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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신, 디오니소스
유형종의 MYTH+MUSIC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5/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5월호 - 전체 보기 )




▲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의 ‘바쿠스’

헨델, 생상스,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와, 영화 ‘사이드웨이’에 담긴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디오니소스는 포도와 포도주의 신이다. 로마신화에서는 ‘바쿠스’로 불린다. 술의 신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광기를 내재하고 있으며 왁자지껄한 주연(酒宴)을 즐긴다. 이성적인 아폴론과 자주 비교되는 화끈한 성격의 신으로, 아폴론이 ‘고전주의적’이라면 디오니소스는 ‘낭만주의적’이라고 묘사되곤 한다.

제우스와 인간 여인 세멜레의 아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가 인간 여인을 사랑하여 얻은 자식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존재는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 그리스 로마신화의 공식이다. 그런데 디오니소스는 처음부터 신으로 추앙받았다. 인간의 피가 섞였지만 신의 계보에서 성골에 해당하는 올림포스 12신의 반열에 오른 것은 디오니소스가 유일하다. 그의 혈통에 대해서는 지난 3월호 ‘제우스의 여인들’편에서 다룬 바 있지만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매혹적인 여인이 보이면 어디라도 달려가는 제우스는 테베 공주 세멜레를 사랑하여 임신시킨다. 질투심을 참지 못한 헤라는 세멜레에게 접근해 “제우스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마땅히 신의 제왕으로서 본래 모습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며 의심을 불어넣는다. 이에 세멜레는 바가지를 긁기 시작한다. 제우스는 본 모습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천둥과 번개이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고 손사래 친다. 그러나 이미 세멜레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기로 약속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번개의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다. 세멜레의 몸에는 곧 화염이 일었고, 제우스는 재빨리 그녀 뱃속에서 6개월 된 아이를 꺼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었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몸에서 남은 개월을 채우고 나온다. 즉, 모친은 인간이지만 최고신 제우스가 직접 낳은 아들이니 신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헨델의 오페라 ‘세멜레’(1744)는 세멜레의 사랑과 의심, 슬픈 죽음을 거쳐 디오니소스의 탄생으로 끝나는데, 제우스와 세멜레의 이야기를 앞으로 다루게 될 ‘프시케와 에로스 이야기’에 접목시켰다. 세멜레의 자매 이노(사실은 이노로 변장한 헤라)가 비밀의 궁전을 방문하여 세멜레의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점도 프시케 신화와 거의 같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 3막 3장에서 제우스가 불에 타 죽은 세멜레의 재로부터 새로운 술의 신이 탄생했음을 선언하는 것이 전부다. 헨델의 ‘세멜레’에서 올림포스 신의 이름은 전부 로마식으로 표기된다. 유피테르는 제우스, 유노는 헤라, 바쿠스는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와 연인 아리아드네를 다룬 오페라

제우스는 엄마 잃은 디오니소스의 양육 문제를 똘똘한 전령 헤르메스에게 일임했고, 헤르메스는 다시 세멜레의 누이인 이노 부부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헤라가 이노를 비극에 이르도록 괴롭히자 제우스는 아들을 새끼 산양으로 변신시켜 님프들이 몰래 키우도록 했다. 디오니소스는 님프들과 니사산이라는 곳에서 지냈는데, 이곳에서 포도의 재배와 양조법에 통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포도주 때문에 이성 마비, 도취와 광기, 본능과 욕정, 황홀경 등의 속성이 디오니소스에게 더해지는데, 이를 헤라의 저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신들의 어머니인 레아가 미치광이 디오니소스를 구원하여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한다. 오랜 여정 끝에 모친 세멜레의 나라 테베에 도착한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축제인 바카날리아(바카날레)를 연다. 바카날리아는 로마식 이름인 바쿠스와 연결되는 말로서 술과 춤이 더해진 잔치다. 그렇지만 요즘처럼 우아하게 마시는 와인 파티가 아닌, 거의 광기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포도주를 마셔대는 타락한 행사를 의미한다.


▲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J.Kat

바카날리아 음악은 오페라에 종종 삽입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1877)’ 3막 2장에 등장하는 발레 음악이다. 다간 신전에서 벌어진 이교도의 축제에 아라비아풍의 이국적 선율이 점점 열광적으로 부풀어 오르고, 반나체의 무용수들이 에로틱한 춤의 향연을 펼친다. 프레더릭 애슈턴의 발레 ‘실비아(1952)’ 3막 도입부에도 ‘바쿠스의 행진’이란 장면이 나오지만, 이것은 바카날리아가 아니라 연극 등이 포함되는 디오니소스 제전의 웅장한 음악이다.

디오니소스의 연인으로는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가 가장 유명하다. 아리아드네는 아테네 시민들이 크레타 왕궁의 미로 속 괴물 미노타우루스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것에 분개한 테세우스에게 반해 그가 괴물을 죽이고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함께 탈출하여 낙소스 섬에 머물던 중 테세우스에게 버림받는다. 실의에 빠진 아리아드네 앞에 나타난 것이 디오니소스다. 인간 테세우스 대신 신의 사랑을 얻은 아리아드네는 기꺼이 디오니소스와 결혼한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의 결혼은 포도주의 신이라는 속성에 잘 어울리지 않으며, 디오니소스 신화에서는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 오페라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Palm Beach Opera

20세기 작곡가로는 이례적으로 그리스 로마신화를 즐겨 채택한 R. 슈트라우스는 오페라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1912)’에서 극중극의 일부로 이 이야기를 다루었다. 여기서도 디오니소스는 바쿠스로 등장한다. 바쿠스는 남자를 유혹하여 돼지로 만들어버리는 마녀 키르케의 섬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쳐 낙소스섬에 도착한다. 테세우스를 잃은 슬픔에 죽어버리려던 아리아드네는 죽음의 사자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게 다가간다. 정신을 차린 바쿠스 또한 아리아드네가 키르케와 같은 마녀인가 의심했으나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아리아드네가 기꺼이 죽음의 신에게 다가가는 마음으로 그의 품에 안기자 바쿠스는 그녀를 안아 일으켜 조용히 입을 맞춘다. 이윽고 아리아드네의 가슴에는 죽음의 상념이 사라지고 삶의 기쁨이 다시 눈을 뜬다. 바쿠스 역시 사랑의 기쁨에 들떠 그녀를 동굴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카라바조(1571~1610)가 그린 ‘바쿠스’와 ‘병든 바쿠스’를 비롯해 여러 회화에 묘사된 디오니소스의 모습은 소년인 경우가 많지만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서 바쿠스는 아름다운 미성이 아니라 헬덴테너에게 어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를 자랑해야 한다. 아리아드네가 영웅 테세우스를 단번에 잊게 할 만큼 초영웅적인 존재가 바쿠스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사이드웨이’ 속 초식남

술에 젖어 살며 광기의 신이라 여겨지지만 디오니소스는 다른 신과 비교할 때 정욕의 화신이라고 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어린 신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대신 그가 끌고 다니는 무리들의 성향을 보면 심각하다. 사티로스는 상체가 인간, 하체는 말 또는 염소인 반인반수의 무리인데 늘 발기한 남근을 달고 다닌다. 포도원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알려진 프리아포스 또한 초인적으로 거대한 남근이 상징이다. 목신 판 역시 님프들을 쫓아다니는 호색한으로 기억된다. 디오니소스를 신으로 추종하는 여신도들인 마이나데스는 속살이 비치는 얇은 천만 두른 채 신들린 모습으로 돌아다닌다.

영화 ‘사이드웨이(2004)’가 이런 상황을 아주 잘 상징화했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2002)’의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코미디-드라마 필름이면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 걸작으로 인정받아 2004년 개봉한 영화 중 최고라는 극찬을 받았다. 2008년 영국의 영화 매거진 ‘엠파이어’지는 역대 500대 영화 리스트에 올리기도 했다. ‘사이드웨이’는 미국 와인의 90%를 생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지역 샌타 바버라 카운티의 샌타 이네즈 밸리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로드무비다. ‘사이드웨이’란 옆길, 혹은 샛길이란 뜻인데, 인생에서 여행의 의미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운치 있는 산책일 수 있지만 너무 샛길로 빠져버리면 골치 아픈 결과를 빚기도 한다.

또한 와인 그 자체를 중요 소재로 삼은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유럽의 정상급 정통 와인과 자웅을 겨루는 최고의 캘리포니아 와인을 만드는 농장들은 샌타 바버라 카운티보다 북쪽인 나파 밸리와 서노마 밸리에 집중되어 있지만,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샌타 이네즈 밸리에 수많은 와인 애호가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열렬한 와인 애호가인 40대 중년 마일스 레이먼드는 영어교사이자 자기 소설을 출판하는 것이 꿈인 무명의 작가다. 한편으론 이혼한 아내 빅토리아에게 여전히 미련을 품고 있는 탓에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대학 시절 룸메이트이자 한물간 배우인 잭 콜과 일주일간의 여행길에 나선다. 명목은 다음 토요일에 늦깎이 결혼을 하는 잭과의 우정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마일스 입장에서는 와인 농장을 돌며 좋아하는 와인을 실컷 마시고자 하는 것이고, 여자 밝히기가 심한 잭으로서는 결혼 전에 남은 일주일을 이용하여 여행길에 만날 미지의 여자들과 맘껏 육체의 향연을 즐겨볼 심산이다. 샌타 이네즈에서 잭은 마일스가 알고 지내는 식당의 고상한 웨이트리스 마야를 보더니 마일즈더러 잘해보라고 꼬드긴다. 자신은 와이너리 직원이자 마야의 친구인 동양계 여인 스테파니를 유혹하는데, 코앞에 닥친 결혼식에도 불구하고 너무 깊이 빠져버리고 만다.

이제 잭의 결혼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마일스가 소장한 최고 와인인 1961년산 샤토 슈발 블랑은 그의 사랑을 이루게 하는 최적의 용도에 사용될 수 있을까? 영화의 두 커플은 무척 대조적이다. 마일스는 이를테면 ‘초식남’(남성성이 뚜렷하지 않고, 자신의 취미 활동에 열성적이지만 연애에는 소극적인 남성)이다. 와인을 사랑하지만 올림포스 신들 사이에서 인간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살짝 따돌림을 당하고 밖으로 도는 디오니소스를 닮았다. 마일스가 잊지 못하는 전처 빅토리아나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여인인 마야도 어느 정도 비슷한 타입이다. 반면 잭은 ‘육식남’(물불 안 가리고 연애에 과도하게 적극적인 남자)이다. 사티로스나 프리아포스처럼 여자를 보면 도덕률보다 본능이 앞서는 남자다. 잭이 매혹당한 스테파니 또한 솔직하고 화끈하기 그지없다.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광적인 여신도 마이나데스를 떠올리게 한다.

글 유형종
발레·오페라·클래식 음악 등 공연 예술 전반에 관한 집필과 해설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무지크바움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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