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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어의 역’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6/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6월호 - 전체 보기 )




4월 20일~5월 8일
선돌극장

불혹(不惑)의 굳은 심지

극단 76단의 예술감독 기국서가 ‘리어의 역(役/逆)’이라는 신작을 선보였다. 노장의 건재를 과시함은 물론 현실에 대한 연극적 사자후라는 점에서도 반갑고, 또한 기국서 연출이 이끈 극단 76단의 창단 40주년 기념이라는 측면에서 더더욱 반갑다.

극단 76단과 연출가 기국서는 한 묶음이다. 그의 행보가 곧 극단의 행보이고, 그의 연극 활동이 극단의 활동이었다. 1976년 결성 이후 ‘관객모독’ 같은 대표적인 레퍼토리를 만들어냈으며, 실험과 도전의 이름 아래 문제적 번역극을 소개하고 수많은 창작극을 무대에 올렸다. 기성 연극계의 변방에서 탄생해 끊임없이 연극계를 자극하고 풍성하게 만든 극단 76단이었다. 극단의 40년 생일을 준비하면서 그가 선택한 인물은 리어다. 이미 ‘미친 리어’(1995), ‘리어왕’(2006, 30주년 기념 공연)을 통해 리어의 광기를 현대인의 모습으로 풀어낸 그가 10년 만에 리어를 다시 택한 것은 ‘늙고’ ‘미친’ ‘인간’을 통해 지금 이곳을 말하고자 함이다.

40년 동안 리어를 연기한 노배우는 지금 무대 뒤에 마련된 자그마한 공간 속에 살고 있다. 리어의 대사들을 자신의 언어인 양 읊어대는 그는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간이 오래되었다. 리어만큼의 나이가 되어 완벽히 인간 리어를 이해하게 되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더 이상 리어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된다. 대본의 대사가 아닌 실제 리어가 했을 법한 대사들을 자신도 모르게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어의 역(役)이었던 배우가 리어를 거스르는 역(逆)이 되어 그의 삶 자체인 극장 한편에 유폐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노배우에게 30년 간 광대를 연기한 배우가 찾아와 연극에서 그랬듯 노배우를 조롱하고 날 선 말들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노배우에게는 극 중 리어처럼 세 명의 딸이 있는데, 첫째와 둘째는 현실의 고달픔을 이야기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재산인 극장을 파는 데 골몰해 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우가 된 셋째는 언니들을 힐난하지만 힘이 없다. 연극인 듯 현실인 듯 리어처럼 유산을 세 딸에게 나누어 준 노배우는 무대 위 연극이 끝나고 박수갈채가 쏟아질 때 죽음을 준비하다 “너무 상투적이지?”라며 광대와 함께 극장 밖을 나선다. 극장의 뒷방 늙은이가 된 노배우의 모습 속에서 젊음을 바치며 일궈낸 결과에 합당한 대접과 존경을 받아야 함에도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젊은 세대에게 푸대접받는 현실의 모습이 겹쳐진다. 기국서 연출의 시대를 포착하는 감수성이 여전히 펄떡거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나이트가운을 입은 백수광부의 노배우는 배우 홍원기를 통해 생명을 얻었다. 헛헛한 그의 눈빛은 노배우와 리어의 광기를 가득 담아내고 있으며, 깊게 파인 주름은 세월과 연륜의 더께를 가시화하고 있다. 극의 초반 40분가량 진행되는 배우의 독백에 대한 완벽한 몰입은 능수능란하게 완급을 조절하는 화술과 신체 연기를 보여준 홍원기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란 옷에 빨간 모자를 쓰고 가볍고 발랄한 광대를 연기한 김왕근은 묵직한 노배우와 대비를 이루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광대라는 특성을 극대화한 몸짓과 화술 속에 노배우에 대한 인간적 연민이 묻어나는 그의 연기는 오랜 동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신뢰를 보여준다.

나이 마흔은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이다. 극단의 40년은 더 많은 현실적 유혹과 문제를 견뎌온 지난한 세월이다. 그동안 미혹되지 않고 한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극단 76단의 연극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굳건한 것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혹을 맞은 극단과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연출가. 그럼에도 “처음과 같이 그리고 지금에도 반란과 불온, 자유와 상아탑을 꿈꿀 것이며 진정한 꿈을 꾸는 자는 결코 헛된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리어의 역’ 프로그램 중)는 선언을 긴 세월, 잘 벼린 칼처럼 가슴에 품고 있는 극단 76단은 여전히 뜨겁고, 연출가 기국서는 여전히 청춘의 한가운데 있다.

사진 극단 76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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