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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백사실 계곡 ‘웃음이 만드는 생명력, 수궁가’
꽃별의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
글 꽃별(해금 연주자) 6/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6월호 - 전체 보기 )



어느 초여름, 부암동 어딘가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다. 공연이라니까 뾰족한 굽이 달린 예쁜 구두를 신었다. 그런데 차를 세우고 향한 곳은 나무로 둘러싸인 숲이었다. 구두를 벗고 맨발로 걸어 도착한 곳은 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숨을 가다듬고 작은 바위에 앉아 해금을 꺼내 들었다. 수많은 이파리 사이로 빛이 반짝이고, 바람이 살랑이며 불었다. 거기 모여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우리는, 마치 숲의 일부인 것 같았다.


느리게 흐르는 백사실 계곡의 시간

부암동의 그 숲은 백사실 계곡이라 했다. 조선 시대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이곳에 있었고, 그래서 붙은 이름이란다. 서울 한복판, 붐비는 곳에서 불과 20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런 숲이 있다니… 숲속은 마치 ‘오래전 공간’ 같은 분위기였다. “며칠 전 비가 내려 계곡에 오랜만에 물이 많다”는 동네 어르신의 말씀이 의아할 만큼, 계곡은 작은 개울처럼 졸졸 흐르고 있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물은 맑고 깨끗했다. 꼬맹이들이 쭈그리고 앉아서 물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아이들의 등판이 내 어릴 적 등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의 등은 다 둥그렇고 작은가 보다. 계곡 옆에 ‘도롱뇽이 산다’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도롱뇽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나에게도 이 문장이 얼마나 건강하고, 중요해 보였는지 모른다.

커다란 느티나무와 벚나무들, 소나무 계단과 포근한 냄새가 나는 흙길, 그 사이에 핀 작은 꽃과 졸졸거리며 흐르던 작은 물줄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날은 아주 옛날 같다.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른 날이었다.

오정숙 명창의 ‘수궁가’

얼마 전 오정숙 명창(1935~2008)의 ‘수궁가’를 들었다. 얼마나 재밌고 맛깔나는지, 귀가 토끼처럼 쫑긋거렸다. ‘수궁가’는 대부분의 대목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자라가 세상에 나와 호랑이를 만나는 대목은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때여 자래가 세상에를 나가, 한 곳을 살펴보니 왠갖 짐생들이 모다 모여 있거날
“옳다. 저기는 응당 토끼가 있을 터이니 내 한번 불러보리라” 허고 부른다는 것이,
수로 만리를 아래턱으로 밀고 오자니 아래턱이 빳빳하여가지고
‘토’자가 살짝 늘어져 ‘호’자가 되었든가 보드라.
“저기저기 토, 호, 호, 호 생원 계시오?” 허고 불러노니,
첩첩산중 호랑이가 생원 말 듣기는 지 평생 처음이라.
반기 듣고 내려오는디.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 귀 찌어지고 몸은 얼쑹덜쑹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동아 같은 뒷다리, 전동 같은 앞다리, 쇠낫 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 격으로 잔디 뿌리 왕모래를 좌르르르 흩으며, 주홍 입 쩍 벌리고
‘홍앵앵’ 허는 소리 산천이 진동, ‘홍앵앵’ 허는 소리 강산이 뒤눕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래가 깜짝 놀래어 목을 움치고 가만히 엎졌을 제.
호랭이가 턱 내려와 보니, 아무 것도 없고 누어 마른 쇠똥 같은 거밖에는 없것다.
“이것이 날 불렀는가? 거, 묘하게 생겼다. 두루평판에 부쳐놓은 부꺼미 같다마는
고순내가 아니 나니 그도 아니오. 누어 마른 쇠똥 같으면 요참 소낙비에 비 맞은 터가 있을 터인디, 그도 아니오. 아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리보아도 둥굴둥굴, 저리 보아도 둥굴둥굴, 둥굴둥굴 우둥굴아!” 허고 불러도 대답이 없것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더니,
“옳다. 이거 하느님 똥이다! 하느님 똥 먹으면 약된다는디. 어디, 한 입가심하여 볼끄나?”
호랭이가 먹자는 통에 자래가 깜짝 놀래어 저 깊은 속에서 입부리만 겨우 열어가지고,
“여보시오! 당신은 뉘라 허시오?”
호랭이 깜짝 놀래
“이크 이것 봐라, 거 생긴 모양은 도리줌치 속에 배암 잡아 넣어논 것같이 생긴 것이
기중에 인사성은 밝네, 요것이 나허고 통성명을 허자고? 오, 나는 이 산중 지키는 호생원 어른이로다. 너는 명색이 무엇인고?”
자래가 호랭이란 말을 듣더니, 겁짐에 바로 일러버렸것다.
“예! 나는 명색이 자래새끼요!”

이 대목을 글로 적고 있자니, 참 심심하다. 판소리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장단과 선율이 급변할 때 느껴지는 매력이 글로써는 표현하기 어렵다. 판소리는 어떤 음악보다 더욱 실연자의 역량이 중요하다. 같은 대목도 소리꾼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은 장단과 선율이 같더라도 아니리(선율 없이 말로 풀어내는 것)와 연기, 그리고 즉흥적으로 덧붙이는 장면이나 이야기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가장 큰 역할은 그 시대를 울고 웃게 하는 해학과 시대정신에 있다. 현대에는 이 전 시대를 담은 판소리를 잘 보존하여 전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수많은 명창들과 소리꾼들이 자신만의 판소리를 부른다. 각각 특징이 다르고, 재미도 다르다.

이번 호에서 소개할 오정숙 명창은 아니리와 소리가 조화롭고, 마치 금세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역할마다 다른 캐릭터로 노래를 붙인다. 말도 안 되게 오만해서 비웃음을 살 만한 대목이나, 비굴해서 괜히 내 어깨까지 시린 대목, 능란한 거짓말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대목에서도 그 대상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마도 그건 오정숙 명창이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품은 애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정숙 명창의 소리를 찾아 듣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3년 전쯤 ‘적벽가’의 한 대목을 찾다가 여러 명창의 소리를 골고루 듣게 되었다. 무심코 듣고 있는데 어찌나 발음이 정확하고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단번에 듣는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소리였다. 오정숙 명창을 마음에 새기는 순간이었다. 주로 소리의 결이나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대단한 충격을 준 명창이기도 하다. 지난 호에 소개했던 김소희 명창은 소리가 담담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절제의 끝에 쏟아지는 탄식과 울음이 있다면, 오정숙 명창의 소리는 옹골차고도 정감이 있는 목소리와 탁월한 해석력으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선생의 소리를 직접 들은 적은 있지만 완창 무대를 보지는 못했는데, 그것이 사무치게 아쉽다. 2008년 작고한 선생의 소리를 이제는 음원으로밖에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음악에서는 좋은 것을 두고 ‘구성지다’라는 표현을 쓴다. 선생의 소리는 그야말로 구성지고, 박력이 있고, 그러면서도 청중을 재촉하지 않는 느긋함이 있다.

‘수궁가’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서로 자기가 어른라고 우기는 대목, 용왕이 토끼를 위해 수궁 풍류를 베푸는 대목을 들으면서 백사실 계곡이 떠오른 건 왜일까.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백사실 계곡을 찾았다. 당연하지만 고맙게도, 여전히 가까운 곳에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백사실 계곡에서 ‘수궁풍류’를 듣다

희한하게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하는 날은 거의 비가 오거나 눈이 온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잘 확인하지 않는 내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행을 할 때 날씨에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궂은 날에는 맑은 날에 볼 수 없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으니까. 한참 비가 오더니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하자 거의 그쳤다. 숲으로 들어서 크게 숨을 들이켜자, 시원하게 내린 비에 깨끗해진 공기가 몸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차고 맑은 물을 한 컵 마신 것처럼 온몸이 말끔해졌다.

비가 내린 직후라 오솔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10분 정도 걷자 세상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다른 세상인 것이다. 골짜기에는 물이 많아졌는지 물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는 말은 바로 지금을 두고 일컫는 말이리라. 화사한 꽃은 왠지 슬픈 감상을 주기도 하는데, 푸른 나무는 전혀 슬프지 않다. 비에 젖어 약동하는 숲은 푸르렀다. 숲은 오직 푸른색과 나무 줄기색인 거무스름한 색, 그리고 붉은 흙색이 전부였다. 물은 그 푸른 나무를 비추고 있었다. 넘치는 생명력이 숲을 가득 채웠다. 별장 터와 연못가를 걸으며 그 푸른 기운을 한껏 즐겼다. 온 산을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못에는 전과 달리 물이 제법 고여 있었다. 물에 그대로 비친 세상을 보고 있으니 ‘수궁풍류’가 떠올랐다. 토끼의 뛰어난 화술에 속아 넘어간 용왕이, 토끼를 모시고 나가 숲에 놓고 왔다는 간을 다시 챙겨오라는 명을 내리는 대목이다. 용왕은 어쩜 그리 어리석을까. 자라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토끼의 간은 그 뱃속에 있으니 제발 돌려보내지 말라고 충언을 하지만, 토끼는 뻔뻔함으로 무장한 궤변으로 구사일생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수궁가’에는 선과 악의 구도가 없다. 판소리 다섯 바탕 중에서 가장 유쾌하고 재밌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늙은 용왕이 병을 얻었다 하여 토끼를 속여 간을 꺼내가려던 그 심보부터가 나쁘지 않았던가. 토끼 입장에서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목숨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청중은 소리꾼이 이끄는 대로 별주부의 마음이 되었다가 토끼의 마음이 되었다가 한다. 오정숙 명창의 용왕 목소리는 꼭 들어보길 바란다. 소리를 들으면 용왕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목소리마저 쭈글쭈글 주름이 잡혀 있다. 그런 소리는 쉽게 들을 수 없다. 처절하고 이기적인 욕망이 담겨 있는 내용임에도 소리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수궁가’를 듣고 나면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백사실 계곡을 걸으면서 ‘수궁가’를 들으니 세상이 그리워졌다. 현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참 좋지만, 그 다른 세상을 둘러본 후 돌아갈 나의 삶이 있다는 것도 행복하다. 완전히 갠 하늘에는 여름이 묻어나고 있었다.

글·사진 꽃별
해금 연주자 꽃별은 경계를 허무는 평화로운 음악을 꿈꾼다. 해금으로 세상의 수많은 삶과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편, 국악방송 ‘꽃별의 맛있는 라디오’를 통해 우리 음악을 전하고 있다

해금 연주자 꽃별이 사용한 올림푸스 OM-D E-M10 Mark II는 작고 가벼운 바디에 휴대성과 화질, 디자인까지 겸비한 고성능 일상용 카메라다. 동급 유일의 강력한 5축 손떨림 방지, OLED 대형 뷰파인더 등 다양한 최신 기술을 적용해 쾌적한 촬영을 지원하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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