통해 그가 지향한 것은 음악의 순수성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던 순수란 무엇이었을까. 이를 위해 1960년대 한국문화예술계에서 통용되던 ‘순수’란 무엇을 뜻하고 의미하는지를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학평론가 이어령(1934~)의 ‘흙 속의 저 바람 속에’는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로 등단했던 그가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을 묶어 1963년에 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에세이집이다. 한국의 전래·전통문화인 윷놀이, 돌담, 백의(白衣), 한복, 밥상, 한국의 여인, 화투, 춘향 등을 소재로 하여 한민족과 한국적 정서의 심층을 탐구한 내용을 담았다. 당시 이것은 한국인만이 지닐 수 있는, 이른바 ‘순수한 문화’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성에 관한 것을 한국문화나 전래·전통문화에서 탐구하는 인문적 작업이 지식인 및 대중 사이에서 유행한 때가 1960년대였다. 1967년 ‘매일경제’는 ‘한국의 얼을 되찾는 캠페인’이라는 취지 아래 ‘한국을 찾자’라는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외교·정치·경제 등은 물론, 문학·예술·사상·풍속·여성·멋 등의 한국 특유의 문화예술을 살펴보는 19회의 연재물이었다.

이처럼 한 사회의 정신이 추구하던 ‘순수’가 나운영에게는 무엇이었나? 순수를 위한 ‘정화’란 곧 ‘우리 것 찾기’였는데, 그것은 음악에 있어 반공(反共)과 왜색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월북한 예술가들의 가사가 담긴 노래곡이나 음악을, 두 번째는 왜색 가요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반공과 왜색에 의해 추방된 음악이 남긴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대중의 귀를 끌어당기는 음악이 필요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7개월 뒤 나운영이 동아일보와 나눈 인터뷰(12월 22일)를 살펴보자.

기자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질이 낮은 이유의 하나는 음악을 전공한 실력있는 사람들이 대중가요계로 많이 진출하지 않는 때문이 아닐까요?
나운영 그래요. 국민개창운동 같은 것 혼자하려도 되는 것도 아니지만 순수음악입네하고 하는 사람들 대중가요나 경음악은 거들떠볼 생각도 안 해요.
기자 그분들이 좋은 대중음악을 만들고 보급하는데 기여하면… 프라이드가 깎인단 말인가요?
나운영 그렇죠. 그러나 순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많은 분들은 졸업장 한 장과 독창회 한 두 번 정도를 가지고 실력도 없이 평생을 도도하게 지내거던요. 사실 기악이나 성악계를 보더라도 소위 순수음악가보다도 기능면에서나 실력으로나 월등하게 뛰어난 분들이 경음악계엔 허다해요. 첫째 그들은 매일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니까요.
기자 나 선생, 한번 용감하게 신년부터 건전한 대중가요 좀 작곡해보시지 않겠어요?
나운영 장차하겠습니다. 시인들도 좋은 대중가사 좀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공연장을 찾는 소수의 특정 관객만을 바라보던 음악가들과 달리 나운영은 ‘국민’을 대상으로 ‘개창운동’을 외쳤다. 위의 인터뷰에 이어 1961년 동아일보(6월 9일)에서 그는 “국민개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라”며, “4·19 혁명이 가져온 것 중에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일본유행가의 범람이라고 기회 있는 대로 공언한 바 있으나 본 정권은 그 일본유행가가 순조롭게 보급된 뒤에서야 단속을 시도하였으니 ‘행차 뒤 나팔 격’이다. 생활혁명은 오직 애국가요의 개창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국가곡 속을 배회하는 ‘순수’라는 유령


▲ 경향신문 1968년 3월 11일

1960년대는 이처럼 ‘순수’라는 유령이 음악계를 배회하던 때였다. 그리고 ‘순수’의 또 다른 이름은 ‘건전’이었다. 박정희 정권에서의 음악은 5·16 군사정변의 역사적 의의를 국내외에 선양하는 바탕에서 정권의 입맛에 맞는 ‘건전한’ 내용만이 소재가 될 수 있었던 것. 따라서 애초부터 예술성과 작품성보다 전시·홍보 효과만이 요구되었다. 작품에는 어떠한 민주적 요구나 자유에 대한 갈망, 근대화의 그늘이나 민중적 삶의 형상화를 구현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했으며, 정권을 찬양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예 정치적 색깔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 일변도의 내용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와 삶과 시대의 변화에 밀착한 주제들은 완전히 배제된 채 작곡가의 사변적이고 열외적인 상상력만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순수지상주의로 인해 유신헌법이 만들어지고 국가의 폭력이 난무한 상황에서도, 그리고 후에 군사반란과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도 그 모든 격동과 충격이 음악의 카테고리로 들어오지 못했고, 작곡가들은 사회를 외면한 채 ‘순수’의 영역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1960년대에 작곡된 가곡들은 정치적 색깔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 일변도의 내용이었다. 이 시기는 창작가곡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수의 가곡이 쏟아져 나왔다. 5·16이 일어나던 1961년에 정권의 음악정책과 협조를 위해 설립된 한국음악협회는 1966년에 아세아재단의 원조로 김성태·김동진·나운영·김대현·김순애·김달성·이흥렬·정윤주 등에게 각 2편의 가곡 제작을 위촉하기도 했다. 김성태·김동진·김대현·이흥렬은 ‘노래의 메아리’에, 나운영은 ‘다함께 노래 부르기’ 사업에 함께 한 작곡가들이다.

당시 창작가곡은 향토성,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순결함, 애달픔과 그리움 등을 소재로 한 것이 많았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것을 담은 시가 가사로 채택되었으며, 정치적 색깔을 띠는 가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김달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먼 후일’, 김순애의 ‘그대 있음에’, 김중석의 ‘영(影)’, 박태현의 ‘녹이(綠耳)’, 이상근의 ‘가을 저녁의 시’와 ‘아가(雅歌)’, 한성석의 ‘달과 꽃의 이야기’ 등의 가곡집, 애창하고 애청되던 김달성의 ‘진달래꽃’, 구두회의 ‘사랭이와 씀바퀴’, 오동일의 ‘강이 풀리면’ 등이 자연을 소재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장일남의 ‘기다리는 마음’, 김성태의 ‘못 잊어’, 조두남의 ‘분수’, 김규환의 ‘님이 오시는지’, 김순애의 ‘그대 있음에’, 신귀복의 ‘얼굴’, 이수인의 ‘석굴암’ 등도 그리움, 연애적 감정 등을 담은 곡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작곡된 조두남의 ‘선구자’, 하대응의 ‘산’, 홍난파의 ‘그리움’ 등이 이 시기에 노래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다.

이처럼 작품들은 1960년대 들어 본격화된 산업화·근대화의 현장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있다. 이러한 1960년대의 분위기를 살펴기 위해 1950년대를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한국현대 예술사대계(Ⅲ)’ 중에 “4·19와 5·16은 미술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라고 묻는 글에서 “1960년대 전반의 미술을 시대정신으로 읽어내고자 할 때 우선 주어지는 의문들은 이런 것들이다”라며 1950년대를 통해 1960년대 미술계가 현실과 접점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연 소재를 선호하던 1960년대 창작가곡을 바라보는 데 적용 가능하기에 인용해본다.

‘사실은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격동과 현실을 우리 미술이 재현의 대상으로 삼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주문같이 보인다.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고 전쟁을 거치며 분열적이고도 냉전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논리로 고착되어 갔던 1950년대, (···) 민족적 비극이나 전쟁 체험 같은 뜨거운 현실은 오히려 기피의 대상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작품생산의 적극적 근거로 삼기에는 힘든 여건이었다. 그 대신에 1950년대 화단의 빈자리는 여인좌상, 노인좌상, 꽃, 풍경 등을 소재로 한 나름한 완상물(玩賞物)들에 의해 메꾸어졌다.’

순수지상주의에 대한 반성

1960년대의 문화예술의 한편에서는 순수성과 비정치성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며 사회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예술과 정치의 관계 대신 부정의 정신이 자리하거나 그 부정성을 예술의 존재양식으로 내면화는 아방가르디즘이 뿌리내리고자 하는 움직임도 많았다.

그 예로 문학. 1966년 창간된 ‘창작과 비평’에는 백낙청의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보자. 백낙청은 순수문학론이 지배하던 기성평단에 대한 치열한 전복적 목소리를 의욕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백낙청은 순수문학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깨뜨리면서, 예술의 자율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유연한 비평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가령 “문학이 역사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그 자신만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문학이 질적으로 우수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순수해야겠다는 말과는 매우 다르다. 후자가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통용될 수 있는 상식인 데 반해 앞의 것이야말로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며 삶에 대한 특정한 태도를 나타낸 것이다”라는 백낙청의 주장은 순수문학론의 이념적 뿌리를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1960년대에 클래식을 비롯하여 음악이 널리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방송이었다. 동시에 방송에 대한 심의 부문도 기본적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1962년 한국방송윤리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방송윤리위원회는 1965년 가요심의전문위원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10월 7일 연예협회, 음악계, 방윤 대표 등이 회합하고 최근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방송가요의 정화를 위해 방송가요심의위원회를 조직하고 창립총회를 근일 중에 갖기로 했다. 모였던 인사들은 이혜구, 이흥렬, 김대현, 모기윤, 나운영, 이관옥, 이성삼, 조백봉, 박시춘, 손목인, 유한철 씨 등이다.’(경향신문 1965년 10월 11일)

여기 인사들 중 이혜구(국악학), 이흥렬·김대현·나운영·이성삼(작곡), 이관옥(성악)이 클래식음악 종사자들이었다. 이후 방송가요심위원회는 1965년 3월에 79곡을 작사자 월북이라는 사유로 금지했고, 1994년 8월까지 총 130여 차례에 걸쳐 846곡을 방송 금지했다.

현재 ‘한국가곡이 밤’ 같은 타이틀의 공연에서 불리거나, KBS 1FM 등에서 흘러나오는 창작가곡에 담긴 자연 소재와 순수지상주의, 그리고 1960년대 가요정화운동을 위해 ‘실용’ 음악을 작곡한 ‘순수’ 음악가들의 존재는 과거완료형으로 종결된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음악들과 그 안에 녹아든 박정희 정권의 음악적 이데올로기가 1960년대 이후 진행된 창작가곡 작곡과, 해외 가곡 수용 등의 다양한 층위에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박헌호, ‘한국인의 애독작품-향토적 서정소설의 미학’,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이강숙 외 ‘우리 양악 100년’, 조희연, ‘박정희 시대의 강압과 동의’, 전지영 ‘근대성의 침략과 20세기 한국의 음악’, 최유준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황병주 ‘박정희 체제의 지배담론’, 한국예술연구소 ‘한국현대 예술사대계Ⅲ’,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copyright ©월간객석/Auditoriu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트윗터 페이스북
이전 페이지 분류: Life 2016년 12월호
[Life 분류 내의 이전기사]
(2016-12-01)  울산
(2016-12-01)  음반의 종말
(2016-11-01)  영국 최초의 미디어아트센터 브리스톨 워터셰드
(2016-11-01)  광주, 아시아를 향한 문화 도시
(2016-11-01)  높아진 경제 수준과 피아노 인구의 급증
Volume 선택:
2017년 8월호
분류내 최근 많이 본 기사
제우스가 사랑한 여인들
문화도시의 품격, 대전의 요모조모
바이올린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 ①
문화예술 TV 가이드
예술과 기술
예술의 신, 아폴론
청주, 역사와 교육 위에 세워진 예술도시
피아노를 둘러싼 음악 환경의 변화 ①
엘비스 프레슬리❷
엔니오 모리코네(2)

(주)객석컴퍼니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7길 12   백상빌딩12층 '월간객석'   |   T. 02)3672-3002   (구독문의: 02)747-2115)   F. 02)747-2116
대표 : 김기태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김기태   |   사업자등록번호:101-86-84423   |   통신판매업신고 제01-26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