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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창극 ‘레이디 맥베스’ 연습 현장
더욱 짙어진 비극의 소리
글 이정은 기자, 김선영 기자 12/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12월호 - 전체 보기 )



 


▲ 레이디 맥베스 역의 소리꾼 정은혜


공연을 한 달 앞둔 11월 중순. 진회색 경사면과 가벽이 세워진 연습실. ‘ㄷ’자로 둘러앉은 제작진은 배우들의 몸짓과 대사를 유심히 지켜본다. 배우 정동환이 음산한 톤으로 읊조리는 대사로 이날 연습 부분이 시작됐다.

“왕이 되기 위해 기존의 왕을 밀어내고 적법성이 없는 왕좌를 지키기 위해 정적들을 처치하는 건 수없이 되풀이되는 역사일세.”

이들이 ‘레이디 맥베스’를 창극으로 무대에 올리겠다고 발표한 것은 올해 초. 하지만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무대 위 상황보다 더욱 어두운 현실이 문밖에서 일어날 줄은.

레이디 맥베스의 새 얼굴


지난 몇 년 사이, 전통예술계에서는 판소리 다섯 바탕 외에 다른 뿌리를 지닌 서사를 창극 소재로 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했다. 고대 그리스 비극(‘메디아’ ‘오르페오전’ ‘트로이의 여인들’)이나 우리 역사의 한 토막(‘아비. 방연’), 또는 인접 장르에서 다뤄진 극(‘장화홍련’ ‘서편제’)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이 가운데 국립국악원은 2017년 2월 우면당 정식 재개관을 앞두고, 기념 공연으로 12월 21~30일 창극 ‘레이디 맥베스’를 올린다.

국립국악원이 선택한 ‘레이디 맥베스’는 연극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연극 ‘레이디 맥베스’의 탄생은 1998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출가 한태숙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을 꺼내 올려 ‘여성주의적인 셰익스피어 비틀기’로 주목받았다. 극의 포커스는 온전히 레이디 맥베스를 향해 있다. 남편 맥베스에게 살인을 종용하여 그를 왕위에 올리지만, 그녀 자신은 죄의식에 허덕이며 몽유병을 앓는다. 그녀를 치료하는 궁중의사인 전의(典醫)는 레이디 맥베스에게 최면을 걸며 그녀의 환상 속에서 남편 맥베스 왕으로 나타나 그녀의 내면을 헤집는다.

당시 작품이 화제를 모은 것은 내러티브만이 아니었다. ‘물체극’이라는 이름을 단 ‘레이디 맥베스’는 장면 곳곳에 독특한 오브제를 사용해 극에 힘을 더했다. 밀가루·흙·물·얼음 등 갖가지 요소를 활용하는 공연은 당시만 해도 대단히 생소하게 여겨졌다. 또한 월드뮤직그룹 공명과 원일, 박재천은 구음과 타악기 연주 등을 통해 작품에 국악적 요소를 군데군데 심어놓았다. 오브제, 음악, 드라마가 격렬히 부딪히며 극의 긴장을 극대화한 이 작품은 지속적으로 재공연되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재연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장르 안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온 연극 ‘레이디 맥베스’는 매 버전마다 강렬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끊임없는 시도를 거쳐 작품을 변화시킨 한태숙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전에 임한다. 사람으로 치면 18세에 이른 연극 ‘레이디 맥베스’는 이제 새로운 옷을 입는다. 바로 창극이다.

맥베스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분


▲ 연출진과 논의하는 연출가 한태숙(오른쪽)

“오브제 대신 창이 지닌 장악력이 무대를 채울 겁니다.”

창극의 옷을 입은 ‘레이디 맥베스’는 한태숙의 이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오브제의 물성에서 비롯된 물리적인 힘은 개작을 통해 ‘창’ 특유의 강렬한 정서로 치환된다. 자연히 극을 이끄는 힘의 중심과 방향성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연습 현장에서도 ‘소리의 장악력’이 물씬 느껴졌다. 소리시종을 맡은 박진희의 정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단아한 정서보다는 독특한 음향적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었다. 여기에 중견 명창 염경애의 카리스마 넘치는 음색은 기괴한 캐릭터들을 휘어잡으며 극의 분위기를 다잡는 힘을 보여줬다. 염경애가 맡은 도창은 연극에는 없던 새로운 장치다. 그렇기에 연극과는 또 다른, 짙은 정서를 창극 무대에 한껏 끌어올리는 역할이 부여됐다.

“도창에게 여러 기능을 부여했어요. 극 중 인물들은 전의의 최면의식 속에서 움직이는데, 도창은 그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해설자로 음향 효과로, 때로는 최면 속에, 때로는 전지적 위치에 배치되죠. 또한 염경애의 묵직한 음색으로 창극의 색채가 더 짙어지면서 극의 입체적 부피감이 더해지리라고 생각해요.”

소리꾼 정은혜는 소리와 아니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레이디 맥베스의 뒤엉킨 내면을 흐트러뜨려놓았다. 탐욕과 죄의식을 오가는 심리를 쏟아내듯 모습, 앙칼진 목소리와 불안한 눈빛까지 그녀는 이미 레이디 맥베스, 그 자체였다.

“한없이 나약한, 욕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이죠. 벌레 같은 추악한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파멸에 이르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나약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캐릭터의 심연, 밑바닥까지 공감하는 과정에 있어요.”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정은혜의 얼굴은 상당히 야위어 있었다. 연습을 시작한 이후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가는 중이라 했다. 연습 기간 동안 레이디 맥베스와 하나둘씩 동일시되어가면서 그녀의 고민도 짙어지는 듯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나이테를 지닌 연극과, 고집스럽고 독특한 장르인 창이 만났어요. 연극적인 정서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소리가 어떻게 붙을 수 있을지가 큰 고민이죠. 가볍게 넘어가는 대사가 하나도 없거니와 밀도도 분량도 엄청나고, 소리 역시 마찬가지예요.”

한태숙은 이 작품이 여러 요소를 다층적으로 압축한 만큼, 그 어느 것도 남용하지 말자는 주문을 했다. 이러한 연출가의 스타일을 정은혜는 창극 ‘장화홍련’과 연극 ‘단테의 신곡’ 무대에 오르면서 겪어온 바, 한태숙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내고 있다.


▲ 배우 정동환은 1999년부터 ‘레이디 맥베스’에 함께 해왔다

그녀의 곁에는 배우 정동환이 있다. 연극 ‘레이디 맥베스’의 1999년 공연부터 이후 계속된 재연 무대까지 매 공연마다 전의 겸 맥베스로서 무대를 지켜온 그다. 극 중 레이디 맥베스에게 최면을 거는 궁중의사이자 맥베스인 정동환은 이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2009)’의 대사 역을 비롯해 ‘오이디푸스(2011)’의 크레온, ‘단테의 신곡(2013)’의 베르길리우스 등을 맡으며 그야말로 ‘한태숙의 남자’ 0순위이자, 연출가에겐 든든한 지원군 같은 존재다.

“이 연극과 함께한 지 17년이 됐지만, 매번 똑같은 작품을 해도 늘 새롭다는 믿음으로 임하게 됩니다. 실제로 공연을 올릴 때마다 연기 안에서 크고 작은 실험을 하죠. 하지만 이번엔 창극이잖아요. 아예 새로운 것인지라 낯설기 짝이 없죠.(웃음) 이전엔 오브제를 비롯한 물리적 힘이 주가 됐던 극이라면 이젠 작품 속에서 창을 통해 정서적 힘이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중요해졌어요.”

음악과 연기가 얼마나 잘 섞이느냐에 따라 극적 에너지의 방향성이 좌우된다는 것은 그에게도 중요한 과제다. 동시에 그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하는 공연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다.

“기원전부터 늘 똑같이 반복되어온,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를 이 작품은 다루고 있어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자신 안에 자리한 또 다른 존재,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정화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과 오브제가 농축된 창극


▲ 작곡·작창을 맡은 작곡가 계성원

힘 줄 곳은 주고, 힘 뺄 곳은 과감히 덜어내며 극의 틀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연출가 한태숙의 가장 무거운 고민은 아마도 음악 아닐까. 고민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이는 계성원이다. KBS 국악대상 작곡상(2010)을 수상하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부지휘자를 역임한 그는 이번 공연의 작곡과 작창을 맡았다.

“무겁고 음울한 텍스트, 함축적이고 미니멀한 세팅, 그리고 ‘창극’. 여러 가지 요소가 만나게 될 어딘가의 새로운 지점을 찾고 있습니다. 전통의 결을 충실히 살리면서 극을 이끌어갈 방법을 계속 강구하고 있어요. 전형적인 것들은 배제하려는 것이 큰 흐름이지만, 동시에 ‘이것이 창극이다’라는 본질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창극 ‘레이디 맥베스’에 관한 또 하나 연결 고리는 국립국악원 우면당의 재개관이다. 재개관을 계기로 마이크 등 인위적인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이른바 ‘자연 음향’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우면당에서는 악기와 사람 본연의 소리가 공간의 공명과 만나 객석에 온전히 전달된다. 인성(人聲)에 비해 확성에 한계가 있는 국악기가 확성 장치 없이 적절한 음향적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가 관건. 어찌 보면 이번 작품의 ‘수행 과제’가 하나 더 늘어난 꼴이다. ‘모든 단계가 실험’이라는 계성원의 말에는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실려 있었다.

“극 자체가 콤팩트하고 배우도 많지 않기 때문에 악기 수도 최소화하자는 것이 연출가의 의견이었습니다. 가야금, 생황, 타악기, 더블베이스 이렇게 네 대의 악기를 사용할 예정이에요. 특히 더블베이스는 극의 묵직함을 살리기 위해 저음을 깊게 긁어내는 역할을 하게 되죠.”

연극에서 창극으로, ‘텍스트+오브제’에서 ‘텍스트+음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지만, 연극이 갖고 있던 ‘물체극’의 성격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물성이 주던 시각적 임팩트는 역설적으로 무대 자체로 확장된다. 연극 초연부터 ‘레이디 맥베스’의 무대 디자인을 맡아온 무대 디자이너 이태섭은 ‘자연 음향 공연장의 특성상 시각적으로 부각되는 무대를 디자인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무대보다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더해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진회색 바탕에 목탄 가루와 물엿을 개어 칠을 했다는 무대 배경의 뉘앙스는 이날 찾아간 연습실에서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4미터에 달하는 높은 벽을 세워 배우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더욱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주게 된다. 움직임 자체가 또 하나 극적 요소로 기능하도록 만들려는 의도다. 캐릭터 각각의 ‘악마적 욕망이 드러나는 그로테스크한 움직임’을 위해 안무가 손영민이 투입됐고, 의상은 디자이너 정구호가 맡아 힘을 실을 예정이다. 또한 흙을 소재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온 조각가 이훈기가 배우와 함께 매 공연마다 한쪽 벽면에 페인팅을 함으로써 매번 새로운 이미지를 무대에 그려낸다고 하니, 전작에서의 오브제 개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그 형질을 바꾸어 드러날 모양이다.


▲ 회의에 열중하고 있는 배우들

너는 살아 있더냐

극은 추악한 욕망과 그로 인해 저질러진 죄, 거기에 뒤따르는 죄의식의 줄기를 지닌다. 한태숙은 ‘탐욕과 죄의식 모두 인간의 본능’이라는 시선을 견지하며 레이디 맥베스를 바라본다. 레이디 맥베스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정화(淨化)를 갈망한다.

“오! 이 손, 이 씻어지지 않는 자국!…… 강물아, 흘러 넘쳐 이 손 좀 씻어다오.”

레이디 맥베스는 결국 자기 파멸의 극한에 이르러 죽음을 맞지만, 그 죽음은 결국 그녀를, 그녀의 정신을 살린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다름없는 고통스러운 시간, 반대로 몸은 죽으나 영혼은 사는 ‘생사의 패러독스’. 창극의 옷을 입고 더욱 짙어진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해질 시간이다.

사진 황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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