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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냐 아저씨’
일탈을 되돌리는 일상의 무게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11/1/2013 |   지면 발행 ( 2013년 11월호 - 전체 보기 )




가을 장미를 닮은 연극이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가을 장미. 화려하게 피어났지만 가을의 단풍이나 국화에 우위를 빼앗긴 채 추운 겨울만이 남아있는, 쓸쓸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가을 장미. 이성열 연출이 공들이고 있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가을의 끝 무렵, 아스라이 피어 있는 가을 장미를 닮았다. 11월 24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몹시 뜨겁거나, 매우 차갑거나

2013년 연극계를 한 번 훑어보면 재미난 현상이 발견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연출가 한태숙의 ‘안티고네’로 출발한 일련의 그리스극이다. 게릴라 극장에서 ‘희랍극 페스티벌’을 열었고, 국립극단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3부작을 연속 공연 중이다. 봄과 여름을 거쳐 가을에 이르기까지 페스티벌의 기획을 동원하여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그리스극이 이처럼 많이 공연된 적이 또 있었던가.
유례가 없는 그리스극 열풍과는 별도로 차분히, 그러나 지속적이며 다양하게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 바로 체호프의 작품들이다. 각 극단에서, 혹은 극장에서 개별적으로 상당수 기획되고 공연되었기에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딘의 ‘세 자매’를 비롯하여 극단 아르케의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진 한 가문의 몰락사’, 체호프의 단막극을 선보인 연출가 오경택의 ‘14인 체홉’, 일본 연출가 다다 준노스케와 성기웅 각색의 ‘가모메’가 현재까지 공연됐고, 앞으로 명동예술극장에서 이성열 연출의 ‘바냐 아저씨’가, 예술의전당에서는 문삼화가 연출하는 ‘세 자매’가 줄줄이 관객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군소 극단의 작품까지 포함한다면 체호프 작품은 서너 편이 더 공연될 계획이다.
그리스극과 체호프. 달라도 너무 다른 이들 작품이 올 연극계의 중요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스극은 인간이 지닌 욕망의 원형을 다루고 있다. 신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상과 대면하는 인간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개념으로는 이른바 막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근친상간, 존속살인은 물론이고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와 치정관계, 권력의 논리에 좌절되는 무수한 죽임들이 넘쳐나는 것이 그리스극이다. 중도와 중용이라는 도덕적 규범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극은 그래서 몹시 뜨겁다. 인간을 내려다보는 신들도 뜨겁고, 그 아래에서 꿈틀대는 인간들도 뜨겁다. 무대 위에 펼쳐진 상황이 처참하고 끔찍할수록 인간 욕망의 원형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동, 그것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극의 현재적 의미일 것이다.
이에 반해 체호프의 작품은 지나치게 차분하다. 일명 갈등이 없는, 클라이맥스가 없는 작품으로도 규정되는 체호프 작품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일상이 중심이다. 시끌벅적한 도시가 아닌 한적한 시골을 배경으로 그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을 풍경화처럼 펼쳐내는 체호프의 작품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일상으로 침잠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그 태도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비루하고 초라한 삶, 희망이 없는 삶이라도 그것을 감내하며 살아야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체호프 작품이 무한히 재해석되어 무대에 올려지는 이유이다.
아주 뜨거운 그리스극과 매우 차가운 체호프 작품이 2013년 연극계의 중요 흐름이 된 것은 지금 이 시기가 삶에 대한 의미의 발견이라는 본질적 질문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목도하고 그 욕망과 대결하는 세계에 대해 고민하는 한편, 차분하게 제시되는 일상을 곱씹어보며 삶의 의미를 되묻는 반복적 작업. 올해의 관객들은 상반된 경향의 작품을 통해 같은 내용의 질문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것이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비교적 장황하게 올해의 연극 경향을 언급한 것은 연극 ‘바냐 아저씨’를 이야기하기 전에 왜 또다시 체호프인가? 왜 자꾸만 체호프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앞서 서술된 내용을 통해 반복적으로 체호프가 호출되는 맥락을 이해하였다면, 이제 ‘바냐 아저씨’가 어떻게 그 차분하고 건조한 경향의 한가운데에 무게중심을 잡는지 살펴볼 순서다.


그로테스크한 일상의 쓸쓸함

연출가 이성열은 오래전부터 ‘바냐 아저씨’ 공연을 염두에 두었다. 극단 백수광부를 창단하면서 소극장에서 ‘굿모닝 체홉’으로 체호프 작품을 공연한 그의 이력은 체호프에 대한 애정과 공연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설명하는 체호프 작품의 특징은 흔히들 말하는 일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로테스크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체호프에 의해 비로소 일상이 무대에 펼쳐졌는데, 그 일상이라는 것이 그저 평범한 누구나의 일상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작품 속 인물에게도 늘 그래왔던 일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연출의 이러한 설명은 체호프 작품의 이해에 매우 유효하고도 특별한 시선을 제공한다.
‘바냐 아저씨’는 퇴직한 교수 세레브랴코프와 그의 젊은 아내 옐레나가 바냐의 집에 머물면서 시작한다. 농장을 경영하며 억척같이 일하던 바냐와 소냐는 이들의 방문으로 인해 평범하던 일상이 바뀌어버린다. 보통의 식사 시간은 그들에게 맞춰 뒤죽박죽이 되고, 밤늦게 잠들지 못하는 교수로 인해 유모와 하인들은 항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옐레나에게 끌린 바냐는 그녀가 비록 자형의 새로운 아내이지만 노골적으로 구애를 하고, 세레브랴코프의 통풍을 이유로 드나들던 의사 아스트로프는 아예 식객으로 눌러앉는다. 아버지의 변덕스러움을 견디면서 아스트로프를 사모하는 소냐는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나가고, 옐레나는 자신에게 향한 바냐와 아스트로프의 욕망 어린 시선을 견뎌야 한다.
이렇게 보면, 바냐와 소냐를 중심으로 한 시골의 일상이 교수와 옐레나로 인해 일탈한 셈이다. 조용한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가 큰 파문을 만들어낸 것처럼 바냐와 소냐의 일상은 그렇게 흔들리고 뒤틀려 끊임없이 물결치는 것이다. 이성열이 말한 “그로테스크한 일상”은 바로 무수히 만들어지는 파문을 일컫는다. 농사일밖에 할 것이 없던 무료한 바냐와 아픈 환자들만 대해야 하는 아스트로프에게 옐레나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으며, 한 달에 한 번도 보기 힘들던 아스트로프의 얼굴은 소냐에게 여인의 욕망을 갖게 한다. 무심히 던져진 돌멩이로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 사람들. 그들의 일상이 평범한 일상이 아닌 이유다.
작품에 나타난 그로테스크한 일상은 ‘바냐 아저씨’의 연출 콘셉트이기도 하다. 연출가 이성열은 체호프 작품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특징을 무대 위로 고스란히 옮겨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것은 희곡 텍스트이다. 원작의 의미와 주제는 살리되 번역극의 이질감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는데, 이를 위한 첫 번째 작업은 러시아어 원작을 번역한 여덟 편을 펼쳐놓고 공연하기에 가장 적합한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일상어가 안정적으로 사용된 오종우의 번역본을 선택한 다음 그가 진행한 것은 윤색으로, 작가 동이향에게 의뢰하여 어휘와 어미 등을 보다 자연스럽게 손보았다. 이렇듯 오랜 시간 텍스트를 다듬었기 때문에 이번 ‘바냐 아저씨’의 대사는 매우 편안하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언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속에 담겨 있는 그로테스크한 일상, 일탈의 욕망이 꿈틀대는 일상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맹물을 마시듯’ 밋밋하지만 꼭 필요한


체호프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등장인물 모두가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바냐 아저씨’ 역시 주인공은 바냐인 듯 지만 바냐와 얽혀 있는 교수 부부·친구 아스트로프·조카 소냐·어머니 마리야, 거기에 소냐의 대부인 텔레긴과 유모까지 작품 속의 비중은 작지만 모두 그로테스크한 일상을 구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다. 이렇듯 캐릭터가 강조된다는 것은 우선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돋보인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이번 ‘바냐 아저씨’ 작품에는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모두 모여 있다. 정확한 대사 전달은 물론이고 품격 있는 연기를 캐스팅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연출가의 설명은 배우들을 더욱 신뢰하게 만든다.
가장 먼저 만난 배우는 원로배우 백성희이다. ‘3월의 눈’ 이후 건강상의 문제로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녀는 이 작품에서 바냐의 어머니인 마리야 역을 맡았다. 사위인 교수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내는 마리야는 사실 출연 분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인물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백성희는 이에 대해 바냐의 무기력함을 강조하는 인물로 마리야를 정리하면서, 지적이고 우아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감각이 떨어진 여성을 연기하고자 한다. 체호프 작품에 다수 출연한 그녀는 “‘맹물 마시듯’ 연기해야 체호프의 의미가 살아난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체호프 작품 자체가 맹물처럼 밋밋하고 무미건조하지만 그것에서 발견하는 삶에 대한 성찰은 맹물이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그 무엇보다 명료하게 체호프를 정리하는 이 표현은 무대 위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배우만의 혜안(慧眼)으로 만 가능한 빛나는 통찰이다.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풍성한 성량과 정확한 대사 전달은 젊은 배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바냐 역은 2011년 ‘오이디푸스’ 이후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이상직이 맡았다. 농사를 지어 죽은 누이의 남편에게 돈을 보내는 우직한 사람이자 그의 실체가 껍데기임을 알았을 때 분노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옐레나에게 사랑을 호소하기도 하는, 매우 복합적 인물인 바냐는 많은 면에서 이상직과 닮아 있다. 실제로 그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연극 활동을 하면서 연극인이자 농민의 삶을 살고 있다. 이미 바냐에게 필요한 농부의 일상과 무료함은 물론 일탈의 욕망까지도 모두 체득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해석하는 바냐의 진지함과 진정성은 옐레나가 아닌 바냐의 삶 자체이다. 25년을 봉사한 교수의 실체가 허상이었음은 곧 바냐의 세월이 헛수고였다는 것이고,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바냐의 일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검은 피부에 선한 눈매를 가진 이상직은 그 이미지대로 바냐에게도 한 줌의 희망을 얹어준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태도가 바냐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바냐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퇴직교수 세레브랴코프는 연기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한명구가 맡았는데, 신경질적이고 강퍅한 성격을 목소리의 조절과 호흡의 변화로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바냐가 살고 있는 농장을 팔고자 하는 뻔뻔함과 이기적인 면모를 능숙한 연기로 입체화하고 있다. 바냐의 친구인 시골의사 아스트로프는 박윤희가 연기한다. 반듯하면서도 능청스러운 그의 이미지는 오랜 의사 생활에 지친 무기력함을 표현하는 데에 효과적인 동시에 옐레나가 평생에 단 한 번 남편 아닌 남자를 포옹하게 만드는, 그리고 소냐가 오랜 시간 사모하게 만드는 매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바냐와 아스트로프, 즉 시골에서 살고 있는 남자들의 환심을 온 몸에 받는 옐레나는 정재은이 연기한다. 그녀의 단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아스트로프의 대사대로 사람들에게 무료함만을 전염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소냐에게는 엄마이고 싶은 간절함을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소냐 역은 오랫동안 이성열과 호흡을 맞춰온 이지아가 연기하는데, “나는 못생겼어요”라는 대사가 어울리지 않는 미모에도 불구하고 정말 못생겨보일 만큼 익살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며, 아직은 소녀인 소냐의 감정 변화를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있다. 아스트로프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인물인 유모는 황정민이 맡았다. 할머니 배역임에도 이성열과의 작업이기에 주저 없이 이 작품을 선택했다는 그녀는 연습 시간 내내 무대에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뜨개질에 여념이 없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스스로 무대 위에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을 잘 아는 그녀가 늙은 유모가 되기 위해 힘을 빼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텔레긴 역의 이정수와 대사를 주고받을 때의 유쾌함은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그녀의 영리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좋은 배우들이 자신의 개성보다 ‘맹물을 마시듯’ 체호프의 인물이 되어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바냐 아저씨’의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시의 여백과 리듬감으로 충만한 무대

‘바냐 아저씨’의 무대는 단순하다. 뒤로 벽면이 있고 무대 중앙에는 흙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판이 약간 비스듬히 놓여 있다. 무대 오른편에 문이 있는 벽면이 있는데, 이 벽은 막이 진행될수록 점점 무대 안으로 들어와 공간을 좁게 만든다. 연출가가 이야기하는 “그로테스크한 일상”이 무대 콘셉트에도 적용된 것인데, 비스듬한 나무판은 일상의 균열과 불안을 보여주는 것이고 점점 좁아지는 무대는 바냐가 또다시 일상에 갇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렇게 꾸며졌다. 세부적인 장치들은 일상이라는 큰 흐름을 따라가지만 무대에 적용된 기본 콘셉트는 시의 여백이다.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의 여백을 통해 시는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체호프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대사와 대사 사이,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 사이에 수많은 사연들이 들어가 있어 그 여백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른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열은 무대 전체가, 그리고 배우의 연기가 모두 이러한 시의 여백을 담아내길 기대한다. 단순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앙상블은 행간(行間)이 넓은 한 편의 시가 될 것이고, 그 행간을 채워나가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될 것이다.
연출가 이성열이 ‘바냐 아저씨’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바냐가 너무 평범해서 못나 보이기까지 한 남자를 대변하는 듯해서라고 한다. ‘일탈을 꿈꾸지만 일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 그래서 바냐는 쓸쓸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장을 살짝 뒤집어보고 싶다. ‘일탈을 다시 되돌리는 일상의 무게’로. 일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은 일상이 그만큼 무겁고 힘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삶을 영위한다는 것,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일탈보다 중요하고 필요하다. 돌아올 일상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더욱더 비참하고 쓸쓸한 일인지도 모른다. 고통의 멍한 눈빛을 한 바냐에게 던지는 소냐의 “그래도 어쩌겠어요, 살아야죠!”는 잊고 있었던 일상의 무게를 환기시키는 대사이다. 그래서 이 대사는 무섭고, 어떤 면에서는 그래서 반가운 말이다. 힘들다고 호소하는 바냐를 마주한 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계산서를 작성하는 소냐의 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그래, 어쩌겠어. 오늘도 살아야지! 오늘도 살 수 있어서 다행이야!”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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