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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증언’&게르기예프/마린스키 오케스트라 DVD
인간 쇼스타코비치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9/4/2015 |   지면 발행 ( 2015년 8월호 - 전체 보기 )




▲ 쇼스타코비치와 미망인 수핀스카야

“남편은 오랫동안 아팠어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작곡했고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장례식에 대해서는 글쎄요. 말하기가 좀 그렇네요. 공식적 장례식이 있었고 추도식이 거대하게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촛불을 갖다 바쳤고 그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됐습니다.”

2003년 1월, 40년 만의 혹한이 몰아친 모스크바 브류소프 거리에 있는 자택에서 필자는 쇼스타코비치의 미망인 이리나 수핀스카야 여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쇼스타코비치가 1962년부터 살았던 이 집은 현재까지 그의 모든 유품이 고스란히 정리된 채 부인이 지키고 있다. 그녀는 고인의 말년에 대한 기억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장례식에 대한 구체적인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75년 8월 14일, 러시아 예술을 책임진 거장들이 한데 묻힌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는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을 비롯한 당 간부들로 인산인해였다. “까마귀 떼가 몰려들었구먼.” 솔로몬 볼코프의 회고록 ‘증언’에 따르면, 친구의 관 주변에도 못 가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한 음악가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까마귀 떼’는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음악을 이용하고, 비난하며 출세가도를 달린 비열한 정치가들이었다.

“스탈린에 대한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KGB(국가보안위원회)에 의해 끌려갔고 아주 오랜 세월 수용소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젊은 새댁이었지요. 남편도 항상 체포의 위협 속에 살아야 했어요. 주위 사람 모두가 잡혀가는 상황이었답니다. 삶 자체가 힘든 시기였습니다.”

스탈린에 대해 말할 때는 목소리 톤이 갑자기 올라갔다. 1934년에 태어난 수핀스카야 여사는 음악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던 1964년, 전 부인과 사별한 쇼스타코비치를 만나 결혼했다. 작곡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던 2006년 1월, 모스크바에서 다시 만난 미망인은 남편의 사진과 음악 자료가 담긴 CD를 건네주며 어렵사리 남편의 회고록을 쓴 볼코프에 대해 말을 꺼냈다.

1979년 서방에서 책이 출간됐을 당시 구소련은 아직도 서슬 퍼런 브레즈네프 치하의 장막이었다. 볼코프가 단지 남편을 서너 차례 만났을 뿐이라고 반박하던 유명한 인터뷰에 대해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에둘러 말했다. 1981년 서독으로 망명한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막심이 볼코프의 책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찬사를 던졌지만, 만약 그가 조국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증언’에 대한 논란은 이데올로기와 이에 맞춰 살아야 하는 비정한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영화 ‘증언’ DVD 토니 팰머(감독)/루돌프 바르샤이(지휘)/런던 필하모닉 외 Aulos Media ADVD 065 (NTSC, Stereo, 16:9, 151분)

1988년 구소련과 서방의 해빙기에 개봉한, 볼코프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쇼스타코비치 전기 영화가 충실한 한글 자막으로 무장하고 국내에 출시됐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화는 온통 잿빛이다. 막이 오르면 브라스밴드 버전의 쇼팽 ‘장송행진곡’을 배경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장례식 장면이 나온다. “의미 없는 쓰레기들…. 보라, 까마귀들이 여기 있다.” 영화 역시 책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을 까마귀 떼로 묘사하는 빈정거림으로 시작한다. 화면 한쪽에 미망인 수핀스카야의 모습도 잠깐 비친다.

“까마귀들이 몰려올 것 같군. 스탈린이 나에게 먹인 생석회가 피에 가득하네. 이제 더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기를…. 부디 음악만….” 영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인간 쇼스타코비치의 독백은 처절하다. 끝내 피아노 협주곡 2번 느린 템포의 악장이 들려온다. 이내 화면을 가득 채운 쇼스타코비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안경 너머 눈물이 흐른다.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지독한 슬픔이 밀려온다. 이보다 앞서 한 여인이 길거리에서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 내 남편, 내 아들을 본 적이 있나요?”라며 절규할 때,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쇼스타코비치를 보며 관객은 비정함보다는 연민을 느낀다. 살기 위해 당국과 끊임없이 줄타기해야 했던 거장의, 인간 본연의 자화상을 볼 수 있다.

영화 초반 암살된 키로프의 관 앞에 나타난 ‘암살자’ 스탈린은 영화 내내 지겹도록 직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전쟁이 끝난 1948년, 스탈린의 충직한 문화담당 이론가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에 의해 자행된 ‘즈다노프 폭풍’ 또한 비켜갈 수 없다. 내지에 수록된 “영화 ‘증언’은 스탈린 치하에 있던 러시아의 이야기다”는 표현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당신은 내 영혼을 강탈했어. 내가 죽을 때 당신도 죽었어”라며 생떼 쓰는 스탈린의 고함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영화가 끝나고 현악 4중주 10번이 흘러나올 때 크레딧은 이렇게 고발한다.

“1975년 8월 9일. 소련 인민 예술가 쇼스타코비치는 15개 교향곡과 15개 현악 4중주, 45개 발레·영화 음악등 적어도 147개의 작품을 완성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은 3000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렇다. 스탈린이 죽은 날, 독재자와 애증 관계였던 프로코피예프도 세상을 떠났다. 그날 모스크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증언’은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음악 관계자, 애호가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전문가의 자막 번역은 대단히 음악적이고 사실적이다. 물론 책으로 먼저 나온 ‘증언’이 사실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었듯, 영화 또한 서방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기에 다소 한쪽으로 치우친 면도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이 암담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작곡가의 아픔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가치는 빛난다. 그리고 모든 갑론을박에 대한 해답은 음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 쇼스타코비치의 묘지

게르기예프가 추억하는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작곡과 후배이자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인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영상물이 국내에 발매됐다. 쇼스타코비치 팬들에게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희소식이다. 2013~2014년에 걸쳐 파리 살 플레옐에서 펼친 쇼스타코비치 15개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바이올린 협주곡·첼로 협주곡 전곡 사이클은 4개의 블루레이 디스크와 백과사전과도 같은 부클릿으로 무장하고, 불황으로 허덕이는 음반업계에 태풍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다.

모든 작품 연주에 앞서 게르기예프는 자신이 살며 겪었던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음악에 대해 가감 없이 해설하고, 한글자막이 이해를 돕는다. 살 플레옐의 음향은 환상적이고,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러시아 음악의 정수를 보여준다. 므라빈스키·콘드라신·스베틀라노프 등 위대한 거장들이 남긴 녹음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게르기예프는 분명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음악가다.

“어떤 사람들은 교향곡 12번이 성공적이지 못하고 유명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엄청난 오케스트라의 울림과 환상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교향곡 12번 ‘1917년’은 므라빈스키조차 만년에야 자주 선택한 레퍼토리였지요. 음악적인 것을 우선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가치 때문에 므라빈스키가 이 곡을 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았습니다.”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협주곡 전곡 DVD 발레리 게르기예프(지휘)/마린스키 오케스트라 외 Arthaus Musik 107552 (Blu-ray, PCM Stereo, 16:9, 16시간 10분)

비교적 덜 알려진 교향곡 12번의 재발견에 대해 말하는 게르기예프는 이 곡의 진가를 실연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4악장 ‘인류의 새벽’ 도입부, 호른의 강렬한 ‘환희의 주제’는 청중의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쇼스타코비치가 부디 음악만을 물어달라는 부탁을 게르기예프는 온몸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이 영상물을 다 섭렵한 뒤 영화 ‘증언’을 다시 보라.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뜨거운 작곡가의 절규에 전율이 올지도 모른다. 그만큼 완성도가 높다.

‘까마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예술과 정치가 양립될 수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폐해를 ‘증언’은 철저하게 보여준다. 쇼스타코비치는 베토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역사가 말해준다. 영화 ‘증언’과 게르기예프의 연주는 서로 마주 보는 이창(裏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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