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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지휘자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혁명가의 자화상
글 김호경 기자, 송현민(음악평론가) 10/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10월호 - 전체 보기 )




▲ ⓒBruno Fidrych

지휘봉과 함께한 또 하나 여정

폴란드를 대변하는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1933~)의 지휘자 커리어는 그가 예일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72~1978년에 시작되었다. 1973년,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한 펜데레츠키는 영국 피터버러에서 자신의 지휘로 이 곡을 초연했다. 같은 해 작곡한 ‘솔로몬의 아가(雅歌)’와 이듬해 완성한 ‘마니피카트’ 역시 자신의 지휘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초연했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할 기회를 종종 가졌고, 쇼스타코비치,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멘델스존 등 여러 작곡가의 곡을 무대에 올렸다.


“지휘는 내가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작품만 한다. 작곡가로서 베토벤과 쇼팽을 오랫동안 탐닉했기에 이 두 작곡가가 지휘자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선택이다. 또한 마지막 시기를 함께 보낸, 친구로서 존경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도 연구한다. 이 외에도 마음에 와 닿는 현대 곡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번에 내한하는 신포니아 바르소비아는 펜데레츠키와 1992년 처음 만났다. 그의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를 바르샤바에서 초연했다. 펜데레츠키는 1997년에 이 단체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현재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신포니아 바르소비아는 1972년 예지 막시미우크가 설립한 폴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전신이다. 1984년 폴란드로 건너온 예후디 메뉴인이 폴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세계적 수준의 악단으로 끌어올렸고, 확장된 규모의 신포니아 바르소비아가 출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2008년부터 폴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신포니아 바르소비아 산하의 실내악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2014년 폴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막심 벤게로프와 함께 내한 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신포니아 바르소비아는 이번이 첫 내한이다.

10월 28일(부산), 29·30일(서울), 11월 1일(대구)에 걸쳐 선보이는 이번 공연은 폴란드 아담 미츠키에비치 협회(이하 AMI)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AMI는 세계를 무대로 문화교류를 펼쳤던 폴란드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이름을 본 따 만든 문화부 산하 기관으로, 한국을 포함한 67개국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폴란드의 문화예술을 전파하고 있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 펜데레츠키와 신포니아 바르소비아는 펜데레츠키의 현을 위한 신포니에타(1991), 샤콘느(2005)를 비롯해 같은 폴란드 출신인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협연 얀 리시에츠키), 베토벤 교향곡 7번,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그리고 자신의 제자인 한국인 작곡가 류재준의 마림바 협주곡(협연 한문경)을 들려준다.

“신포니아 바르소비아는 폴란드에서 가장 젊은 에너지를 지닌 오케스트라다. 이들과 작업해온 지 수십 년 되었는데, 이들은 여전히 활력이 넘친다. 폭넓은 레퍼토리 중 특히 동시대 음악을 자주 연주해서인 듯싶다. 나는 해외 연주를 하러 갈 때 쇼팽의 피아노 작품을 들고 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쇼팽이 창조한 음악은 모두 독창적이며, 그중에서도 피아노곡으로는 그가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다. 나와 함께 공부한 류재준의 작품을 그의 고향에서 연주하게 된 것도 기쁘게 생각한다. 그는 나와 폴란드에서 몇 년 간 같이 지냈는데, 그래서인지 음악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 재능이 뛰어난 작곡가다.”

작곡가로서의 정체성

펜데레츠키는 역시 작곡가로서 더 빛난다. 2000년, 파블로 카살스 페스티벌에서 펜데레츠키의 6중주(2000)를 초연한 한 연주자는 “불레즈의 ‘주인 없는 망치’를 보라. 기가 막히게 잘 썼다. 그러나 감정적 차원에서는 아무런 감동이 없다. 펜데레츠키의 작품을 연주하며 우리 여섯 명 모두는 내면에서부터 왈칵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펜데레츠키는 음악을 ‘상류층의 전유물’이나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삶 속에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예술로 여겼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어린 시절 풍경과 관련이 있다.

1933년 폴란드 뎅비차에서 태어난 펜데레츠키의 사춘기는 전쟁과 독일의 테러로 얼룩졌다. 그는 집 안 창문 너머로 고국의 군인들이 폴란드 인민공화국 대표라는 자들에 의해 시내 한복판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외삼촌 중 한 명은 러시아의 카틴 숲에서 소비에트에 의해, 다른 한 명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파비악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해방 이후에도 고통은 지속되었다. 외세에 의해 강요된 현실은 공허와 위선으로 뒤덮였으며 또 다른 형태의 테러가 지속되었다. 펜데레츠키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는 정신적 독립에 대한 절대적 염원을 품었다.

이러한 이유로 펜데레츠키의 음악에는 작곡가 자신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모든 작품에 소리를 뛰어넘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개 희망의 목소리다. 펜데레츠키의 초기작 대부분에 울음과 웃음, 한숨과 휘파람이 뒤섞인 인간의 목소리가 담긴 것도 이러한 영향으로 보인다.

“모든 작곡가가 시대적 고통 앞에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모국인 폴란드 외에도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적·정치적 사건에 관심을 두는데, 예를 들면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같은 곡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작품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러 나라의 연주 단체에 의해 연주되고 있으며, 나 스스로도 이 작품 이후 새로운 음악 언어를 발견했다고 말할 만큼 정신적 자극이 된 곡이다.”

과거로의 회귀는 또 다른 혁명이다


▲ 신포니아 바르소비아 ⓒKrzysztof Bielinski

펜데레츠키는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외에도 9·11 테러를 추모하기 위한 피아노 협주곡 ‘부활’(2002)을 썼다. 그런데 두 작품을 들어보면 한 사람이 작곡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른 작법을 풍긴다. 52대의 현악기가 극한의 움직임을 선보이며 충격을 안겨주었던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에 비해 ‘부활’은 옛 시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논리적, 낭만적 구조를 지닌다. 1960년대 전위적 작곡 방식의 선봉에 섰던 펜데레츠키는 1970년대에 들어 그것들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에 자신이 과거에 사용하던 12음 기법(으뜸음·딸림음을 구분하는 조성음악과 달리 열두 개의 반음을 동등하게 여기는 기법), 우연음악(템포, 음의 길이·높이, 강약 등 여러 요소에서 연주자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음악), 음향음악 기법(하나의 ‘소리 덩어리’가 선율 또는 리듬 및 화성이 되는 음악)을 내면 깊숙한 곳에 흡수시킨 채 후기 낭만주의로 시선을 옮겼다.

과거의 음악 양식을 가져온다는 것은, 당대에는 독재 정치가 남긴 후유증을 되새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예술 애호가를 자칭하며 수많은 음악 작품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 히틀러. 그가 제공한 권력의 유혹과 그 손을 잡은 예술가들에 의해 꾸려진 조직의 파괴적 음악 활동은 많은 예술가에게 상처로 남아 있었다. 작곡가 메시앙은 “옛날식의 하나-둘-셋-넷으로 세는 박자는 전쟁 동안 충분히 맛보았다. 지속되는 박자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했고, 철학자·미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조성주의를 보존하려는 행동 자체가 파시스트적 인격의 징후”라고까지 주장했다.

당대 진보적 음악가들은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현대’를 계속 추구하는 것은 한계를 넘어 부조리로 들어간다는 뜻이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무조성적 멜로디, 비논리적 흐름, 그것들이 새로울 때는 효과가 있었지만 금기는 사라졌고,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음악은 선험적인 것이어야 한다. 작곡가들은 클래식과 아방가르드, 그 어느 쪽으로도 도망갈 수 없었다.

한때 그들은 자작곡에 고전 음악을 콜라주, 인용, 모방하는 것으로 전통을 조롱했지만, 그 안에는 때때로 조성주의 세계에 대한 은밀한 갈망이 숨어 있기도 했다. 이후 타협을 위한 싸움의 징조가 나타났고, 그 가운데 펜데레츠키가 있었다. 그는 상상력으로 유지되던 주제들을 유기적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단일화된 체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밀도 높은 표현, 깊이 있는 방식을 위해 후기 낭만주의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가져왔다. 노선을 같이하던 음악가들에게 비난을 받은 것은 당연했지만, 펜데레츠키는 “나는 소리에만 관심을 가진 적도, 형식에만 관심을 가진 적도 없다. 전위예술의 폐해로부터 자유를 찾을 뿐”이라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국과의 깊은 인연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와 피아노 협주곡 ‘부활’ 사이에 쓴 곡으로 교향곡 5번 ‘코리아’(1992)가 있다. 한국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정부가 위촉한 곡으로, 그의 지휘로 KBS교향악단이 연주했다. 1990년 취리히에서 펜데레츠키를 처음 만난 작곡가 강석희가 문화체육관광부에 그를 추천했고, 그는 강석희에게 한국민요 음반 몇 장을 요청해 ‘새야새야 파랑새야’의 선율을 교향곡 5번 ‘코리아’에 차용했다. 당시 한국 청중에게 완전히 익숙한 음악어법은 아니었지만 그리 난해하지 않았고,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렬한 힘을 전달했다.

펜데레츠키는 그 후 서울바로크합주단(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서울시향과 백건우·진은숙·사라 장·손열음과 음악적 교류를 가진 바 있다. 대표적인 친한파 작곡가로 불리는 그의 ‘한국 사랑’은 잦지는 않아도 꾸준한, 내한 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 음악가들은 태생적으로 음악성을 가지고 있고, 유럽식 교육도 잘 받아 서방 국가 출신 연주자들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세계적 수준의 한국인 음악가들과의 교류는 늘 즐겁다. 나는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한국에는 수천 년 동안 발전하며 품은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음악에 활짝 열려 있어 늘 신선하다. 나와 내 아내는 한국을 무척 사랑하며 그곳에 갈 때마다 설레고 즐겁다.”

전통과 새로운 것을 하나의 그릇에 담다


앞서 보았듯 펜데레츠키는 혼돈에서 시작해 그 속에서 점차 질서를 창조한 작곡가다. 과감한 음향 실험으로 다름슈타트의 음렬주의(특정한 음의 열을 만들어 이를 주제 선율로 삼는 음악)와 미국의 우연음악 조류에 맞서더니 “뒤돌아서서 문을 여는 것이 가장 창조적인 일”이라 말하며 신낭만주의에 앞장섰다. 83세인 그는 여전히 ‘이중적 뿌리’의 필요성을 설득한다. 시대에 편승하지 않고 꾸준히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도 “좋은 음악이란 몬테베르디·팔레스트리나·모차르트·베토벤·하이든과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작품에 기초하는 음악”이라 말한다. 펜데레츠키 음악의 모든 조건과 방식은 단 하나 목적을 갖는다. 바로 ‘영원한 가치’다.

펜데레츠키의 이러한 철학은 그의 관심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현재 크라쿠프의 30만㎡ 규모 대지에 1800여 종의 나무를 가꾸고 있다. 동유럽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식물원이다. 펜데레츠키는 지난 40여 년간 이곳에 열정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단지 작은 땅을 마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 후로 계속해서 나무를 심고 있다. 심은 것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면 적어도 20년을 기다려야 한다. 난 이 일에 가치를 느낀다.”

시대의 패러다임을 깨부수고 독자적 행보를 보여온 노장. 역사적 비극을 음악에 담고, 사회 참여적 성향을 띠며, 다수의 종교음악으로 인간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한 작곡가지만, 그는 다가올 시대를 섣부르게 예견하거나 젊은 음악가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결코 묻지 않는다. 펜데레츠키가 늘 새로울 수 있는 이유, 그의 음악이 역사에 깊이 뿌리 내리면서도 자유롭게 가지를 뻗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난 천리안이 없다. 새로운 예술 사조는 음악학자들이 논할 일이다. 난 나만의 취향을 추구한다. 모든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위한 책임만을 갖는다. 수천 명의 작곡가로 구성된 미로 속에서 각자 다른 역할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스스로 가장 높은 가치를 추구하면 된다.”

노년의 펜데레츠키는 소리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내면세계에 집중하고 있다. 실내악에 관심을 두고 섬세함의 경지를 그리는데, 이는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의 시간, 문화와 윤리, 정치적 규범의 왜곡에 따른 혼란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그의 교향곡 중 가장 최근작으로 기록되어 있는 8번 ‘덧없음의 노래’에서는 인생의 고독과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펜데레츠키는 여전히 혁신한다. 83세 노장의 혁신은, 자신이 일구어온 세계를 확신하면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확장에 집착하기보다는 내면과 외면에 흩어져 있는 조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으로써 이루어진다. 오래도록 가치를 지닐 작품을 위해 다시 묘목을 고르는 그이기에 우리는 또다시 그의 다음을 기대한다.

글 김호경 기자(ho@gaeksuk.com) 사진 오푸스

작품 변화를 중심으로 바라본 펜데레츠키의 삶


▲ 1959년의 펜데레츠키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청년은 자신이 부순 전통에 기거하기도 했다. 그 후 다시 그곳을 폭파하고 제 갈 길을 떠났다. 그의 음악은 하나의 양식과 스타일로만 고착될 수 없다. 펜데레츠키 삶의 결정적 ‘순간’을 중심으로 그의 음악과 그 시대를 살펴본다

폴란드 음악의 잠재적 힘


▲ (왼쪽부터)펜데레츠키와 루이지 노노, 저널리스트 오토 토미크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는 음악적 잠재력을 과시하며 새롭게 부상했다. 폴란드를 지배하던 옛 소련의 스탈린(1878~1953)이 사망하며 서구문화 교류가 허용되었고, 폴란드의 현대음악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다.


▲ 펜데레츠키와 헨리크 구레츠키


▲ 펜데레츠키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1956년부터 바르샤바 가을 축제가 개최됐다. 이 음악제는 존 케이지(1912~1992)의 우연성 음악과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1928~2007)·피에르 불레즈(1925~2016)·루이지 노노(1924~1990)가 중심이 된 독일 다름슈타트 악파의 음렬음악과 함께 동유럽 현대음악의 새로운 전진기지가 됐다. 피에르 셰퍼(1910~1995)·데이비드 튜더(1926~1996) 같은 아방가르드의 대표선수들이 그곳에서 공연했고, 헨리크 구레츠키(1933~2010)·카지미에시 세로츠키(1922~1981)·보이치에흐 킬라르(1932~2013) 같은 젊은 폴란드 작곡가들이 새로운 경향의 일파를 이루었다. 이들이 선보인 ‘소리 덩어리’가 ‘부글거리며’ 들려주는 음향의 향연은 전통의 해방만을 꿈꾸던 시대에 또 하나 이정표를 제시했다.

‘음향’이라는 실험도구

위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남서독일 방송국의 위촉작인 펜데레츠키의 ‘아나클라시스 (Anaklasis, 1960)’가 1960년에 독일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그 전 해에 펜데레츠키는 폴란드 작곡협회 주최 제1회 콩쿠르에 세 개의 작품을 익명으로 출품해 1위와 공동 2위를 홀로 차지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1위의 ‘스트로프(Strophes, 1959)’와 2위의 ‘다윗의 시편’(1959) ‘방사’(1959)에서는 베베른·스트라빈스키 등 선진 작곡가의 작법이 묻어났다. ‘스트로프’는 불필요한 것을 지우고 작은 형식 속에 극단적으로 압축한 작법을 선보였던 베베른의 점묘주의 형식을, ‘다윗의 시편’은 정교한 대위법의 르네상스 종교 합창곡 안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원색적 리듬과 음색을 드러냈다.

이어 발표한 ‘다형성’(1961) ‘형광’(1961)에서는 클러스터(인접한 음들을 동시에 연주하는 기법)와 더듬거리는 피치카토, 사이렌 소리 같은 글리산도, 현악기의 줄걸이판과 줄받침 부분을 켜는 등 과감한 실험을 했다. 이러한 음향 실험은 선율·화성·리듬이 중심을 이루는 전통음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고, 갈수록 더해지는 명성은 펜데레츠키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럼에도 어떤 오케스트라는 연주를 거부했는가 하면, 관객은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공산주의의 하늘 아래 사는 청년 작곡가의 충동이자 장난기의 발현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거대한 거짓말’에 대한 반발이었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펜데레츠키의 문제작이자 대표작이 된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1960)의 원제는 ‘8분 37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의 충격에서 비롯했다고 작곡가는 말한다. 앞서 살펴본 음향음악 기법을 녹여 넣은 이 곡을 많은 이가 1945년의 히로시마 원폭을 ‘위해’ 쓴 곡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불안과 공포의 효과를 극적으로 구사한 이 곡에 대해 “무제(無題)에 가까운 제목 때문에 작품의 강도가 축소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펜데레츠키는 이 곡에 맞는 테마를 찾아 제목을 다시 붙여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친 것이다.

52대의 현악기가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투척한 원자 폭탄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의 광경을 묘사한다. 그만의 전매특허였던 클러스터 기법과 음향음악 기법은 음들을 연결하여 ‘선’적 선율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한 음을 ‘면’처럼 번지게 하여 음정의 미세한 변화를 연출한다. 그 외에 강한 비브라토(떠는 소리) 또는 트레몰로(음을 되풀이하는 주법)를 이용하고 줄을 뜯거나 ‘윙윙’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그런 표현과 연주에 있어 현악기는 펜데레츠키에게 그 어느 악기보다 수월하고 편한 악기다. 이 작품은 매우 전위적이지만, 히로시마의 비극을 알고 있는 동시대 청중에게 강하게 호소했다. 펜데레츠키가 사회 참여적 경향을 띤 작곡가임을 증명한 최초의 작품이자 대표적인 작품이다.

과거로 회귀

▲ 1962년, 바르샤바의 한 스튜디오에서

1960년대는 패러디와 게임의 시대였다. 예술가들은 베토벤의 음악을 끽끽대며 뱉어내는 축음기를 전시하거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리고, 소변기를 조각품으로 전시했다. 작곡가들은 베토벤과 말러의 파편들을 혼입시켰고, 르네상스의 미사곡과 바로크풍 협주곡을 모방했으며, 재즈· 팝송·로큰롤을 흡수했다. 전통음악의 인용은 과거에 대한 ‘조롱’이거나 ‘갈망’, 둘 중 하나였다. 동유럽 작곡가들은 이러한 다원주의를 전통과 아방가르드 사이의 타협 지점으로 지지했다. 그 간극에 펜데레츠키도 서 있었다. 그 역시 바로크적 형식을 수용했고, 전통 수난곡의 가사와 기법을 자신의 음향음악 기법과 결합시켰다.

아방가르드 기수들이 전통음악에 반기를 들던 1960년대. 유럽의 전통과 보수적 예술성이 집적된 장소인 “오페라극장을 폭파하라”고 외친 이가 피에르 불레즈였다면, “뒤돌아서서 문을 여는 것이 가장 창조적인 일”이라 말한 이는 펜데레츠키였다. 대표적인 곡이 1962년에 발표한 무반주 합창음악 ‘슬픔의 성모’와 1965년에 선보인 ‘성 누가 수난곡’이다. ‘슬픔의 성모’에서 음향기법은 전통음악의 구조와 특징을 부각시키는 수단으로써 부수적 역할에 그쳤다. 독일 뮌스터 대성당의 700주년을 기념하여 서독일 라디오 방송국이 위촉한 ‘성 누가 수난곡’은 중세의 오르가눔(그레고리오 성가의 가락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대성부를 붙인 다성 음악), 오래된 교회의 코랄에 날카로운 소음, 음향 덩어리의 실험을 가미했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를 통해 아방가르드 대열에 합류했던 그는 동시대 작곡가와 평론가들로부터 ‘전위예술의 배신’이라는 비평을 받는다. 그러나 작곡가는 이후에도 종교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의미의 음악을 다수 작곡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의 참상 속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공산권에서 종교음악을 발표

1960년대 중·후반을 지나 아방가르드적 실험이 잠잠해진 1970년대에 펜데레츠키는 ‘과거’로 더욱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그렇다고 뒷걸음칠 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서 발전하고 있으니까요.”(‘객석’ 1992년 9월호 인터뷰)

폴란드는 1947년부터 공산권 아래 있었다. 무신론적 사회에서 경건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그는 ‘진노의 날’(1967) ‘아침기도’(1971) ‘마니피카트’(1974)에 이르기까지 칸타타·오라토리오·극음악 등 종교적 양식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발표한다. 공산당 시절에 종교 억압을 받았고, 이에 항거하는 뜻으로 쓴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그는 더 이상 종교음악을 쓰지 않는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진지한 음악에 관심을 두지 않고 대중음악을 연주한다는 이유로 음악적으로 교회와 결별했기 때문이다.

음의 본질에 대한 탐닉


▲ 1966년의 펜데레츠키

작곡가는 1960~1970년대 자신의 음악적 성향이 잘 반영된 작품 중 하나로 ‘데 나투라 소노리스(De Natura Sonoris)’ 2번을 꼽는다. ‘데 나투라 소노리스’는 ‘온 더 네이처 오브 사운드(On The Nature of Sound)’로, 음의 본질, 소리의 본질을 탐닉한다. 1966·1971년에 각각 작곡된 1·2번 중 2번은 줄리아드 음악원의 위촉곡인데, 초연이 쉽지 않았다. 작곡가는 줄리아드 음악원에 첫 리허설을 보러 갔을 때를 회상한다.

“나이가 지긋한 분이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제가 듣기엔 그가 전혀 악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해줬죠. 그래도 이해를 못하더군요. 두 번째 리허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지휘대에 놓은 악보를 쾅 닫고는 그걸 들고서 집으로 돌아왔어요.”(‘객석’ 2007년 9월호 인터뷰)

결국 이 작품은 주빈 메타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다. ‘데 나투라 소노리스’ 2번은 플루트, 톱 악기, 비올라, 현의 클러스터, 금관이 결합하여 클라이맥스로 이끈다. 날카롭고 거친, 불안한 공포를 자극하는 음향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비롯한 다수의 할리우드 영화에 삽입되기도 했다.

과거로의 더 깊은, 더 짙은 몰입

음향음악 기법과 전통음악을 충돌·혼합시키던 그는 이러한 방식 역시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며, 아무리 훌륭한 형식도 언제까지 교묘한 변형과 조합으로 유지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말러, 브루크너 이후의 음악이 부당하게 끊겼다고 여기며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에서 영감의 물을 길어 올렸다. 이를 자신이 체험한 12음 기법, 우연성 음악, 음향음악과 함께 내면화하고 자기 체화했다.

교향곡 1번(1973), ‘야곱의 자각’(1974), 교향곡 2번 ‘크리스마스’(1980),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77)은 이러한 고민이 담긴 결과물들이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그의 전매특허인 클러스터보다는 선율선과 고전적인 화음을 집중적으로 썼고, 이를 교향곡 2번에도 사용했다. 유럽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곡가라는 그에 대한 칭호는 어느 새 ‘실험적이었던’ 작곡가로 변하고 있었다.

현실의 아픔을 그리다

1947년 폴란드에 들어선 공산당 정부는 경제정책에 실패했고 지도층은 부패했다. 그러던 중 1980년에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과 자유화 운동이 확산된다. 펜데레츠키는 관객과 교감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음악을 만들어 사회 참여적 자세를 보인다. 훗날 ‘폴란드 레퀴엠’ (1984)으로 통합된 ‘라크리모사’(1980)에는 반정부 운동에서 목숨을 잃은 항구도시 그단스크의 노동자들을 위한 헌정의 뜻을 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다


▲ 1966년의 펜데레츠키

“현재는 모든 사조를 다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객석’ 1992년 9월호 인터뷰)

복고주의가 고갈의 순간에 임박했음을 느낀 펜데레츠키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혼성 방식에 매진한다. 다양한 기원의 음악을 섞는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한 동구권 사회주의의 변화는 1989년에 들어와서는 폭발적인 양상을 보였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원적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봐야 하는 환경은 이제 현실이 된다. 이러한 시기에 눈을 뜬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은 1991년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된 ‘우부 왕’에 반영됐다. 거대한 서사와 흐름의 균열과 해체, 여러 기법과 다양한 기원의 음악이 조화 없이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교향곡 5번, ‘한국’이라는 부제를 달다


1992년 한국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교향곡 5번 ‘코리아’는 펜데레츠키와 그의 음악이 한국에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폴란드와 한국은 참으로 비슷합니다. 우수한 민족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희생물로서 핍박을 받아왔죠.”(‘객석’ 2000년 10월호 인터뷰)

2004년 펜데레츠키의 지휘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부활’을 협연한 백건우는 “한국을 얼마나 아느냐, 뭐 그런 것보다 한국의 역사적 아픔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 1992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교향곡 5번 ‘코리아’ 초연

40여 분 길이의 단악장 작품인 ‘코리아’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선율을 파사칼리아 형식의 변주로 사용했으나 작곡가가 “단지 음의 소재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처럼 한국의 정서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거칠고 강인한 분위기의 진취적 흐름이 돋보이는 이 곡은 한국 초연 이후 미국에서 로린 마젤/피츠버그 심포니에 의해, 유럽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내면 속으로, 더욱 더 명료하게


▲ 1988년 예루살렘, 브레진스키(정치학자)·코신스키(소설가)와 함께

과거와 새로운 것의 혼합에 있어 펜데레츠키는 명장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그는 그러한 실험보다는 그것들을 담고 조화시킬 수 있는 큰 그릇과 거대한 질서를 탐구한다. 당시 고민이 낳은 산물로 ‘예루살렘의 일곱 문’(1996)이 있다. 펜데레츠키 초기작인 ‘다윗의 시편’(1959)과 주제 상 맞닿아 있는 이 곡을 통해 작곡가는 과거에 대한 회고를 드러내는데, 이 시기부터 작품의 메시지가 작곡가 개인으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구약성서의 시편과 이사야서, 에스겔서의 ‘마른 뼈의 환영’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를 가져왔으며, ‘튜바폰’이라는 거대한 타악기를 고안해 선보이기도 했다. 7악장 형식의 작품은 대규모 악기 및 합창 편성과 색채감 있는 관현악이 어우러져 신에 대한 찬양과 인간 구원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실내악으로도 시선을 돌렸다. “3~4개의 악기의 응축된 형식을 통해 보다 억제된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클라리넷 4중주(1993)에서부터 6중주(2000)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구조 속에서 ‘명료성’을 탐구했다.

흐름을 일으켰거나, 흐름에 잠겼거나


아방가르드의 기수부터 전통의 후예를 아울러온 노장은 교향곡 8번(2005)에 ‘덧없음의 노래’라는 부제를 붙였다. 음악가임과 동시에 식물학자인 펜데레츠키는 크라쿠프의 넓은 대지에 대규모 정원을 꾸미고 평생 수만 종의 나무를 가꿔왔는데, 그곳의 빛과 색채를 교향곡 8번에 투영하며 이 곡을 자신의 나무에 헌정했다.

“나무는 예술작품이 두 가지에 뿌리를 두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땅과 하늘이지요. 어떠한 예술도 뿌리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활로 그은 탐탐의 음향, 알토 플루트의 연주, 오카리나의 합주가 어우러져 깊은 감동을 주는 이 작품에 작곡가는 ‘덧없음의 노래’라는 부제를 붙이며 고독과 무상함, 그 속에서의 희망을 드러낸다.

“점성술처럼 한때 유행하다가 어느 순간 잊히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운영되던 것이 어느 틈에 또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예술적인 감각도 이런 식으로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지요.”(‘객석’ 1992년 9월호)

펜데레츠키는 유행의 중심에 있었는가 하면, 그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윤회(輪廻)의 시간을 타고 변하고 또 변한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도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으며, 그 흐름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의 머리를 예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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