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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
도전과 새로움을 담아낸 자리
글 김선영 기자 11/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11월호 - 전체 보기 )



‘김자경오페라단은 베르디의 가극 ‘아이다’를 24일부터 26일까지 시민회관에서 공연한다. (…) 합창단 120명, 무용단 30명 등 총 200여 명이 출연하는 대무대. 유망한 신인들을 기용하는 김자경오페라단은 이번에도 캐스트에 신인들을 쓰고 있다. 아이다 역에 허순자·정은숙·박성연, 암비리스 역에 이영애·강화자·정영자, 라다멕스 역에 김화용·박성원·김진원 (…) 연출은 오현명씨이며, 오키스트러 지휘는 홍연택씨가 맡는다.’ (경향신문 1970년 9월 19일)

1970년 김자경오페라단 ‘아이다’로 데뷔한 메조소프라노 강화자가 이후 김자경과 신문에 나란히 소개된 것은 1991년 일이다. 강화자는 사단법인으로 재출발하는 김자경오페라단의 신임단장, 김자경은 이사장 신분이었다. 한겨레신문 1991년 8월 22일 인터뷰 기사에서 강화자는 “법인체가 돼서 이제는 후원자들이 기부금에 대한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모든 오페라단이 겪고 있는 재정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강화자에게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 시절만 해도 007 가방을 들고 가가호호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오페라를 홍보하고 표를 팔 때였죠. 외국에선 펀드레이징이 활발한 시기였는데, 한국은 제가 유학가기 전이나 후나 크게 달라진 게 없었어요. 어떻게든 김자경 선생님을 도와야겠으니 국공립기금을 신청하고, 기업 협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러 다녔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선생님께 전화가 왔어요. 제가 후계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

당시 김자경의 적극적인 설득에, 강화자는 성악가가 일군 오페라단을 성악가가 이어가고, 귀국한 성악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힘을 보태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김자경오페라단을 어렵사리 맡았지만, 이후 운영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97년, 강화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새로운 오페라단을 창단한다. 그보다 한 해 전 ‘강화자 오페라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뜻 맞는 이들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오페라 하이라이트’ 공연을 올린 터였다. 중국 베이징, 한국 서울, 일본 도쿄를 가리키는 당시의 신조어 ‘베세토’가 오페라단 이름에 들어갔다. 1997년 11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창단 공연에는 한·중·일 중견 성악가들이 대중에게 친숙한 오페라 아리아와 중창을 선보였다. 이때부터 강화자는 장면 곳곳에 무용을 도입해 음악에 담긴 정서를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연출력을 내세우기도 했다.

“당시 유학을 다녀온 성악가들이 국내에 들어와도 설 무대가 없는 시절이었죠. 오페라단은 물론 무대를 만들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도 많았어요. 김자경오페라단 시절에 못했던 것, 제작하고 연출하면서 노래를 못 부르더라도 고생 한 번 더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죠.”

강화자는 1970년 김자경오페라단의 ‘아이다’ 데뷔 후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 음대 대학원에서 오페라를 공부했다. 1976년 뉴욕 리릭 오페라단의 ‘삼손과 데릴라’를 비롯해 미국에서 메조소프라노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녀는 1980년 국립오페라단 ‘삼손과 데릴라’의 데릴라 역을 계기로 귀국하게 된다. 이후 연세대 음대 교수로 학생들과 함께 오페라 워크숍을 이끌었다. 성악가로서 경험, 미국에서 쌓은 연출가로서 관점이 한데 어우러져 발성부터 연기까지 세심하게 살피며 연출하고 지도했다. 이후 1991년엔 서울오페라단(단장 김봉임) 창단 16주년 기념 공연인 모차르트 ‘마적’을 연출한다. 당시 국내 오페라계에서 여성이 연출을 맡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며, 연극 연출가나 영화감독들이 맡던 오페라 연출을 여성, 또 성악가 출신이 하는 걸 못마땅해하는 시선도 많았어요. 결과와 판단은 청중의 몫이니, 더욱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이젠 여성 연출가 1세대로서 도전했던 것들을 후배들이 잘 이어나가는 것 같아 기쁩니다.”

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의 19년 발자취

1997년 창단 공연을 시작으로 올해 19주년을 맞이한 강화자베세토오페단의 무대에는 새로움과 도전에 대한 용기가 가득하다. 그간의 오페라단 역사 가운데 기록적인 작품과 인상적인 순간들을 강화자 단장과 함께 살펴봤다.


▲ 이동훈 ‘백범김구와 상해임시정부’(1999)

1999년 이동훈 ‘백범김구와 상해임시정부’

강화자 단장이 창단 후 첫 대극장 오페라로 창작오페라를 만들고자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위인’이었다. 단체명인 베이징·서울·도쿄를 의미 있게 이어주는, 김구, 안중근 같은 역사 속 인물을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1999년은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50주년인 해였다.

강화자 단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외국에 나가면 모두 다 애국자가 되지 않나. 국민 통합,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오페라를 만들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단국대 음악학장 이동훈이 작곡을 맡고, 장수동이 연출로 나섰다. 3대의 스크린을 사용해 무대장치의 한계를 넘는 ‘영상 오페라’로 기획한 것도 당시로선 이색적이었다. 마지막 3막에 등장하는 아리아 ‘나의 소원’은 작품의 하이라이트. 오페라는 항일투쟁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백범 김구,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대동단결을 호소하는 독립운동가,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윤봉길의 모습에 이어 마지막, 동포들이 조국에 바치는 애국가 합창으로 장엄하게 마무리된다. 당시 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이 ‘라 트라비아타’ 같은 유명 작품이 아닌 창작을 택한 ‘과감한 시도’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 현제명 ‘춘향전’ 일본 공연(2002)

2002년 현제명 ‘춘향전’ 일본 공연

일본 민간 오페라단과 합작으로 10월 도쿄문화회관 대극장에 올린 공연은 강화자 단장에게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다. 한국의 무용단, 한·일 연합 합창단, 일본 측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모여 하나의 무대를 만들었다. 완벽한 한국어 발음을 구사하려 부단히 연습하던 일본 측 가수와 합창단의 노력에 한국 측 예술가들이 감동을 받기도 했다. 한국적 해학과 음색 앞에 국경은 허물어졌다. 일방적인 문화 전달이 아닌, 양국 예술가들의 자연스러운 교류로 인해 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에게 더욱 의미 있는 공연이 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중국에서도 동일한 작품이 공연됐다. 이 공연에서 강화자는 무대 뒤에서 총감독으로, 무대 위에 월매 역으로 오르기도 했다.


▲ 모차르트 ‘마술피리’(2003)

2003년 모차르트 ‘마술피리’

공연을 앞두고 강화자 단장은 국내외에서 잘 알려진 프로 성악가 외에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신예들을 위한 오디션을 마련했다. 아직 프로 무대에 정식으로 서보지 않은 가수뿐 아니라 무대디자인·지휘·조연출·무대미술에서도 신인급을 과감하게 기용했다. 총 7회 공연 중 한 회를 오롯이 신인들이 채우는 무대로 만든 것이다. 연습 역시 기성 성악가와 신예가 함께 연습을 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후배들은 선배의 노련함을, 선배들은 후배의 패기와 열정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강화자 단장이 이렇게 파격적인 무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도 오디션을 통해 김자경오페라단 ‘아이다’의 암네리스 역으로 데뷔한 경험 덕이다. 신인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그녀 평생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 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홍콩 오페라단·이탈리아 로마극장 공동 제작 베르디 ‘아이다’

2007년 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홍콩 오페라단·이탈리아 로마극장 공동 제작 베르디 ‘아이다’

주·조연 성악가 20명, 오케스트라 80명, 합창 100명 등 출연진만 300명이 넘었고, 로마극장이 제작한 300여 벌의 의상, 32.7톤에 달하는 로마극장의 무대 세트가 그대로 공수됐다. 계단을 이용한 입체적 구성, 여기에 더해진 홍콩발레단의 춤이 관객들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겼다. 한편 1988년 ‘투란도트’, 2003년 ‘아이다’ 이후 한국에 세 번째 방문한 테너 주세페 자코미니가 라다메스 역을 맡았으나, 첫 공연 이후 급성 폐렴 증세로 무대에 더 오르지 못하고 더블 캐스팅된 이정원이 이틀 연속 무대에 오르는 강행군을 펼쳤다. 당시 라 스칼라에 한국인 테너로는 처음 주역에 발탁되었던 이정원은 탁월한 실력으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 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 강화자 단장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강화자 단장은 저녁 시간을 공연장에서 보내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가 고집하는 원칙은 스테이지 캐스팅. 한국에서 활동하는 성악가는 반드시 무대에서의 공연을 직접 보고 캐스팅한다. 오디션을 보겠다며 사무실을 찾는 성악가가 많았지만, 그런 경우 캐스팅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발품 팔아 신인을 발굴하고 직접 무대에 세운 성악가들이 이후 다른 오페라단 무대에 올라 주목받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남다른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

“김자경 선생님이 저를 발굴하셨으니 저도 인재를 발굴해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생각을 해요. 신예를 보며 느끼는 행복, 발굴하는 순간 느끼는 보람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먼 훗날 제가 김자경 선생님을 기억하듯, 누군가 잊지 않고 나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정말 감사하겠죠.”

1970년 오페라계에 입문해 성악가이자 연출가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오페라단을 운영해온 강화자 단장은 민간오페라에 대한 인식이나 정부 지원에 대한 아쉬움과 그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 가운데 내놓았다.

“우리나라에 유독 민간 오페라단이 많은 이유는 무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도 설 무대가 없으니 다들 직접 차리게 된 거죠. 그나마 재정이 넉넉하면 멋있게 만들 텐데, 대부분 열악하죠. 오페라는 결국 제작비가 관건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선 공연예술도 돈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현 문화 융성 시대에 국민들이 즐길 수 있는 폭은 늘어났지만, 반면 예술가들에게 확대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정부에선 국립 오페라단 앞으로 100억원 이상의 예산을 내놓지만, 민간 오페라엔 무관심하죠. 이 땅의 첫 오페라가 민간 오페라단에서 시작됐음을 잊어선 안됩니다. 국가가 민간 오페라단 실적에 따라 몇 년 단위로 예산 지원을 하거나, 그것도 어렵다면 사무실 같은 공간이라도 지원됐으면 좋겠어요. 국공립 오페라단과 민간 오페라단 사이에 교류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현재 민간 오페라단이 공연 한 편을 위해 제작하는 무대 세트나 의상은 최소 몇 천만 원에서 몇 억 원에 달하지만, 공연 종료 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대부분 돈을 내고 폐기되기 일쑤다. 중요한 것들은 경기도 일대에 자리한 창고에 한 달에 몇 백만 원씩 지불하며 보관하지만, 공간의 한계로 결국 폐기하게 되는 것들이 매번 생길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1억 원이 넘는 세트를 버릴 때마다 제 몸뚱이를 버리는 심정이에요.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 손실이죠. 한번은 서울시오페라단에서 사용했던 무대 세트를 대여해 나름대로 바꿔 무대에 올렸는데, 어느 관객이 후기에 ‘타 오페라단 세트를 왜 재탕하느냐’고 지적한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론 다시 빌려 쓸 수가 없겠더군요. 무대 세트나 의상에 소요되는 비용이 낭비되지 않도록, 정부 주도 아래 보관 및 대여에 대한 시스템화가 이뤄지길 바랍니다. 더불어 K-클래식 붐과 함께 기존에 사용한 세트나 의상을 활용해 오페라 테마파크를 조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오페라 돋보기┃한국 최초의 ‘비올레타’가 세운 김자경오페라단

1948년 1월 16일, 이인선(1907~1960)의 주동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무대에 올린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김자경은 비올레타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후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 그녀는 성악을 공부하는 한편, 1950년 카네기홀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독창회를 열었다.

1948년 ‘라 트라비아’ 공연 이후 한국의 성악가들은 오페라 공연에 끊임없이 열과 정성을 쏟았다. 1962년 창단된 국립오페라단은 단장 이인범, 부단장 김자경을 비롯해 당시 주요 성악인들이 규합하게 된다. 1960년대에 극장을 비롯한 제반 부대시설, 연출가, 성악가, 관련 스태프 등 오페라를 할 수 있는 인프라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도 오페라가 무대에 올라간 것은 유럽 예술의 대표적인 장르에 대한 수용자나 사회적 요구이기보다는 성악가 자신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국립오페라단, 대한오페라단, 서울오페라단 등이 활동했는데, 김자경오페라단은 1968년 창단 이후 연 2회 공연을 꾸준히 올리며 대중적 성공을 거둬 한국 오페라계의 기둥 구실을 했다.

1968년 김자경오페라단의 첫 공연은 ‘라 트라비아타’. 1948년 명동 시공관에서 공연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주역이었던 김자경은 정확히 20년 만에 다시 비올레타 역을 맡으며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한국오페라사의 창작 오페라 초연에서 김자경오페라단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장일남의 ‘원효대사’ ‘춘향전’, 김동진의 ‘소녀심청’ ‘심청’ ‘춘향전’, 박재열의 ‘심청가’, 박재훈의 ‘에스더’, 이건용의 ‘솔로몬과 술람미’. 현제명의 ‘춘향전’ 등이 김자경오페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99년 11월 9일, 김자경은 향년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리고 2000년 들어 한국의 첫 오페라는 김자경오페라단의 제57회 정기공연으로 올려진 ‘라 트라비아타’였다.

- ‘객석’ 2011년 9월호 특집 ‘이 땅의 오페라 1948’ 중
‘다시 김자경의 이름을 불러본다’ 일부 발췌 및 재구성

사진 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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