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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세 현악실
보듬다, 기울이다
글 김선영 기자 10/1/2013 |   지면 발행 ( 2013년 10월호 - 전체 보기 )



악기 소리가 먹먹할 때만큼 연주자로서 답답한 순간이 또 있을까. 어느 연주자에게나 자신에게 잘 맞는 악기를 선별하고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은 늘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뿐 아니라 악기에게도 주치의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악기 제작자 유제세와의 만남은 지난 여름, 대관령국제음악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단은 대관령국제음악제 음악학교 부스를 지나가면서 눈에 들어온 종이였다. ‘유제세 공방 워크숍’. 그날따라 ‘공방’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묘하게 다가왔다. 행여 악기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나 싶었는데, 음악학교 학생들과 대관령을 찾은 연주자들의 악기 수리를 위한 곳이란다. 매년 연주회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살피다 보니 줄곧 있었다는 공방에 시선이 쉽게 가지 않았을 터, ‘그동안 왜 몰랐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윽고 충만한 호기심이 공방으로 발길을 이끌었다.
알펜시아리조트 객실 한 곳에 마련된 공방. 음악학교에 참여 중인 학생 몇몇이 응급처치(?)를 위해 유제세 씨와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소리가 먹먹한 느낌이에요. 그리고….” “연주하기 힘들지 않아요? 브리지가 이 정도면 꽤 어려울 텐데….”
악기 증상에 관한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간다. 이야기를 늘어놓는 연주자의 표정이 어둡다. 그러다 대화가 잠시 멈춘다. 이제 유제세 씨가 악기를 들여다볼 차례다. 그는 첼로의 울림통을 이리저리 누르는가 하면, 브리지를 꺼내 살살 깎아낸다. “습도 때문에 핑거보드나 브리지에 영점 몇 밀리미터의 차이가 생기고 거기에서 소리가 달라지게 돼요.”
서늘한 기온 덕에 여름나기 최고의 장소로 손꼽히는 대관령의 기후도, 현악기에겐 예외다. 산 속이라 온도는 낮지만 습도가 높아 현악기 연주자로선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악기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유제세 씨가 첼로를 주인에게 다시 건넨다. 기다렸다는 듯 악기를 받아든 연주자. 활이 힘 있게 현 위를 오가는 동안 어두웠던 얼굴이 점점 밝아진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 끝에 악기를 메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가볍다. 현악기를 제작하는 것도 그의 임무 중 하나지만, 악기를 수리하고 연주자들의 고충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것 역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다.
스스로를 ‘악기 주치의’라 부르는 유제세 씨가 이 길을 걸어온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1980년대 초 지인과 함께 우연히 들린 현악기 매장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시발점이 됐다. 건축 기사로 살아온 그가 난생처음 들은 바이올린 소리는 ‘나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품게 했다. 처음에는 주말마다 악기점에 나가 악기 만드는 것을 배워나갔다. 그도 가족들도 취미로 생각할 때였다. 3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의 손에는 실제 첼로를 꼭 닮은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의 첼로 하나가 쥐어졌다. 다른 일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보람과 감동이 그를 에워쌌다. 존재의 가치 그 이상을 만들어냈다는 기쁨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악기 만드는 데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며 만류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악기 제작에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그 이후 집 한 편에 작업실을 만들어 3년간 홀로 바이올린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소개를 받아 악기를 수리하는 일들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던 중 악기를 맡긴 한 연주자가 그의 학벌을 이유로 수리를 취소하는 일이 생겼다. 충격도 컸지만, 스스로 제대로 된 악기 제작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더 공부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당시 삼십대 중반의 늦은 나이임에도 그는 유학길에 올라 독일의 유명 공방에서 악기 제작부터 수리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배워나갔다. 마음이 흔들릴 땐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혈서를 쓰는 것으로 다잡았다. 평일이며, 주말마다 공방에 나와 있는 모습에 스승은 공방 열쇠를 그에게 맡기고 책임지게 했다.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4년째 되는 해, 독일에서 공방을 함께 운영하자는 스승의 제안을 만류한 채 그는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서울 서초동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현악실을 열었다.
규격과 공식이 정해진 악기 제작과 달리 악기 수리는 정해진 답이 없다. 문제가 생겨서 들어오는 악기들도 예측 불가능하거니와, 종류뿐 아니라 재료와 부위마다 수리가 다르고, 악기 제작자마다 수리하는 방식 또한 달라서다. 게다가 경험과 연륜 없이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악기 수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이든 노력하면 된다’라는 심정으로 나무를 깎고 악기를 만져온 그간의 시간들은 그의 곁에서 신뢰라는 이름으로 빛나고 있다. 그 신뢰는 작업실 벽 한 곳에 걸려있는 바이올니스트 정경화의 사진에 담긴 메시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5년 전 리사이틀 투어 중 갑작스러운 악기 수리로 인연을 맺은 정경화는 지금까지도 유제세 씨를 악기 주치의로 삼고 있다. 실력과 신뢰가 있었기에 이뤄질 수 있었던 인연이다.
인터뷰 말미, 유제세 씨는 “인내하는 것,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어렵고, 또 중요하다”라는 말을 건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인정받는 현악기처럼 오늘도 그는 겸허한 마음으로 악기를 보듬고 그 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문의 02-514-2702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대관령국제음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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