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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❶
하종욱의 20세기 클래식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 5/1/2015 |   지면 발행 ( 2015년 5월호 - 전체 보기 )



새로운 문화를 개척한 로큰롤 스타

멤피스의 트럭 운전사가 로큰롤 황제가 되기까지, 엘비스 프레슬리의 파란만장한 성공기

올해는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의 탄생 8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1977년 8월 16일, 마흔둘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가 여전히 삶을 누리고 있었다면 여든의 나이에 이르렀을 시간. 엘비스 프레슬리는 과거의 인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신화와 전설로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멤피스에 있는 그의 묘지에는 해마다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그는 사후에도 연간 500억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실존’ 인물이다.

멤피스의 촌뜨기

엘비스 프레슬리의 본명은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 1935년 1월 8일, 미시시피 주에 위치한 소도시 투펠로에서 태어났다. 일란성 쌍둥이였지만 형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해 외아들로 자랐다. 엘비스의 가족은 가난했다. 스코틀랜드 이주민 후손이던 아버지 버넌 프레슬리는 한때 밀주 판매로 옥살이를 한 이력이 있는 노동자였다. 어머니 글래디스 프레슬리는 남부의 목화밭이나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아버지는 엘비스가 세 살 때 위조수표를 발행해 투옥되었고 가정폭력을 일삼았지만, 어머니는 빈곤한 가계에도 아들의 교육과 감수성 함양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엘비스의 열한 살 생일에 기타를 선물했다. 엘비스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부르고, 기타를 연주하면서 음악에 흥미를 느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장으로 각인된 테네시 주 멤피스로 엘비스의 가족이 이주한 것은 1948년, 그의 나이 열세 살 때다. 어린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들의 거주 지역에서 살아가는 동안 흑인 음악에 자연스레 젖어들었으며, 교회 성가대에서 가스펠을 부르며 솔(soul) 감성을 익혔다. 더불어 남부 지역의 백인 음악이던 컨트리와 팝 음악에도 절로 흡수되는 특별한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는 그의 음악적 토대가 된 로큰롤의 태생적 환경에 부합하는 음악적 자양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잘생긴 18세의 청년은 1953년 6월 어느 날, 멤피스의 허름한 스튜디오 앞을 서성였다. 몇 달러만 지불하면 자작 음반을 발매할 수 있는 멤피스의 로컬 음반사 선 레이블의 스튜디오였다. 엘비스는 어머니에게 선물하기 위한 두 곡의 축음기용 SP 레코딩이 담긴 ‘My Happiness’라는 타이틀의 음반을 만들고 4달러를 지불했다. 멤피스의 촌뜨기 청년이 지불한 4달러의 레코드는 2015년 1월, 프레슬리의 80번째 생일에 경매로 부쳐 30만 달러(약 3억2500만 원)에 팔렸다. 그리고 이날의 첫 레코딩은 전 세계 팝 음악의 역사가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영웅을 갖는 운명적 사건이 되었다.


▲ 경매에서 30만 달러에 낙찰된 ‘My Happiness’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재능과 감미로운 목소리, 잘생긴 외모를 기억한 스튜디오의 여직원은 그의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두었다. 그리고 이것을 ‘좋은 발라드 가수, 반드시 붙잡을 것’이라는 메모와 함께 선 레코드의 사장 새뮤얼 필립스(샘 필립스)에게 건넸다. 엘비스는 낮에는 트럭 운전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밤에는 멤피스의 클럽과 식당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무명의 시간을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선 스튜디오를 찾은 지 1년이 지난 뒤 새뮤얼 필립스의 연락을 받은 그는 공식 데뷔 레코딩 계약을 체결한다. 새뮤얼 필립스가 직접 프로듀서로 참가한 엘비스의 첫 레코딩에는 스코티 무어(기타)·빌 블랙(베이스)으로 구성된 멤피스 지역의 세션이 참가했고, ‘That’s All Right’와 ‘Blue Moon of Kentucky’ 두 곡이 담긴 SP 음반은 라디오 전파를 타자마자 주문이 쇄도했다.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에 그윽한 목소리와 호소력 있는 창법을 지닌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는 멤피스에서 발화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55년 가을까지 선 레코드사의 소속으로 순회공연을 하던 엘비스는 그해 11월, 미국의 거대 레코드사인 RCA 빅터와 계약을 체결했다. 엘비스와 RCA 빅터의 계약은 캐나다 출신의 컨트리 가수 행크 스노의 매니저이자 내슈빌 지역의 공연 프로모터로 활동하던 톰 파커의 추천과 권유에 의해서였다. 그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군 장교 출신이라 ‘대령’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56년 1월, RCA 빅터에서의 첫 번째 레코딩에는 기타리스트 쳇 애킨스와 피아니스트 플로이드 크래머, 드러머 D. J. 폰타나를 포함한 실력파 세션들이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 그렇게 녹음한 ‘Heartbreak Hotel’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애 첫 번째 빌보드 넘버원 히트 싱글이 되었다. 스윙 재즈의 거장 토미&지미 도지 형제가 진행하던 CBS TV쇼 ‘스테이지 쇼’에 출연하면서 미국의 음악 시장은 엘비스의 광풍에 휩싸였다. 그해 3월, 톰 파커는 곧바로 엘비스와 정식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고 ‘Heartbreak Hotel’에 이어 ‘I Got A Woman’ ‘Money Honey’ 등이 담긴 정규 음반 ‘Elvis Presley’를 발매했다. 음반 차트 1위를 석권한 것은 당연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과 파급은 음악적 유행이라는 측면에서 시기적으로도 유효적절했으며, 이에 따른 시대적 요청에 의한 필연적 결과물이기도 했다. 1950년대 초 미국의 유명 라디오 DJ였던 앨런 프레드는 ‘문도그의 로큰롤 파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블루스와 R&B, 그리고 스윙 재즈에서 파생된 흑인 음악의 흥겨운 리듬에 미국의 백인 음악인 팝과 컨트리의 음악적 요소를 결합한 새로운 유행에 ‘로큰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53~1955년 ‘Rock Around The Clock’ 등 로큰롤 히트곡을 생산했던 빌 홀리&히스 코메츠를 비롯해 흑인 솔 음악의 대부 격인 레이 찰스와 로큰롤에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강조한 척 베리의 등장으로 로큰롤의 신문명이 일던 시기였다.

‘흑인처럼 강렬하게 노래하는 백인 보컬리스트’. TV의 보급으로 잘생긴 백인 청년의 출현은 당시의 음악 시장,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절실히 원하던 ‘상품’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곧바로 미국의 음악 시장과 연예 산업을 장악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지닌 엔터테이너가 되었다.

로큰롤의 제왕이 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는 거침이 없었다. ‘Heartbreak Hotel’의 폭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 강렬한 엘비스식 로큰롤 태풍을 준비하고 있었다. 1956년 6월, 엘비스는 NBC TV쇼 ‘밀턴 벌 쇼’에 출연,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엉덩이와 다리를 흔들며 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는 곧바로 또 한 번 빌보드 넘버원 싱글 ‘Hound Dog’로 이어졌다. 곧장 당대의 최고 인기 쇼 프로그램이던 CBS TV쇼 ‘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고, 이 방송은 미국의 기성세대에게는 저급하고 성적인 퍼포먼스라는 거센 비난과 함께 반감을 샀다. 반면 젊은 세대에게는 고리타분한 문화를 타파하는 혁명적이고 감각적인 우상의 출연이라는 열광적 호응과 환영을 이끌어냈다. 엘비스는 거대한 반향과 열광을 끌어낸 ‘더 에드 설리번 쇼’에 다시 출연했고, 이는 82.6%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 ‘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엘비스 프레슬리

1956년 10월에는 기존의 흥겹고 선정적인 면모를 거두고 감미로운 어덜트 팝 스타일의 ‘Love Me Tender’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빌보드 넘버원에 올랐다. 이 세기의 발라드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첫 번째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로 이어졌다. 엘비스가 RCA 빅터와 계약을 체결한 지 채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진 이 엄청난 파동은 미국의 팝 음악과 전 세계의 음악적 지형도를 통째로 바꾼 사건이었다. 엘비스의 움직임에 10·20대의 소녀 팬들의 괴성과 실신이 뒤따랐고, 그가 출연하는 공연마다 매진되었으며, 방송에서는 섭외 전쟁이 이어졌다. 엘비스는 자신의 등장 이전에 팝스타, 엔터테이너의 전형으로 추대되던 빙 크로즈비·루이스 암스트롱·프랭크 시나트라가 범접할 수 없는 청춘의 우상, 1950년대 대중문화의 거대한 아이콘이 되었다.


▲ 영화 ‘Love Me Tender’의 포스터

군 입대, 제대와 위기의식

로큰롤의 제왕으로 성장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와 가공할 파급 효과는 1957년에도 계속되었다. 멤피스의 흑인 빈민가에서 10대를 보낸 엘비스는 10만 달러의 거금을 지불하고 멤피스에 그레이스랜드라는 저택을 구입하였다. 1957년 한 해에만 ‘Too Much’ ‘All Shook Up’ ‘Jailhouse Rock’으로 연결되는 세 곡의 빌보드 넘버원 싱글을 히트시켰다. 특히 ‘Jailhouse Rock’은 동명의 영화로 제작, 주연배우로 출연해 흥행에도 성공했다.


▲ 군 복무 시절의 엘비스 프레슬리

하늘까지 닿을 듯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가 정점에 달한 1957년 말. 엘비스는 징집영장을 받았다. 미 국방부에서는 그의 인기를 활용하기 위해 연예 사병으로 복무하기를 권했지만, 엘비스와 그의 매니저 톰 파커는 1958년 3월 일반 사병으로 군 입대를 택했다. 미국의 모든 미디어는 엘비스의 군 입대 결정 인터뷰와 그의 짧게 자른 머리, 그리고 그의 군복에 관한 모든 것을 기사와 카메라에 담았다. 소녀 팬들의 눈물을 뒤로한 채 엘비스는 입대했고, 그해 10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기지로 파병되었다. 18개월간의 독일 파병 기간 중 그의 삶에 가장 따뜻한 후원자였던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그는 실의에 빠졌지만, 1959년 9월 연회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프리실라 보리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두 사람은 7년 뒤인 1967년 5월 1일 미국에서 결혼했다). 엘비스가 군 복무를 하는 동안에도 ‘Hard Headed Woman’ ‘A Big Hunk O’ Love’ 등의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는 이채로운 기록도 뒤따랐다.

1960년 3월 5일, 24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미 육군 상사로 제대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역에 다시 한 번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엘비스는 곧바로 2년간의 공백을 깨고 프랭크 시나트라가 진행하는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하는 등 새로운 인기몰이를 모색했지만, 그의 인기는 예전만 못했다. 엘비스는 군 제대 후 음악보다는 영화 출연에 관심을 기울였고, 예전의 인기와 명성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 그레이스랜드에서 은둔했다. 미디어의 추적과 관심으로부터 엘비스를 보호하며 ‘멤피스의 마피아’로 불리던 그의 친구들의 과잉 행동과 엘비스의 향락에 관한 구설수가 계속되며 위기가 찾아왔다. 엘비스가 10·20대 젊은 청중을 위한 음악에서 벗어나 보다 편안하고 달콤한 어덜트 팝 스타일로 변화를 모색하는 것도 이런 위기의식의 발로였다.(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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