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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의 아크람 칸 ‘지젤’
타마라 로호의 추진력, 아크람 칸의 망설임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 11/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11월호 - 전체 보기 )




▲ ‘지젤’ 리허설을 하고 있는 안무가 아크람 칸과 예술감독 타마라 로호 ⓒLaurent Liotardo

1974년 몬트리올 태생의 스페인계 발레리나 타마라 로호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여 년간 영국 발레의 실상을 전면에서 확인한 인물이다. 1996~1997년 스코티시 발레, 1997~2000년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이하 ENB), 2000~2012년 로열 발레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동했고, 2012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ENB의 예술감독과 주연 수석무용수(Lead Principal)를 병행하고 있다.

고유의 극장 시스템과 발레 학교가 확립된 서유럽의 대도시에서 개인이 예술 단체의 발전을 초월해 도시의 발레 문화와 지형을 변화시키는 사례는 21세기 들어 극히 드물다. 그런데 2010년대, 타마라 로호가 런던을 변화시키고 있다. 마치 준비된 발레 CEO의 전형을 보이려는 듯 지금껏 기존 발레단 운영에서 볼 수 없던 일들이 ENB에서 일어나고 있다.

ENB는 태생부터 런던에서 만년 2등 컴퍼니의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코번트 가든을 거점으로 로열 발레가 쟁쟁한 무용수들과 신작으로 주목받을 때, ENB는 본거지로 삼을 전용 극장 없이 영국을 돌아다니는 투어링 컴퍼니(Touring Company)로 기능했고, 1990년대 이후 단체를 이끈 여러 감독 역시 그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네덜란드 국립 발레 감독 시절, 김지영을 영입했던 웨인 이글링은 2006년 ENB 감독으로 부임해 임기 내내 축소된 예산에 맞추느라 학생도 동원했고, 작품성 부족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2012년, 이글링은 사임을 발표했지만, 발레단 예산의 60%가량을 보조하는 영국 예술 위원회와 웨스트민스터 구청은 주당 10만 파운드(약 1억3800만 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ENB의 상업적 방만함과 창의력 부재의 작품을 반복적으로 올리는 나태한 프로그래밍을 질타했다. 전통에 새로운 전통을 더한다는 ENB의 철학은 오랫동안 공염불이었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 로열 발레의 고참인 로호였다. 비즈니스계에서 로호가 행정가로 변신하리라는 예측은 200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발레단의 감독이 되고 싶다고 여러 차례 인터뷰했고, 2009년 1개월 동안 고향으로 건너가 캐나다 국립 발레의 감독 캐런 케인의 보좌로 연수를 거쳤다. 그래서 로호의 2012년 ENB 감독 선임은 놀라웠지만, 주변 분위기가 기대감으로 돌아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레리나 로호의 강한 행정력

취임과 함께 단체 내외로 전한 로호의 메시지는 ‘나는 비즈니스에 치중한다’였다. 가녀린 발레리나는 행정은 모를 것이라는 선입견을 배격하고 ‘돈을 벌어 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로열 발레 무용수 시절에는 뷰티 관련 기사에 등장하고 화보 모델로 기분을 전환했지만, 감독 부임 이후에는 발레단의 브랜드 제고를 위한 노출에만 자신을 선별적으로 등장시켰다.

그래서 패션 매거진 대신 영국-스페인 구간 저가 비행기의 기내 잡지나 티켓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는 ‘타임아웃’지 같은 공연 무가지에 매번 다른 이야기를 들고 독자와 만났다. 대신 무용수들을 ‘보그’지로 보내 비비언 웨스트우드로 컬래버레이션을 하고, 아스널의 인기 선수들과 ENB 무용수들이 광고를 촬영하면서 단체의 대외적 이미지는 훨씬 밝아졌다.

스와로브스키·샤넬에 이어 주얼리 브랜드 백스 앤 슈트라우스를 새 스폰서로 끌어들이며 발레에 주머니를 열지 않던 기업들이 ENB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소아암, 파킨슨 환자를 위한 클래스에 자신이 나서고, 이르지 킬리안의 ‘작은 죽음’을 준비하면서 직접 펜싱 의류의 협찬을 잡아온 노력을 보면 감독을 준비해온 시간을 헤아릴 수 있다. 발레단의 로고도 토슈즈를 상징하는 마크로 바꿨고, 염가 티켓 판매 시 할인율 역시 로호가 정한다.

투어링 컴퍼니의 특성이 뜨내기로 비치지 않게 새들러스 웰스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획 공연을 갖고, 로열 앨버트홀에선 볼거리 위주인 데릭 딘 버전의 원형 발레를 상연하는 체제를 갖췄다. 런던 콜리세움 공연 역시 박리다매로 유료 좌석을 채우는 전략을 시도한다. 감독 2년 차에 로호가 밝힌 중기 계획도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발레단의 지속 가능을 위해 발레 학교 내실화와 전막 리허설이 가능한 스튜디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평범했지만, 로호는 이듬해 솔루션을 가져왔다. 로호가 찾아간 곳은 동런던 지역에 대규모 주거 타운 런던 시티 아일랜드를 개발하는 부동산 회사 밸리모어였다.

로호는 발레단이 풀 사이즈 스튜디오가 없으면 리허설 대관을 위해 비용과 시간을 어느 정도 투입해야 하는지 경영진에게 직접 설명했고 “동런던에도 문화 예술이 필요하다”는 당시 런던 시장 보리스 존슨의 코멘트도 끌어냈다. 결국 2018년 가을, ENB와 발레학교는 최신 시설에 입주한다. 지금의 본부인 사우스켄싱턴을 떠나 새 곳으로 가는 과업이 지금까지 로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일이며 그녀의 경영 수완이 극명하게 외부에 드러난 사례다. 로호는 ENB를 세계적 단체로 성장시키는 첫 단추를 꿴 것으로 자평한다.

로호의 영리함, ‘지젤’의 시작


▲ 지젤 역의 알리나 코조카루 ⓒLaurent Liotardo

ENB가 여성 안무가 특별공연을 가지면서 “기존 남성 발레 안무가의 시선에는 포르노의 관점도 있었다”고, 감독급에선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던 불편함을 대중에 꺼낸 것도 로호다. 특급 스타가 부재하는 단체의 약점을 타개한 건 무용수 알리나 코조카루였다. 부상으로 고통받던 코조카루가 로열 발레의 모니카 메이슨 감독과 갈등 끝에 단체를 떠날 준비를 하던 2013년 봄, 로호는 코조카루를 찾아갔다. 로호 방문 이후 코조카루는 “세간의 의혹과 달리 로호와 무용수 시절 좋은 관계를 가졌고, 무엇보다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점에 끌려 ENB로 간다”고 밝혔다.

로호는 코조카루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꿰뚫었다. 로열 발레에서 경험하지 못한 ‘해적’ 같은 작품에 흥미를 갖고 있는 점을 감안해 충분한 연습 시간을 부여했고, 컨템퍼러리 신작에 기용해서 소속감을 고양했다. 아울러 자신과 괜한 라이벌 관계로 비치지 않게 오프닝 주역의 상당 부분을 코조카루에 양보했고, 함부르크 발레와 같이 ENB와 겹치지 않은 레퍼토리를 갖고 있는 곳의 활동을 보장했다. 지금도 세계 주요 갈라 무대를 소화하는 현역 발레리나 겸 감독이어서 가능한 세심한 배려다.

로호는 발레단의 재정을 건전화하기 위해 중국·일본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2015년 가을, 아크람 칸 안무의 ‘지젤’을 제작하면서 작품이 채 완성되기 전부터 ENB의 투어 매니지먼트인 해리슨 패럿이 중국의 여러 오페라하우스에 ‘지젤’의 수출을 교섭하고 있다. 이미 올해 초 영국의 유력지들은 경쟁적으로 ‘지젤’을 반드시 봐야 할 작품으로 꼽았다.

로호가 아크람 칸을 ENB에 끌어들인 건 20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한 ‘잊지 앉기 위해서(Lest We forget)’ 중 ‘먼지(Dust)’를 통해서다. 영국 최대의 팝 축제인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에 ENB가 출연해 칸의 카탁(인도의 전통춤)을 추자 발레 이외의 분야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지젤’을 준비하면서 칸이 걱정한 것은 ENB 댄서들이 자신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 부상을 입는 것이었다. 아크람 칸 컴퍼니의 공동 창립자 파루크 차우드리를 중심으로 칸의 언어를 ENB에 녹이는 클래스가 선행됐고, 그 과정들이 SNS로 전달됐다.

과감성이 부족했던 아크람 칸의 연출


▲ 스티나 카주뵈르(미르타)·알리나 코조카루(지젤)·이삭 에르난데스(알브레히트) ⓒLaurent Liotardo

아크람 칸 안무의 ‘지젤’은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1일까지 맨체스터 팰리스 시어터 투어에서 초연됐다. 칸은 프리미어를 앞두고 맨체스터에 상주하며 초연 전까지 작품의 세부를 손질했다. 자신이 클래식 발레단과 전막을 만든 것이 처음이고, 이 작품 전까지 클래식 ‘지젤’을 본 것이 단 한 번뿐이라는 언론 인터뷰는 자칫 부메랑이 될 수 있었다.

아돌프 아당의 음악 대신 빈첸초 라마냐가 편곡했고, 아카데미상을 받은 디자이너 팀 입이 세트 디자인을 맡았다. 칸의 크리에이티브 팀이 손을 본 드라마투르기는 이민자, 난민의 시각으로 본 ‘지젤’이었다. 의복 공장에서 일하던 지젤이 작업장 폐쇄로 곤란함을 겪을 무렵, 알브레히트가 재력을 숨기고 지젤과 만나기 위해 위장 취업한다. 하지만 연적 힐라리온에게 존재가 발각되고 지주와 약혼녀 바틸드의 출현에 알브레히트는 당황한다. 지젤은 바틸드가 입은 옷이 자신이 만든 것임을 알고 혼절하면서 1막은 절정을 맞는다. 이후 묘지에서 벌어지는 연적 간의 결투나 슬픔에 잠긴 지젤의 광기는 기존의 작품과 배경만 바꾼 정도다.

2막은 여성 근로자들이 일하는 공장을 유령 공간으로 설정하고, 지젤의 죽음을 맞이한 알브레히트의 내적 갈등이 심화되며 작중 세트인 벽이 여러 번 움직인다. 정령들의 여왕인 미르타나 힐라리온의 역할은 고전과 대동소이하고, 생과 사를 넘어 재회하는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관계도 고전에서 본 절박함과 비슷한 수준이다. 거대한 벽이 세워졌다가 돌아가는 설정은 연인의 사랑이 막혔다 소통하는 것임을 초심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먼지’와, 칸과 실비 기옘이 함께한 ‘신성한 괴물들(Sacred Monsters)’에서 본 카탁의 변주가 길게 이어졌다. ‘먼지’를 보고 ‘지젤’을 청한 로호의 기대 수준에 ‘지젤’의 현 내러티브가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스토리와 캐릭터, 배경 설정이 마츠 에크의 기존 재해석 연작과 비교해 충격적일 게 없다.

지젤을 연기한 코조카루와 알브레히트 역의 이삭 에르난데스는 클래식 발레 무용수들이 안전 지향으로 카탁을 ‘정독’하는 모습이었다. 동작의 끝에 힘을 더 싣지 않는 코조카루식 해석은 파워풀한 하체로 과감하게 파트너에 다가가는 로호의 적극적인 연기와 대비됐다. 주변을 경계하는 힐라리온의 움직임은 칸의 기존 작품에서 보던 동작들의 반복이라 신선함이 떨어졌다. 어디서 본 듯한 명장면이 한두 번 쓰이는 것과 작품에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것을 놓고 칸의 크리에이티브 팀은 더욱 정밀한 예술적 판단을 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칸의 ‘지젤’은 선악 구분이 고전보다 희미해졌다. 칸은 무대에 펼쳐진 진실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도록 장치와 어휘를 조절했다. 스타 안무가가 도전한 클래식 발레의 성패 여부는 로호의 ENB가 고려하는 최선의 가치가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을 ENB의 새로운 철학으로 내세운 로호에게 신작과 관련한 논란은 더 반가운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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