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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박세은
파리의 중심에서 날개를 펴다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2/1/2016 |   지면 발행 ( 2016년 2월호 - 전체 보기 )




▲ ⓒAnn Ray/Opera national de Paris

2016년 1월, 파리 오페라 발레의 쉬제(Sujet), 박세은과 만나기로 하고 파리에 왔다. 런던에서 유로스타로 건너가는 동안 무대 밖 박세은을 언제 봤는가 생각해보니, 2006년 서울예고 2학년 시절 USA 발레 콩쿠르에 입상한 다음, 삼청공원에 새 옷을 입고 인터뷰를 나온 소녀가 첫 기억이다. 리셉션용 드레스를 어떻게 싸게 샀는지를 이야기하며 활짝 웃던 루키는 이듬해 로잔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산하 ‘ABTII’ 연수를 위해 뉴욕으로 갔다. 그때 미국 소식을 보려면 박세은의 싸이월드 홈페이지를 들락거려야 했다.

2009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박세은을 예술의전당에 문을 연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났다. 마요네즈와 연어 샌드위치의 칼로리 계산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다니, 갑자기 예술의전당 카페가 유럽 어느 발레단의 캔틴 같았다. 박세은의 국립발레단 재직은 예상보다 훨씬 짧았지만 박세은-김기민(현 마린스키 발레 수석무용수)의 앙상블을 주역 캐스트로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박세은은 학교로 돌아가 김용걸의 스타일을 섭렵했고, 해외 오케스트라 공연도 무던히 찾았다. 버스 승강장에 걸린 U사 패딩 광고에 독특한 포즈의 박세은이 있던 때다.

인터뷰 직전, 지하철에서 약속 장소를 바꾸자고 문자를 보내며 파리 시내 라모트 역에서 내리려는데 같은 객차에 박세은이 있었다. 10년 만의 인터뷰여서 반가움이 컸는데, 미소를 짓는 박세은의 미간에는 살구색 테이프가 덧대어 있었다.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알롱제를 시켜준 박세은과 파리의 카페에 마주 앉았다.

코 위의 부상이 심한 것 같다.

아네 테레사 더 케이르스마커르 안무의 버르토크 현악 4중주 4번, 4인무를 준비하다가 부상을 입었다. 동료의 뒷발에 차여 얼굴을 맞았는데, 지혈하는 수건 위로 피가 계속 배어날 정도였다. 동료는 울고, 응급차를 타고 가야 하네 어쩌네 정신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피부가 찢긴 방향이 세로여서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를 수소문했고, 지금은 잘 마무리하고 있다.

아네 테레사 작품엔 어떻게 캐스팅된 건가?

클래스를 하고 있는데 안무가가 나를 보더니 오디션에 넣어달라고 발레단에 요청했다. 뜬금없이 10분 만에 오디션에 들어갔는데, 아네 테레사는 나를 맘에 들어 했다. 안무가가 다문화를 좋아해서 흑인이나 아시아인 댄서를 작품에 자주 쓴다. 뱅자맹 밀피에 단장은 “너, 클래식할래, 컨템퍼러리할래?”라고 무용수에게 의견을 묻곤 하는데, 이때 선택을 잘해야 한다. 컨템퍼러리 발레를 한번 잘하게 되면 캐스팅이 계속 그쪽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그동안 워낙 클래식 발레를 좋아했고 컨템퍼러리 발레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쳤다. 세 명의 동료가 “너 아니면 이 작품 추지 않겠다”고 한 것도 기억난다.


▲ ⓒJulien Benhamou

정단원으로 입단하고 네 시즌을 보내고 있다.

‘파키타’를 제외하곤 나의 경우 같은 작품을 되풀이한 적은 없다. 지난달에 (김)기민이가 파리 오페라 발레에 ‘라 바야데르’ 주역을 하러 마린스키 발레에서 왔다. 1분 30초짜리 바리아시옹을 하는데 저렇게 정확할 수 있을까? 기가 막혔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민이가 저 작품을 얼마나 많이 추면서 저 경지에 올랐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마린스키 발레에는 시클랴로프의 ‘해적’, 김기민의 ‘라 바야데르’ 같은 브랜드가 있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남자 에투알들이 기민이에 비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단지 스타일이 다르다. 그런데 감동을 주는 포인트가 다르더라. 파리 오페라 발레의 레퍼토리는 기본적으로 네다섯 시즌 동안 잘 겹치지 않는다. 전막 레퍼토리가 워낙 많으니까 에투알도 ‘라 바야데르’나 ‘지젤’을 4~5년에 한 번 하면, 같은 작품에 100여 차례의 경험이 쌓인 마린스키 발레 주역처럼 자신감 있게 치고 나가진 못한다. 기본적으로 에투알에겐 모든 작품에 능할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다.

컨템퍼러리에 능한 기량이 우선 프레미에르로 승급하는 데는 장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전통적으로 클래식 발레를 잘해야 인정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바뀐 밀피에 감독의 성향이 중요한 관점으로 자리 잡았다. 감독이 에콜 드 당스나 파리 오페라 발레 경험이 없는 상태라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게 모두의 과제다. 프랑스어를 알지만 뉴욕 시티 발레에서 데려온 지도위원과는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뉴욕 시티 발레 작품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2014/2015 시즌에 비해 이번 시즌은 클래식 발레의 비중도 줄고 박세은의 캐스팅도 늘지 않았다.

클래식 발레 전막이 대여섯 작품에서 세 개로 줄고, 미국 작품이 일곱 개다. 감독과 함께 움직이는 팀이 있는데 그들에게 합류하지 못해 2015년에는 찬밥 신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얻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기다림도 잘 견딜 수 있다. 일 년을 혼자 앓고 고민하다가 밀피에를 찾아갔다. 그런데 면담이 끝나고 바로 다음 날 밀피에 팀에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풀리는 것이었으면 진작 갔을 거라는 후회가 절로 나왔다.

면담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너는 미래의 에투알이다. 나는 너를 키울 것이다. 너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달라”였다. 부상을 당했지만 뼈를 다친 게 아니고 실력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무용수는 160명이고 감독은 하나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브리지트 르페브르 전 단장은 날 뽑아줬다. 미국인이 실력보다 중요하게 두는 가치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을 그전엔 몰랐다. 사람이 머무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르페브르와 오래 함께했던 무용수들의 혼란도 상당하겠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전통이 빛나는 순간은 승급 시험이다. 아무리 그동안 잘했던 무용수라도 승급 시험일에 부진하면 기다렸다가 다시 시험 치르는 체계는 20년 가까운 르페브르의 재임 기간 동안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요즘은 승급 시험에 단장과 함께하는 팀원이 열 표 중 여섯 표를 행사하면 승급이 되는 상황이다. 2015년에는 발란신 스타일에 능할 무용수들이 승급했다. 에콜 드 당스부터 60년 넘게 파리 오페라 발레와 함께했던 노인들, 지금 에투알의 스승들이 시험 당일에 모두 왔다. 그런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승급 결과라고 한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거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클래스에 적응하는 데 어느 정도 걸렸나?

1~2년은 고생했다. 어렵고, 스타일이 달랐다. 기민이를 다시 예로 들면, ‘라 바야데르’에서 루지마토프처럼 손을 뻗으면 파리 오페라 발레에선 안 된다. ‘큐트(Cute)’하고 ‘엘리건트(Elegant)’한 게 중요하다. 파리 오페라 발레에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만 있으면 된다. 내 춤의 DNA가 프랑스와 너무 잘 맞는다.

처음 발레를 시작해 서울예고까지 배운 건 러시아 바가노바 스타일이다.

프랑스와 러시아 스타일이 순서가 좀 다르다. 누레예프 버전 ‘라 바야데르’를 배우면서 기민이가 ‘누나, 이거 왜 이렇게 힘들어?’라고 했다. 프랑스는 스텝이 상당히 많다.

피에르 라코트의 ‘파키타’를 봐도 스텝이 다른 버전보다 복잡하다.

춤 안에 담긴 게 많다. 네 박자에 네 동작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가 개입되어 있다. 그런데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만 또 같다. 좀 더 들어가면 프랑스와 러시아 춤이 다르지 않다. 마린스키에 공연을 갔을 때 스승인 마르가리타 쿨릭이 나를 보고 한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배운 춤을 러시아에서 보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느낌을 보여주자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누엘라 퐁투아를 보면 파리 오페라 발레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춤을 춘다. 춤이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춤은 사람이고 자신의 성격이다. 나라는 사람이 잘 바뀌지 않듯이, 춤도 바뀌지 않는다. 파리에 적응해 이렇게 춰보자고 시도도 해봤는데 결국은 느끼는 대로 추려 한다. 지난 승급 시험도 그런 마인드로 참가했다. 그런데 스승이 극찬하던 퐁투아가 심사위원으로 왔고, 승급 심사에서 나에게 1위로 투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춤 인생에서 후회 없이 잘 춘 적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그때를 꼽겠다.

단원 중에 에콜 드 당스 출신을 알아볼 수 있는 단서는 무엇인가?

남성 무용수의 몸매를 보면 안다. 마티외 가니오를 보면 단적이다. 마티아스 에만의 경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무용수인데, 프랑스 스타일이면서 러시아적인 면이 있다. 나처럼 프랑스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춤은 똑같다고 보는 무용수다. 멀리 가고, 갇혀 있지 않고, 시야가 넓은 타입이다.

주역으로 무대에 섰던 ‘라 수르스’의 안무가, 장 기욤 바는 장점을 어떻게 끌어냈는가?

마티아스와 나의 무용관을 잘 알아보는 안무가였다. 춤을 잘 추는 무용수, 감동을 전하는 무용수가 누군지 잘 잡아내는 사람이다. ‘라 바야데르’의 경우, 나는 언더스터디였는데 주역들이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결국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장 기욤이 지나가면서 “너 그거 왜 안 하니?”라고 상냥히 물었다.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무용수들에겐 호랑이다. 클래스 중간에 휴대폰을 보거나 나간다고 하면, 살짝 웃으면서 상상도 못하는 독설을 짧게 뱉는다. 무용수가 예의가 없거나 춤을 못 추면 자신이 열 받아서 나가버린다. 파리 오페라 발레에 들어오고 나서 모두 그랬다. 발레에 대한 모든 게 궁금하면 백과사전 장 기욤에게 가라고. 준단원 때는 프랑스어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바쁘다고 지나쳤고, 4년 동안 클래스에서 아무 이야기도 안 했는데 나에게 ‘라 수르스’ 주역을 줬다. “4년 동안 너를 지켜봤고, 실력을 알게 됐다”고. 그때부터 다정하게 이야기해줬다.

앞으로 한국에서 춤을 볼 기회는 언제인가?

예전 단장은 갈라 참가도 엄격히 제한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좋은 기회가 있으면 한다.

사진 Opéra national d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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