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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맨시니 ①
하종욱의 20세기 클래식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 9/1/2015 |   지면 발행 ( 2015년 9월호 - 전체 보기 )



미국 컨템퍼러리 음악을 완성하다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는 그의 음악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

가난한 이민자 출신으로 20세기 미국 컨템퍼러리 음악을 완성한 그의 음악 일대기.

지인 중에 아주 독특한 삶의 모양을 지닌 사람이 있다. 그는 유명한 기업의 CEO이면서, 한편으로는 무명의 연주자임을 즐기는, 익명의 인물이다. 그는 회사 업무차 밀라노 박람회에 참가하는 동안에도 낮에는 비즈니스 미팅을 하고, 밤에는 아코디언 연주자로 변신한다. 지난 4월 어느 일요일 오후, ‘밀라노에 와 있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로 시작된 그와 나눈 3시간여의 음악적 수다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문자 메시지를 통한 대화의 절반은 미국의 팝 음악, 그리고 헨리 맨시니(Henry Mancini)에 관한 토론이었다. 미국의 음악대학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전공한 그의 지론은 이랬다. 헨리 맨시니야말로 미국 컨템퍼러리 음악의 완성체이며, 이탈리아 팝 음악과 재즈를 가미한 그의 영화음악이 곧 20세기 음악의 가장 현대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까지 연재된 ‘20세기 클래식’의 리스트에 헨리 맨시니가 없음이 심히 유감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는 헨리 맨시니의 음악적 핵심을 서정과 낭만, 세련미라고 정의하며, 이는 헨리 맨시니의 피에 흐르는 이탈리아 민속음악의 감수성과 미국 음악의 포용력이 화학적으로 결합된 것이라 분석했다.

어느 기업가이자 연주자와 나눴던, 자못 진지하던 문자 메시지 후에 헨리 맨시니의 작품을 새로이 들어봤다. 헨리 맨시니를 칭송하던 그의 논거는 옳았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의 영화음악과 팝 음악이 드리웠던 서정과 낭만, 클래식 음악·재즈·이탈리아 팝 음악의 공존, 그리고 섬세하고 드라마틱한 작법은 헨리 맨시니에 의해 온전한 꼴을 갖추게 됐다. 1960년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황금기를 열었던 헨리 맨시니의 색채감은 이후의 영화음악과 팝 음악에 풍부한 영향력으로 남아 있다. 이로 인해 헨리 맨시니는 50여년의 활동 기간 동안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에서 총 18회 노미네이트와 4회의 수상, 그래미 어워드에서 총 72회 노미네이트와 20회의 수상 기록을 남겼으며, 1995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의 주인공으로 헌액됐다.

‘리틀 이탈리아’의 음악가

헨리 맨시니의 본명은 엔리코 니콜라 헨리 맨시니(Enrico Nicola Henry Mancini)로, 1924년 4월 16일 미국 클리블랜드에 자리한 ‘리틀 이탈리아’라 불리는 이탈리아 이주민 거주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이민자였으며, 아버지 퀸토 맨시니는 철강 노동자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헨리 맨시니는 아버지가 직장을 피츠버그에 인접한 철강 단지로 옮기는 바람에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웨스트 알리퀴파 지역에서 보냈다. 피콜로와 플루트를 연주하던 아버지의 지도 아래 8세 때부터 플루트를 익혔으며, 12세가 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맨시니 부자는 아버지가 플루트를 연주하고 아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탈리아의 아들들(Sons of Italy)’이라는 이탈리아 이주민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헨리 맨시니는 1942년 알리퀴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는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일 년 남짓 수학한 후, 미 육군 보병으로 군복무를 하게 된다. 이후 보직을 옮겨 1945년까지 육군 군악대의 연주자·편곡자로 근무했으며, 제대 후에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음악 산업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첫 번째 직장은 1946년부터 몸담은 글렌 밀러 오케스트라였다. 글렌 밀러 오케스트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재즈 빅 밴드 리더 글렌 밀러가 세상을 떠난 이후 재편된 오케스트라였다. 그는 이곳에서 피아니스트 겸 편곡자로 활동하는 한편,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에른스트 크레네크,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 마리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와의 교류를 통해 현대음악의 다양한 작법과 대위법, 화성적 체계를 익히며 음악적 관점을 확장해나갔다.


▲ 영화 ‘글렌 밀러 스토리’ 포스터

글렌 밀러 오케스트라에서의 경험에 혁신적인 스승에게서 받은 음악적 감화가 더해졌지만, 헨리 맨시니의 20대 초·중반은 ‘장미의 나날들’이 되지 못했다. 1952년, 28세 헨리 맨시니의 새로운 직장은 메이저 영화사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전업 작곡가였다. 그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재직한 6년 동안 100여 회의 영화음악 작업에 참가했으며, 제임스 스튜어트·루이 암스트롱이 출연했던 ‘글렌 밀러 스토리’를 통해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에 첫 번째로 노미네이트됐다. 하지만 베니 굿맨이 직접 출연한 ‘베니 굿맨 스토리’와 오손 웰즈의 명작 ‘악의 손길’을 제외하고는 헨리 맨시니의 작곡이 부각되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블레이크 에드워즈와의 만남

1958년 여름, 헨리 맨시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해고 사유는 히트곡의 부재였다. 실직의 아픔을 경험한 비극적인 그날은 헨리 맨시니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는 행운의 날이기도 했다. 해고 통보를 받고 헨리 맨시니가 향한 곳은 사내 이발소. 비통한 심정으로 습관처럼 머리를 다듬기 위해 들른 이발소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내가 있었다. 영화감독이자 TV 드라마 연출가인 블레이크 에드워즈(Blake Edwards)였다. 줄리 앤드류스의 남편이자 훗날 헨리 맨시니와 공동 작업하여 ‘피터 건’ ‘티파니에서 아침을’ ‘술과 장미의 나날’ ‘핑크 팬더’ ‘밀애’ 등 히트작을 양산하며, 2004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에 헌액되는 인물이다. 블레이크 에드워즈와 헨리 맨시니는 1957년 ‘미스터 코리’라는 작품에서 함께한 경험이 있었다. 블레이크 에드워즈는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TV 시리즈물의 음악 작업을 헨리 맨시니에게 의뢰했다. 헨리 맨시니는 주저하지 않고 제의를 받아들였다.

블레이크 에드워즈가 헨리 맨시니에게 건넨 새로운 TV 드라마는 ‘피터 건’이었다. 1958년 9월 22일, 미국 NBC 방송국에서 초연된 ‘피터 건’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NBC TV와 ABC TV를 통해 3개의 시즌, 114화의 에피소드를 방영한 이 TV 드라마의 주인공은, 쿨 재즈와 칵테일을 즐기는 매력적인 사립탐정 피터만이 아니었다. 헨리 맨시니가 엮어낸 단정한 선율의 쿨 재즈 풍의 주제 음악과 긴박한 스릴러와 액션을 묘사한 리드미컬한 사운드는 이 드라마의 성공을 견인한 배후의 주역이었다. 헨리 맨시니의 감각적인 음악은 순식간에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았고, RCA 레코드에서 발매된 사운드트랙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피터 건’의 성공, 그리고 헨리 맨시니에 대한 찬사는 블레이크 에드워즈-헨리 맨시니 콤비의 후속작들의 성공을 예견하고 있었다.

헨리 맨시니와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협력 체계는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 한층 위력을 발휘했다. 둘의 6번째 공동 작품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한없이 서정적이고, 친근하고, 낭만적인’이라는 수식이 뒤따르는 헨리 맨시니의 작풍을 세상에 인식시켰다. 오드리 헵번과 조지 페퍼드가 주역을 맡은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를 지배한 일등공신은 헨리 맨시니가 뿌려놓은 서정과 낭만의 음악이었다. 특히 오드리 헵번이 창가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Moon River’는 미국영화협회가 선정한 영화음악 100선에서 4위에 기록된, 20세기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됐다.


▲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중 오드리 헵번이 ‘Moon River’를 부르는 장면

‘Moon River’는 세기의 여우 오드리 헵번의 크고 맑은 눈망울이 그려낸 작품이었다고 헨리 맨시니는 말했다. 오드리 헵번은 촬영이 끝난 뒤 헨리 맨시니에게 감사의 편지를 직접 보냈으며, “음악이 없는 영화는 연료 없는 비행기와 같다”라며 이 위대한 곡에 경의를 표했다. 헨리 맨시니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한 작사가 조니 머서(Johnny Mercer)의 애틋한 노랫말이 더해진 ‘Moon River’를 통해 영화는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음악상과 주제가상을 석권했다. 그해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후보에는 헨리 맨시니가 작곡을 맡은 ‘천국의 독신남’이 함께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1960년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황금기를 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이은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후속작에도 헨리 맨시니는 함께했다. 1962년작 ‘엑스페리먼트 인 테러’에 감돌았던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에 딱 어울리는 작곡이었다. 같은 해 개봉한 블레이크 에드워즈 연출의 ‘술과 장미의 나날’은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다. ‘Moon River’를 함께 빚은 헨리 맨시니와 조니 머서는 잭 레먼의 알코올 중독자 연기가 돋보였던 영화에서 ‘The Days of Wine and Roses’이라는 또 하나 명곡을 탄생시켰다. 헨리 맨시니의 트레이드마크인 재즈가 곁들여진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시 한 번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미국 작가주의 영화의 거장 하워드 혹스 감독의 1962년작 ‘하타리’에서는 재즈풍 관악 앙상블로 그려진 ‘Baby Elephant Walk’가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아기 코끼리의 뒤뚱거리는 걸음을 리듬과 앙상블로 앙증맞게 표현한 소품은 그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기악 편곡상을 수상했다.

1963년은 헨리 맨시니에게 실로 풍요로운 한 해였다. 1961년과 1962년 연이어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석권한 헨리 맨시니를 향한 러브콜이 줄을 이었다. 1963년에 헨리 맨시니의 선택은 ‘샤레이드’였다. 뮤지컬 영화의 거장 스탠리 도넌이 감독을 맡고, 오드리 헵번과 캐리 그랜트가 주연한 영화에서 헨리 맨시니·조니 머서 콤비는 또 한 편의 걸출한 영화 주제곡 ‘Charade’를 선보였다. 비록 3년 연속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 부문에 후보로 올라 경합을 벌인 것만으로 헨리 맨시니는 1960년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라는 평가를 획득하기에 충분했다.


▲ ‘피터 건’ OST 음반 커버

1963년 블레이크 에드워즈가 새로운 TV 시리즈물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헨리 맨시니의 탁월한 음악적 영감과 감각이 필요했다. 1963년부터 1993년까지 총 8편의 시리즈로 제작되어 공전의 인기를 누린 코믹 탐정 시리즈의 대명사 ‘핑크 팬더’였다. 이 TV 시리즈물의 인기를 이끈 것은 피터 셀러스의 코믹한 연기, 분홍색 표범으로 대변되는 애니메이션 외에도 이 영화의 역동성과 유쾌한 상상력을 음표로 피워낸 헨리 맨시니의 주제곡이었다. 관악기의 생동감과 탄력, 유머와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펼쳐진 리듬과 하모니는 금세라도 화면을 뚫고 뛰어나올 것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블레이크 에드워즈와 헨리 맨시니의 공조는 알프레드 히치콕·버나드 허먼, 스티븐 스필버그·존 윌리엄스의 동맹에 버금가는 영화음악사의 위대한 만남이었다. 30여 년간 35편의 작품을 통해 두터운 우정을 나눈 두 사람은 ‘영상과 음악이 일체화된 드라마’를 구체화했다.

1960년대, 헨리 맨시니는 위에 언급한 명작들 외에도 ‘그레이트 레이스’(1965), ‘아빠, 전쟁에서 무슨 일이?’(1966), ‘파티’(1968) 등에서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을 도왔다. 또한 하워드 혹스 감독의 ‘가장 좋은 남성용 스포츠’(1964), 스탠리 도넌 감독의 ‘아라베스크’(1966), ‘언제나 둘이서’(1967)를 비롯해 ‘어두워질 때까지’(1967), ‘미 나탈리’(1969), ‘시카고 시카고’(1969)를 통해 멜로·코미디·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에 걸맞은 신선한 작곡으로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황금기를 견인했다. 1969년 6월에는 니노 로타가 작곡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곡을 오케스트라에 맞춰 편곡·연주하여 2주간 빌보드 팝 차트 1위에 오르는 특별한 순간도 있었다.(다음 편에 계속)

글 하종욱

하종욱은 “좋은 음악에는 장르와 경계의 구분이 없음을 신봉하는” 음악 칼럼니스트다. 공연 및 음반 기획, 연출, 제작, 평론, 강의 등 음악과 이웃한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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