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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을 타고 흐르는 바람 소리 '청성곡'
해금 연주자 꽃별의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 ④
글 꽃별(해금 연주가) 2/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2월호 - 전체 보기 )



만 개의 파도를 쉬게 하는 소리


▲ 담양 죽녹원

음악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음악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가끔 모든 소리와 선율에 지칠 때가 있다. 힘들었던 어느 날 천국을 맛보게 해준 음악마저 때로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숙명’이라는 것이 지닌 삶의 무게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리라. 살면서 늘 하는 바보 같으면서도 진지한 질문이 있다.

‘이렇게 열심히 한들, 베토벤보다 좋은 곡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끊임없이 걷는 것일까?’

이럴 때 나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그래서 나를 쉬게 하는 소리가 있다. 만 가지 파도를 쉬게 하는 소리,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문왕이 제31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라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창건했다. 다음 해 5월 초하루,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있었는데,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와 물결에 따라 오가고 있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점을 쳤다.

“거룩하신 선왕께서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분으로 이제 이 신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킬 보물을 내리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행차하여 살펴보았다. 산의 모습은 마치 거북이 머리 같았고 그 위에는 한 줄기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

“이 산의 대나무가 갈라지거나 합해지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용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합해진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거룩하신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왕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오색찬란한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했다. 그리고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자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다.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비에 젖은 대숲을 걷다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은 소리도 다르다. 솔숲에서는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대숲에서는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니 당연한 말이다. 비가 오는 날은 또 다른 소리가 난다. 젖은 잎들 사이로 청량하게 흐르는 쏴르르 바람 소리, 빗방울이 타르르 떨어지는 소리, 무거워진 댓잎이 서로 닿으며 후드득 스치는 소리… 모두 고요한 가운데 끊임없는 소리들을 만들어낸다.

어릴 적 살던 거제도의 집은 논두렁을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가면 나왔다. 하얗게 칠해진 집 뒤에는 작은 대숲이 있었다. 동생과 둘이 툇마루에서 놀다가 바라보면 멀리 대나무 꼭대기가 흔들렸다. 그렇게 나무 꼭대기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나무 꼭대기에서 먼저 바람이 일고, 한번 시작된 바람은 작은 대나무 숲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아주 차갑고 맑은 소리였다. 작은 귀에도 그 소리는 청량했다. 첫눈이 내린 겨울 새벽에 얼어붙은 깨끗한 물처럼 시리고 고요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대숲을 좋아했다. 대낮에도 대숲을 들여다보면 속은 아주 깜깜했고, 숲 근처에서 뛰어놀다가 대나무에 뺨을 대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시원하고 매끄러웠다. 여름에는 동생이랑 각자 이름을 붙인 나무를 정하기도 했다.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나무에 이름을 붙이고 돌봐주자고 했다. 아주 작은 나무를 골랐는데도 금세 키가 컸다. 그렇게 잘 자라는 나무가 신기했다. 다른 나무들은 구불거리고 가지마다 굵기도 제각각인데, 대나무는 한결같은 모양으로 자라는 것도 신기했다. 속이 빈 것도, 나이테가 없는 것도 신기했다. 대나무는 단순하게 생겼는데도 전혀 단순하지 않은 희한한 나무였다. 그런 대나무가 좋았다.

담양 죽녹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비가 꽤 많이 오는데도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대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대나무의 기운 때문인지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우산을 나눠 쓰고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비 맞은 대나무들이 사람들에게 뭔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처럼, 대숲은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잘 만들어진 숲에는 여러 개의 오솔길이 나 있었다. 가끔 아주 작은 길로 들어서면 무척 적막하고 캄캄했다. 길은 열려 있었지만 하늘 쪽 나무들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숲속은 캄캄한 것이겠지. 그리고 땅속의 뿌리는 다시 이어져 있을 터였다. 땅 위로 드러난 대나무 뿌리에는 매듭이 많았다. 대나무 밑동에는 새들이 모여 살았다. 그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숲에서도 부딪히지 않고 새끼들이 있는 집을 잘 찾아들었다. 비가 오니 더 신난 듯 시끄럽게 재재거리며 바쁘게 나무 사이를 오갔다.

대나무는 일생에 한 번 꽃을 피운다고 한다. 땅속줄기의 모든 양분을 끌어올려 꽃을 피우고 나서는 생을 마친단다. 60~120년 만에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다니 정말 귀한 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나무 한 그루에 꽃이 피면 주변의 모든 대나무가 따라서 꽃을 피운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심어진 이유도 있고, 뿌리를 길게 뻗어 먼 곳에 또다시 죽순을 틔우는 특성 때문에 멀리 떨어진 여러 그루가 한 몸인 까닭이기도 하다.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대숲의 나무들은 한 번에 꽃을 피우고 또 같이 죽는다. 한 장소의 대나무들이 한 번에 꽃을 피우고 죽는 것은 장엄하고도 서늘한 죽음일 것이다. 대나무꽃의 모양이 궁금해 찾아봤더니, 꽃이랄 것도 없는 뾰족한 새 부리 같았다. 별 장식도 없지만 일생에 한 번만 핀다는 귀한 꽃은 역시 대나무꽃다웠다.


▲ '죽하병호도'의 일부

바람에 귀를 기울이다

대나무는 1억 5000만 년 전부터 지구에 살았다고 한다. 대나무는 봄에 일단 죽순이 나오면 6~8주 안에 다 성장한다. 우후죽순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빠르게 자라는 것이다. 나무이기도 하고 풀이기도 하며, 쓰임새도 셀 수 없이 다양하다. 탄성이 있으면서도 단단하고, 얇게 쪼개지면서도 마디가 있어 매듭을 지을 수 있다. 속이 비어 있으므로, 뭔가를 채워 넣거나 물을 흐르게 할 수도 있다. 대나무로 집을 지어 살고, 낚싯대를 만들어 먹고, 바구니를 짜서 담고, 구멍을 뚫어 불었다. 또한 고대에는 대나무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니까 대나무는 여러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아주 독특한 식물이다. 때문에 많은 상징이 되기도 한다. 곧게 자라는 특징 때문에 지조 있는 선비를 상징했으며, 대쪽 같은 기질은 절개와 정절을 상징했다. 고대 중국의 유교에서는 아버지를 상징했고, 그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득도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속신앙에서는 대나무를 신령스러운 나무로 여겨 무속인이 머무는 집에는 대나무를 세워두기도 했다. 또한 대나무에는 불교적 의미도 투영되어 있다. 명상과 자비의 장소에 대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다. 선비들이 사랑한 대나무는 옛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중 김홍도·임희지의 ‘죽하맹호도’가 떠오른다. 위쪽 바위에는 밑동이 구부러진 채 위로 자라난 대나무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잎이 그려 있다. 그리고 그 아래는 호랑이가 걸어 나오는 듯 그려 있다. 대나무는 임희지 작품이고, 호랑이는 김홍도 작품이다. 두 사람은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세상을 나누어 호령했다.

입으로 대나무 관에 바람을 불어넣어 갈대 속으로 만든 얇은 막인 청을 떨리게 함으로써 소리를 내는 대금. 그 소리는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를 닮았다. 세상의 수많은 관악기 중 청공을 뚫고 그곳을 얇은 갈대 속으로 막아서 소리의 색깔이나 연주의 다이내믹을 만들어내는 악기는 대금이 유일할 것이다. 때문에 대금만의 특별한 소리의 질감을 들을 수 있다. 속이 비칠 정도의 얇고 팽팽한 청이 숨의 유연함이나 거에 따라 파르르 떨린다. 그 떨림이 소리가 되어 관을 타고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대나무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청량하다.

대금 곡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청성곡’이다. ‘청성곡’은 대금 곡 중에서 가장 운치 있고도 적막한 감상을 일으킨다. 가곡 ‘태평가’를 변주한 곡이지만 들어보면 원곡의 자취를 거의 느낄 수 없고, 연주자마다 가락을 맺는 방식, 선율을 떨어뜨리거나 소리를 쳐올리는 지점 등이 다 다르다.

대학 교수님이었던 박용호 선생님 생각이 난다. 겨울방학 때였고, 연습이 있어 학교에 갔다. 전날부터 계속 눈이 펑펑 와서 학교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였고 야트막한 언덕과 벚나무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연습실 가는 길옆에 본관이 있었고, 거기 2층이 교수실이었다. 총총거리며 뛰어가고 있는데 대금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너무나 맑아 오히려 실체가 없는 것만 같은 음악이었다. 아름답지만 만지면 사라져버리는 눈처럼, 뺨에 느껴지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한번 들으면 다시 들을 수 없는 소리 같았다고 할까. 하얀 세상 속에서 듣는 박용호 선생님의 ‘청성곡’은, 정말이지 ‘마음의 모든 파도를 잠재우는 대금 소리’였다.

바람은 천 개의 얼굴을 가졌다. ‘청성곡’에서의 대금 소리가 그 바람과 이어진다. 어느 날엔가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난다면 귀를 기울여보시길. 대숲에 부는 바람은 대금 소리를 품고 있을 테니까. (다음 편에서는 강원도 정선에서 이야기를 전합니다.)


QR코드를 통해‘청성곡’을 감상해보세요

글 꽃별 

해금 연주자 꽃별은 경계를 허무는 평화로운 음악을 꿈꾼다. 해금으로 세상의 수많은 삶과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편, 국악방송 ‘꽃별의 맛있는 라디오’를 통해 우리 음악을 전하고 있다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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