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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피셰르&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아홉 개의 우주, 베토벤을 그리다
글 국지연 기자, 송현민(음악평론가), 한정호(런던 통신원) 4/1/2015 |   지면 발행 ( 2015년 4월호 - 전체 보기 )



베토벤은 음악가에게 언제나 ‘산’과 같은 존재다. 물론 그 ‘산’이 음악적인 완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내면, 그의 철학, 그의 언어를 음악 안에 담아내기 까지 자신과의 싸움, 절망의 순간을 넘어서야 한다. 음악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줬던 베토벤. 그의 인생 전체가 담긴 교향곡 전곡 이 이반 피셰르의 지휘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서울에서 펼쳐진다. 아홉 개의 우주라고 불리는 교향곡 전곡 연주를 향한 항해. 이제 그 여정을 향한 닻이 올랐다.

PART① 지휘자 인터뷰

이반 피셰르

“음악은 축제, 환희의 순간을 즐겨라”

베토벤 교향곡은 ‘혁명’과도 같다고 말했던 이반 피셰르. 그가 생각하는 베토벤 음악, 지휘자로서의 신념, 음악가로서의 고뇌, 예술가로서의 꿈, 그리고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전대미문의 프로젝트,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이반 피셰르가 이끄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가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한국에서 단독으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한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클래식 음악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치열한 탐구정신으로 한 길을 걸어온 지휘자 이반 피셰르와 명문 악단인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특별한 만남이기에 더욱 의미 깊다. 베토벤이라는 작곡가의 전 생애가 전해지는 교향곡 전곡 연주는 뛰어난 음악성을 자랑하는 오케스트라일수록 더욱 시도하기 힘든 프로젝트다. 그렇기에 고전의 중후함과 기품을 갖춘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모험과 자유를 존중하는 지휘자 이반 피셰르의 카리스마가 어떻게 베토벤 교향곡이라는 위대한 그림을 그려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오페라뿐만 아니라 고음악 분야에서도 이미 음악성을 인정받았던 메조소프라노 베르나르다 핑크를 비롯해 바리톤 플로리안 뵈슈, 테너 미카엘 슈카데, 소프라노 미르토 파파타나슈, 그리고 국립합창단과 서울모테트합창단이 이번 무대 중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무대에 함께 올라 또다른 기대를 모은다.

이반 피셰르가 첫 내한한 것은 2005년 10월이었다. 당시 피셰르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2007년과 2010년에도 내한하여 피아니스트 김선욱, 바이올리니스트 장유진, 피아니스트 서혜경,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과 협연하며 새로운 색깔의 음악들로 감동을 이끌어냈다. 피셰르는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밝혔는데, 그것은 자신의 국가 헝가리와 비슷한 노스탤지어가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공연을 했을 때마다 연주자들과 청중의 열정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제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곳이지요. 이번 연주 역시 무척 기대가 됩니다. 함께 연주하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는 오랫동안 베토벤 교향곡을 같이 연주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느꼈던 감동을 한국에서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기쁩니다. 그들은 창의성과 상상력을 가진 훌륭한 오케스트라이지요. 특히 목관 솔리스트들의 소리의 아름다움이 특별합니다.”

베토벤의 음악성, 놀라운 상상력, 그의 깊은 감성을 사랑한다는 피셰르는 개인적으로 작곡가 중에서도 베토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의 드라마틱하고 서정적이고 한편으로는 친근한 성품을 좋아합니다. 물론 그의 삶을 보면 때로는 거칠기도 했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이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음악가로서의 능력을 선물로 주었지요. 그 음악이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춰줄 만큼 말이지요. 또한 베토벤은 그 시대에 진정한 ‘음악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고 시작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귀족들의 사교나 교양을 위해 음악이 종속되었다면 베토벤 때부터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음악적인 표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니까요. 더구나 베토벤의 교향곡은 이전에 개별적인 악장들이 연속되는 정도의 음악과는 다른, 그야말로 각 곡마다 메시지를 담은 진정한 교향곡의 표본이지요.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는 저에게도 큰 도전과 깊은 의미를 갖게하는 무대입니다.”


▲ ⓒFelix Broede

음악의 즐거움 전하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스산한 늦가을의 정취가 아름다운 도시 부다페스트, 이반 피셰르는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다. 그는 현재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전공은 원래 첼로와 작곡이었다. 버르토크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헌시 슈버로브슈키와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에게 지휘를 배운 그는 1976년 BBC 주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지휘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각지의 오케스트라와 영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러브콜을 받았으며 유럽의 주요 오페라극장을 석권하는 등 그의 미래는 거칠 것 없는 성공대로와도 같았다.

하지만 세계 최정상의 무대를 뒤로 하고 결정한 그의 선택은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였다. 그는 독재로 심음하고 있는 자신의 고국 헝가리로 돌아가 자신의 음악 동지인 피아니스트 졸탄 코치시와 함께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설한다. 지금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부상했지만 당시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83년 창설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헝가리 독재 정권과 음악활동이 많이 제한되었던 엄격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더욱 의미 깊었다. 창조성을 둘러싼 불화로 인해 졸탄 코치시가 오케스트라의 운영에서 손을 뗀 후 피셰르는 자신만의 철학과 오케스트라 악단 운영으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반열에 올린다. 당시 그는 음악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이상적인 헝가리 음악 단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의 오케스트라 이름 앞에 붙은 ‘페스티벌’이라는 단어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추구하는 음악적 이상을 잘 말해준다.

“처음 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해 단원을 모집하고 창단 작업을 할 때는 1년에 두세 번 모여서 무대에 서는, 그야말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였지요. 그러던 것이 점점 성장하면서 연주 횟수가 많아지고 정규 오케스트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을 뺄까도 많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페스티벌’이라는 단어를 오케스트라의 이름 속에 고정해서 넣기로 했지요. 처음 오케스트라를 시작할 때처럼 ‘축제’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음악회라는 것이 결국은 모두에게 단 한번 뿐인 축제의 순간이니까요. 그때마다의 연주에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쏟고 기쁨을 함께한다는 ‘축제’의 정신을 잃지 않겠다는 의미로 ‘페스티벌’을 그대로 오케스트라의 이름 앞에 쓰기로 한 것이지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저에게는 가족입니다. 또한 제가 아는 가장 혁신적인 오케스트라이지요. 우리는 항상 다른 솔루션을 찾고 도전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 음악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걸 최고의 목표로 생각합니다.”

그는 국가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음악 단체를 만들기 위해 해마다 공연 때면 헝가리의 훌륭한 음악가들을 초청해 앙상블을 조직하고 함께 무대에 섰다. 비용은 피셰르의 몫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더 강한 통제권을 갖고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이제 피셰르의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헝가리 국민의 오케스트라이자 자부심이었다.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음악단체가 아니라 독재정권 속에서도 독립된 예술 단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상징이 되어 갔다. 당연히 국민적인 지지도 높았다. 1992년 오케스트라가 완전한 독립체계를 갖추기 까지는 수많은 격려와 지지가 그들의 자리를 지키게 만들었다. 운이 좋게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자유’의 상징으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피셰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주목받는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 그는 아주 높은 연주 수준과 스스로 음악에 헌신하는 연주를 원했다. 그런 그의 철학은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연습하는 모든 과정에 반영되었다.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상설 악단이 아니었는데, 이제 도시를 대표하는 정식 오케스트라로 바꾸기 위해서는 국가의 예산이 필요했지요. 어떤 프로젝트를 위해 모일 때는 거기에 집중하게 되지만 막상 오케스트라가 정식 오케스트라가 되었을 때 그 특별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되었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오케스트라의 음반 작업이 성공을 거두자 지휘자인 제 스스로 연주의 질과 독창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두려울 만큼 바쁜 스케줄이 저희를 짓누르더군요. 필립스와의 계약을 깨고 채널 클래식스와 전속 계약했던 것도 모두 우리 오케스트라의 예술적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적인 유명세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과 도전이었으니까요. 자신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다고 만족하는 것이야 말로 연주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지요.”


▲ ⓒMarco Borggreve

오직 좋은 연주만을 위한 리더십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예술적인, 세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리더십은 이러했다. 우선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1년의 절반을 넘는 정도의 시간만 집중적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악주자들이 오케스트라 내에서 정기적으로 실내악 음악회를 갖도록 무대를 마련하고 격려했다. 특히 어린이 음악회나 깜짝 음악회 등 기존의 음악회 형식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모험심이 가득한 분위기로 이끌어 갔다. 어느 때에는 그 다음 음악회에서 어떤 작품을 듣고 싶은지 청중이 투표를 해서 선정하기도 했다. 모두 오케스트라의 분위기를 생기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피셰르는 말한다. “지휘란 새가 목표물을 찾듯이 진실을 찾아 헤매는 것이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진실을 들려주지 못한다면 청중은 감동하지 않습니다.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술의 가장 특징이니까요. 더불어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는 형식화된 연주회는 생기가 없습니다. 청중을 위한 연주회가 되어야 하지요. 연주자들도 언제나 처음 연주하는 것처럼 온 열정을 다해 연주해야 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직 한 번밖에 할 수 없고 한 번밖에 들을 수 없는 음악회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지휘하는 음악을 들어보았는가. 그의 장기인 버르토크 연주 속에는 정형화 되지 않는 미적 감각과 생동감 넘치는 리듬이 살아 숨 쉰다. 말러 ‘대지의 노래’ 속에서 은밀히 전해지는 서정적인 메시지는 또 어떤가. 삶의 고난을 뚫고 결국 마지막에 인생의 운명을 긍정하는 현자의 그것과 다름없다.

“저는 단원들에게 작품의 아름다움과 나의 확신과 나의 느낌을 보여줍니다.”

피셰르가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추진한 또 하나의 파격은 단원들의 계약 체계였다. 보통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경우 정규직이나 종신제가 그 주를 이루고 있는데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2년 단위의 재계약을 한다. 그는 연주의 수준과 단원간의 건강한 경쟁을 통한 성장을 원했다.

“중요한 것은 연주자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는 것입니다. 연주자는 그 순간에 몰입하면서 즐겨야 하고 서로 다른 음악적 경험을 실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주자는 평생 자신의 연주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안정보다는 긴장, 모험을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음악에 집중하면서 때로는 서로를 믿고 맡기고 물처럼 흐르기도 해야 합니다. 결국 좋은 음악이란 좋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메시지를 최고의 연주로 들려주는 것이니까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좋은 음악을 이끌어낼 수가 없지요.”

그의 이런 철학은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장면을 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이반 피셰르는 음악의 모든 과정 중 ‘리허설’을 가장 중시하는 지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장면을 취재하여 글로 옮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음악평론가 톰 서비스가 세계 음악계의 거장들을 취재해서 쓴 책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에서 그는 자신이 본 리허설 중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처럼 리허설에서 보여준 태도와 에너지를 연주회장까지 거의 가지고 가는 오케스트라는 없었다고 말한다. 톰 서비스는 그의 리허설 장면을 보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Marco Borggreve

“피셰르가 이끄는 리허설 풍경은 마치 음악 수업을 듣는 교실 분위기에 가깝다. 부다페스트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는 연주자 스스로가 아니라 지휘자가 조율을 이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음악가들이 서로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악기가 옆 사람이나 다른 파트와 어떻게 공명하는지 듣도록 한다. 목관과 금관주자들을 위한 화성학 수업이 끝나면 다음은 클라리넷과 호른, 저음악기의 선율을 확인한다. 악기 소리를 이리저리 시험해 보고 서로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은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간다. 그들은 리허설에서 모두 감정적으로 100% 몰입한다. 분위기가 활기차고 기운이 돈다. 그들은 음악에 내재되어 있는 엄청난 긴장감을 표출해 낸다.”

그렇게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연주자들이 서로의 음악과 연주 스타일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피셰르 역시 그것을 긴 ‘여행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음악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서로의 인연, 서로의 음악을 잘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음악을 향한 헌신, 그리고 높은 수준의 연주입니다. 그래서 다른 문제들은 단원들과 함께 의논하지만 음악적으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모두 제가 합니다. 그리고 제가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요. 저는 단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음악을 만들어 갈 때는 저 만의 방식으로 책임감 있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치 있는 신념이라면 연주자들도 따라 주겠지요.”

베토벤 교향곡은 ‘혁명’

2007년 내한을 앞두고 피셰르는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한국에서 하고 싶은 레퍼토리로 버르토크와 베토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버르토크는 워낙 그의 장기여서 음반으로도 많이 들을 수 있었지만 당시 베토벤 음악은 어떻게 연주하고 해석할지 궁금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이후 그는 2008년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교향곡 7번을 녹음했고, 최근 교향곡 4번과 교향곡 6번을 녹음했다. 무대에서의 연주도 활발했는데, 전통적인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기도 했고 때로는 시대악기 앙상블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베토벤이 자신의 시대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내다봤던 작곡가였음을 연주로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영상을 보면 교향곡이 가진 화성진행의 치밀함을 얼마나 중요시 하고 균형감있게 그려나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진부함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피셰르와 뛰어난 테크닉과 음악성을 자랑하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실황 무대는 그래서 더욱 기대를 갖게 한다.

“음악을 만들어 낼 때는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점차적으로 음악의 진짜 얼굴을 그려냅니다. 작품의 성격을 분석하며 여러 실험을 하기도 하고요. 어떻게 해야 진정한 음악을 그려낼지 이것저것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이지요. 그런 작업이 없이 좋은 연주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많이들 묻곤 합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우선 베토벤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겠지요. 그가 이 교향곡들을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작곡했는지 공부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사실 전 해석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작품 자체를 어떻게 느끼고 표현할 지 그것을 연구하고 지휘하는 것이지, 어떤 완성된 생각을 갖고 음악을 대하지 않습니다. 단원들과 함께 연습을 통해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함께 연습하는 시간은 단순하게 단원들이 저의 지시를 따르는 시간이 아니라 소리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 중 일부입니다. 당연히 모든 연주가 그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을 창조할 뿐이지요. 그리고 저는 청중 역시 무슨 조합이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무대에서의 그 순간을 즐겼으면 합니다.”

그가 말하는 음악, 그는 음악이야 말로 우리를 천국과 지옥을 넘어선 세계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을 보세요. 언제나 기쁨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 속에는 웃음뿐만 아니라 눈물이 있고 상처와 슬픔이 공존하지요. 그것이 인생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지요. 음악은 그런 우리의 삶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즐거움과 슬픔이 조화와 불협화음 속에서 삶의 큰 그림, 큰 음악을 만들지요.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만큼 인간의 기쁨과 슬픔이 함께 공존하는 음악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 많은 레퍼토리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선택한 이번 무대는 피셰르가 말하는 진정한 ‘축제’의 시간이 될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그야말로 ‘혁명’ 그 자체이지요. 고전주의 형식 속에 신선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교향곡 1번, 파격적인 음악을 보여주기 시작한 교향곡 2번, 비정상적으로 반복적인 테크닉을 처음으로 작품에 적용했던 교향곡 3번 ‘영웅’, 고전주의적인 형식의 틀을 과감히 벗어던졌던 교향곡 4번, 비극으로부터 자유로 옮겨가는 첫 작품인 교향곡 5번 ‘운명’, 폭발적인 에너지를 정화시키고 안식과 평화를 선물하는 교향곡 6번 ‘전원’, 하나의 멜로디가 끝없이 반복하면서 발전하는 작곡기법의 새로움을 보여준 교향곡 7번, 아름다운 색채감이 돋보이는 교향곡 8번, 그리고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교향곡 9번 ‘합창’까지 그의 교향곡은 음악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이지요.”

그는 베토벤의 각 교향곡에는 생명이 부여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 생명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겠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들었던 베토벤. 그는 음악가로서 가장 중요한 청력을 잃음으로써 좀 더 깊은 정신적인 세계에 빠져 들 수 있었고 감당하기 힘든 순간, 자기를 초월한 세계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은 그 고통에서 환희의 세계로 나아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번 무대가 베토벤이 전하는 메시지가 온전히 전해지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혼신과 열정을 다해 연주한다면 그 메시지는 전해질 거라 믿습니다.”

아주 오래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공연장에서 처음 들은 적이 있었다. 늘 음반으로만 듣던 앙상블이 실제로 온 무대와 객석을 감싸 안을 때의 감동은 기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지막 4악장에서 섬세한 바이올린 음색의 주제 선율이 펴져 나오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베토벤의 거대한 우주, 그 우주가 작은 나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글 국지연 기자(ji@gaeksuk.com) 사진 빈체로

PART② 오케스트라 역사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소리와 공간, 서로를 빛내주다

결국, 정답은 음악에 있다. 하지만 음악만으로 음악은 완성되지 않는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전용홀은 최고의 사운드를 위해 서로를 진화시켜 왔다. 그들이 일군 127년의 역사를 살펴본다.

상업무역으로 축적한 자본은 충분했지만, 이렇다 할 만한 음악회장이 없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881년 6월 26일자 시사주간지 ‘암스테르다머’에는 음악당도, 프로페셔널한 오케스트라도 없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이 기사를 화제에 올렸죠. 그리고 여섯 명의 상인이 뜻을 모아 음악회장을 짓기로 합니다. 네덜란드어로 음악당을 ‘콘세르트헤바우’라고 합니다. 당시 건축 비용은 25만7333휠던이었습니다. 요즘 원화로 환산하면, 우리 돈 8억3376만 원 정도였죠.

1881년 9월에 건립을 위한 임시위원회를 꾸렸고, 다음 해에 재단을 설립합니다. 그리고 재단은 “오케스트라를 설립할 지휘자를 찾습니다. 작업은 1888년 11월 1일부터 시작하고, 크고 작은 음악회와 마티네 콘서트를 진행하면 됩니다. (···) 장소는 콘세르트헤바우의 홀이나 정원 혹은 다른 곳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공지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오케스트라 역사의 흐름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개척 정신으로 임하다 보금자리를 마련하죠. 하지만 암스테르담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음향이 뛰어난 홀을 갖춘 콘세르트헤바우가 있고, 그곳에 상주할 오케스트라를 찾은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발전에서 결정적 작용을 하는 전용홀이 부재한 우리나라 실정에 비춰볼 때 부러워할 점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1888년 4월 11일, 콘세르트헤바우 개관 공연이 끝난 뒤, 11월 3일 56명으로 구성된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이하 RCO)와 상임지휘자 빌럼 케스(1888~1895)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당시에는 음악회에서 먹고 마시고 떠드는 것이 예사였죠. 케스는 테이블과 의자, 웨이터를 없애고 청중이 음악을 집중적으로 감상하게 합니다. 익숙한 감상 문화가 확 바뀌자 청중의 반대는 심했습니다. 하지만 케스의 용기 있는 결정에 따르며 차차 공연에 집중하게 되죠. 케스는 스코틀랜드 국립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가기 전까지 RCO의 수준을 이렇게 최대한으로 끌어올렸습니다.


▲ ⓒAnne Dokter

멩엘베르흐의 영광과 상처, 베이뉨의 치유

어느 오케스트라든 기초와 초석이 닦이면 한 차원 높은 ‘앙상블’을 키울 차례가 옵니다. 그럼 케스의 고별 음악회로 가보겠습니다. 여기, 24세의 젊은 피아니스트는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입니다. 그는 지휘 실력까지 갖춘 빌럼 멩엘베르흐입니다. 1895년 10월 27일, 이 청년은 건반 앞이 아닌 콘세르트헤바우의 지휘대에 오릅니다.

멩엘베르흐(1895~1945)는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의 곡을 즐겨 연주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시대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죠. 특히 구스타프 말러를요. 말러는 지금에야 음악사의 ‘고전’으로 통하지만, 당시에는 곡만 내놓았다 하면 논란을 일으킨 괴짜 ‘현대음악’ 작곡가였습니다. 멩엘베르흐는 취임 25주년이 되던 1920년에 말러 페스티벌을 조직했고, 9회의 음악회를 통해 말러 교향곡 전곡을 지휘했습니다.

당시 콘세르트헤바우는 위치에 따라 메아리가 발생했고 무대가 높다 보니 금관 파트가 크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1899년 건축가 판 헤트는 멩엘베르흐의 생각에 따라 무대를 2m 이상 낮추고 높이에 따라 각 악기의 음향을 압박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RCO는 녹음할 때 무대가 아닌 좌석을 전부 치운 홀의 곳곳을 활용했죠.

RCO가 발전하는 데는 무엇보다 멩엘베르흐의 꼼꼼한 성격이 한몫했습니다. 리허설을 앞두고 25분 동안 조율하는가 하면, 단원들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느라 2시간 가운데 정작 연습 시간은 45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어떤 단원은 25분 동안의 조율을 놓고 ‘한 편의 제의(祭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멩엘베르흐는 정확함을 연주의 제1원칙으로 삼았지만, 역동성과 생동감을 위해서라면 과감히 악보에 손대기도 했죠.

하지만 1932/33 시즌부터 멩엘베르흐와 RCO의 사이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높아진 세금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겼죠. 자국의 작곡가들이 작곡한 동시대 음악을 소홀히 하는 것을 두고 로테르담 필하모닉과 비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만년은 치욕스러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6명의 유대인 단원들이 추방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고, 히틀러 치하에서 베를린 필과 뮌헨 필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전기를 쓴 존 러셀은 당시를 “[지휘자들은]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끝장나는 시절”이라고 했듯이, 격동기의 그들은 포디엄과 정치적 노선에 발을 어떻게 내딛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멩엘베르흐는 네덜란드가 항복하고 프랑스-독일 휴전 협정이 체결된 뒤 나치당이 발간하는 ‘민족의 파수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던 날, 우리는 (···) 샴페인을 시켰고, 이 멋진 순간을 축하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평화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라고 발언합니다. 그의 발언에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결국 여왕은 그에게 하사한 명예 메달을 회수했고, 지휘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1951년 3월 22일, 스위스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유대인 단원들과 나치에 동조하던 단원들이 빠진 탓에 RCO는 썰렁했습니다. 1931년부터 RCO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던 에두아르트 판 베이뉨(1945~1959)이 멩엘베르흐의 뒤를 이어 상임지휘자가 됩니다. 음악만큼 인간미를 중요시한 베이뉨은 브루크너·드뷔시·라벨 등 독일과 프랑스의 음악을 적절히 배합했고, 1946년에 악단을 이끌고 덴마크·스웨덴·벨기에·프랑스·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1954년 미국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59년 4월, 그는 58세의 나이로 리허설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집니다. 전후의 상처를 인간애와 음악으로 치유한 지휘자의 타계에 암스테르담 시민은 깊은 상심에 빠집니다.


▲ ⓒMarco Borggreve

하이팅크의 뚝심, 샤이의 포용력, 얀손스의 힘

베이뉨의 추모 음악회가 열리는 콘세르트헤바우로 가보겠습니다. 베이뉨이 자신의 후임자로 눈여겨본 인물로 1956년 처음으로 RCO를 지휘했던 이가 1963년 상임지휘자가 됩니다. 바로 베르나르트 하이팅크(1961~1988)입니다. 암스테르담 출신인 하이팅크는 콘세르트헤바우를 자신의 집처럼 여기며 고전·낭만주의 레퍼토리를 아울렀습니다. 베토벤·브루크너·말러 교향곡 전집을 제작했죠. 이 중 필립스 레이블에서 나온 베토벤 교향곡 전곡은 이번 이반 피셰르와의 내한을 앞두고 가슴 설레며 감상할 수 있는 레퍼런스입니다.

그가 재직하는 동안 RCO의 위상은 높아갔죠. 하지만 고전 레퍼토리에만 치중했기에 멩엘베르흐 시절에 현대음악으로 단련된 단원들과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술감독 헤이 판 로이언과의 마찰로 1988년 4월 말러 교향곡 8번을 끝으로 RCO를 떠납니다.

1988년은 RCO가 창단 100주년을 맞은 해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쌓은 공을 인정해 네덜란드 왕실은 작위를 하사합니다. 그래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가 됩니다.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11월 3일에 있었고, 지휘봉을 잡은 이는 리카르도 샤이(1988~2004)였습니다. 그는 베르디의 ‘레퀴엠’을 지휘했죠. 앞서 살펴본 케스, 멩엘베르흐, 하이팅크와 달리 샤이는 상임지휘자에 오른 최초의 외국인입니다. 그래서 네덜란드계 지휘자 계보가 이어지기를 바란 하이팅크는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휘자의 등장보다 관심을 끈 것은, 콘세르트헤바우 건물이었습니다. 콘세르트헤바우는 1972년 문화재급 건물로 지정되었는데 1983년 안전 진단 결과, 지하에 박은 2186개의 목재 말뚝이 습기를 견디지 못해 썩으면서 건물이 점점 내려앉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암스테르담의 토지는 습기가 많고 질퍽하죠. 환상의 음향을 지닌 음악회장이 진흙 속으로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자 1985년부터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고, 개인 후원자들과 시, 정부, 여러 복권기금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합니다. 결국 5000만 휠던을 들여 전면 보수해 새 로비와 출입구가 생겼고, 여기에 매표소와 카페가 자리 잡았습니다.

다시 리카르도 샤이의 이야기로 돌아가죠. 첫 공연부터 주목받은 그의 성향은 하이팅크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케스트라는 박물관이 아니다’라는 신조대로 고전·낭만주의를 넘어 쳄린스키는 물론 바레즈 등의 현대음악도 과감히 선곡했습니다. 물론 현대음악을 정기공연 목록에 넣은 대부분의 지휘자가 그렇듯이, 그도 처음에는 객석이 채워지지 않는 것을 걱정했죠.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곡에 직접 설명을 곁들이는가 하면, 리허설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브루크너·말러의 음악으로 전 지휘자들의 계보를 이어나가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재직 중이던 2003년에는 맥주회사 하이네켄에서 비용을 대어 객석 의자를 전면 교체했고, 이 과정에서 의자 간격이 넓어지면서 75석이 줄었습니다. 2004년 6월 11일 여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샤이는 말러 교향곡 9번으로 작별을 고했습니다.

1988년에 처음 RCO를 지휘한 마리슨 얀손스(2004~2016)는 2004년부터 수석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므라빈스키의 후예답게 쇼스타코비치 해석에 정평이 나 있죠. 그리고 2016년부터는 다니엘레 가티가 새로운 수장으로 RCO를 이끌 예정입니다.

피셰르와 RCO의 궁합?

앞서 RCO의 전용 홀이 우리의 부러운 대상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수석지휘자가 자주 바뀌지 않았다는 점도 꼽을 수 있겠습니다. 120여 년이 역사 속에서 2004년에 취임한 마리슨 얀손스가 여섯 번째 사령탑이니, 평균 20년씩은 고락을 함께한 셈이죠. 이런 끈끈한 애정을 과시라도 하듯 RCO는 수석지휘자들과 차례대로 내한을 했습니다. 1977년 하이팅크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1996년 샤이와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르스가, 2010년 마리슨 얀손스와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이, 그리고 2012년 정명훈의 객원지휘로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선이 내한했죠.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선보이는 이번 내한 공연은 이반 피셰르와 함께합니다. 1983년부터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피셰르는 1987년부터 RCO에 초빙되어 지휘하고 있습니다.

피셰르와 베토벤, 피셰르와 RCO의 궁합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피셰르는 2008년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교향곡 7번(Channel Classics CCS SA 25207)을, 2010년 교향곡 4·6번(Channel Classics CCS SA 30710)을 녹음했습니다.

RCO와는 2010년 4월 소프라노 미아 페르손과 함께한 말러 교향곡 4번(RCO Live RCO 12102)과 바흐 ‘마태수난곡’을 담은 블루레이(Arthaus Musik 101676)를 통해 피셰르와 RCO의 호흡을 미리 감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2013년과 2014년에 RCO와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실황을 담은 블루레이(RCO Live RCO 14109)가 근래에 발매되어 국내에 상륙했습니다.

이번 내한은 베토벤 전곡이라는 ‘양’과 피셰르와 RCO가 보증하는 ‘질’이 한데 어우러진 프로젝트입니다. 2010년대 들어 일본에서는 얀손스/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파보 예르비/도이치 카머필이 베토벤 전곡의 진수를 선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1990년대를 보면 국내 ‘연주자’들이 한 작곡가의 전곡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며 클래식 음악 유입의 깊이를 더했는데,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해외 오케스트라와 한 작곡가의 전곡을 수용할 수 있는 ‘관객’의 감상 체력과 수준, 과감히 투자하는 지갑의 근육이 강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빈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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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듣고 싶은 베토벤 교향곡은?

4일간 열릴 베토벤 전곡 연주회에서 ‘객석’ 독자들은 어느 연주회 날을 가장 기대하고 있을까? ‘객석’은 지난 3월 4일부터 11일까지 8일간 SNS를 통해 이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가장 기대되는 연주회를 뽑아달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41.2%가 교향곡 8·9번(4월 23일)을 뽑아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응답자의 34.7%가 뽑은 교향곡 6·7번(4월 22일), 3위엔 교향곡 1·2·5번(4월 20일)이 올랐다(14.4%).

가장 기대되는 공연으로 교향곡 8·9번을 택한 응답자의 성비율을 보면 남성 39.3%, 여성 42.4%로 여성 관객의 선호도가 약간 앞질렀다. 반면 교향곡 6·7번의 경우 남성 41.7%, 여성 30.3%로 여성보다 남성 관객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자신이 택한 연주가 기대되는 이유로 “4월 22일 ‘지구의 날’에 듣는 교향곡 ‘전원’이 존재의 이유를 일깨워줄 것 같다” “베토벤 교향곡 7번 3악장에서 오보에의 아기자기한 멜로디를 오그린 추크의 연주로 듣을 것이 기대된다” “잘 연주하지 않는 4번을 좋아하는데, 베토벤 교향곡 중 가장 춤추기 좋을 이반 피셰르의 리듬감과 박진감으로 어떻게 연주될지 궁금하다”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 베토벤이 말하는 ‘운명’이란 어떤 것인지 직접 듣고 싶다” 등의 개성 넘치는 답변이 눈에 띄었다.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베토벤 교향곡 연주 조합(지휘자/오케스트라/교향곡)을 묻는 질문에는 조사 인원 중 51.4%인 118명만 응답했다. 이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조합은 ‘카라얀/베를린 필/9번’ ‘클라이버/빈 필/7번’ ‘피셰르/로열 콘세르트헤바우/6번’이 동률을 차지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총 216명(남성 38.9%, 여성 61.1%)이 응답했으며, 연령별로는 20대가 44.9%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고 30대(28.7%), 40대(18.1%) 순으로 나타났다.

정리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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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③ 피셰르/RCO와 함께 내한하는 성악가 2인 인터뷰

바리톤 플로리안 뵈슈

합창에 실린 휴머니티

이반 피셰르/RCO 내한 공연의 대미를 장식할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이날 독창자로 나서는 바리톤 플로리안 뵈슈와 메조소프라노 베르나르다 핑크를 한정호 통신원이 런던에서 먼저 만나 내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편집자 주)


▲ ⓒJurgen Hammerschmid

2011년 오닉스에서 발매한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로 호평받은 바리톤 플로리안 뵈슈가 2015년 한국을 방문한다. 4월 23일 이반 피셰르가 지휘하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베토벤 ‘합창’의 솔리스트 자격이다. 2009년 대전국제음악제에서 헬무트 릴링/슈투트가르트 바흐 콜레기움의 일원으로 방문한 지 6년 만에 두 번째 내한이다.

플로리안 뵈슈는 여느 가수와 비교해 탁월한 혈통을 자랑한다. 그의 할머니는 20세기 중반 빈 슈타츠오퍼를 풍미한 소프라노 루틸데, 아버지는 1970~1980년대 빈 슈타츠오퍼와 메트 오페라를 오가며 인기를 얻은 바리톤 크리스티안이다. 플로리안은 2003년 취리히 오페라의 ‘마술피리’에서 파파게노로 오페라에 데뷔했는데, 1978년 제임스 러바인 지휘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부친이 데뷔한 그 배역이다. 함부르크와 슈투트가르트를 오가며 전막을 소화하는 플로리안을 주목한 이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였다. 이들은 환상의 복식조처럼 2000년대 중반 이후 최근까지 페스티벌과 투어를 함께하고 있다. 2007년 로저 노링턴/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마태 수난곡’을 소화한 이후 폴 맥크리시·아이버 볼튼·르네 야콥스 등의 고음악 전문가들이 종교음악에 그를 중용하고 있다.

유럽 평단은 바흐 오라토리오부터 볼프 리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조를 단정하게 아우르는 뵈슈의 이지적 해석을 주목해왔다. 라이트헤비급 복서 같은 체구를 보면 분명히 더 지를 수 있는 볼륨이 있는데도, 에너지를 폭발하지 않고 치열하게 억제하는 의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빼어난 리트 가수가 타고난 오페라 가수를 겸할 수 있는가의 경계에서 뵈슈는 점점 활동의 비중을 리트로 옮기는 추세다. 2013년 글래스고에서 열린 슈베르트 리트 전곡 연주가 화제를 모았고, 지금은 매 시즌 위그모어가 그를 초청하고 있다. 명반주자 로저 비놀스와 리트 공연을 준비 중인 그를 지난 1월 29일 연주 당일, 위그모어 홀에서 만났다.

오늘 연주할 에른스트 크레네크(1900~1991)의 리트 세계는 어떠한가.

‘오스트리아 알프스에서의 기행문’은 크레네크의 1929년 작이다.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의 무조가 진동하는 1920년대를 거쳤어도 크레네크는 ‘1929년, 조성 음악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쓴 텍스트와 음악으로 보이려 했다. 고전·낭만 시대의 전통을 복제하지 않고, 무조를 쓰지 않고도 그 순간 음악적 문법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나는 크레네크가 그 욕심을 완전히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지적으로 정련된 조성의 사용과 철학적으로 심오한 텍스트의 조합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비뇰스와 연습할 때마다 놀랐다.

텍스트를 처음 읽을 때 소리 내어 읽나, 아니면 눈으로 먼저 의미를 파악하나.

15년 전 크레네크를 처음 접했을 때, 테너 율리우스 파트차크의 음반으로 먼저 그의 작품을 듣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연구할 때 먼저 눈으로 읽고 내 나름의 이해 체계에 텍스트를 집어넣는 방식을 선호한다. 반복해 눈으로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에 이르면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곤 한다. 모방을 하지 않되 무엇이 옳은 해석인가 힌트를 과거 녹음에서 얻는 법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음반에선 사운드를 듣지 않고, 텍스트가 어떻게 음악의 핵심으로 다가가는지 독해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다른 가수들의 볼륨과 사운드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타인의 음반이나 공연에선 콘텐츠에 초점을 맞춘다. 나의 이런 버릇은 파바로티나 제시 노먼의 아리아를 어려서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겐 그들의 비브라토가 중요하지 않았다.

태어난 곳은 독일 자르브뤼켄, 자란 곳은 오스트리아 빈이다. 독일 태생 가수와 오스트리아 태생 가수는 리트를 대할 때 어떻게 다른가.

아버지가 자르브뤼켄 극장에서 일하셔서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내 언어 체계는 빈의 산물이다. 모음과 자음의 발음 형태가 지역마다 다르다. 특히 자음이 분명하게 구별된다.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 오스트리아인의 일반적 독일어 딕션은 ‘자음의 부드러운 발음’이다. 이탈리아어로 표현하면 아스피라토레(aspiratore), 즉 공기를 덜 머금고 발음하라는 것이다. ‘und’를 오스트리아인은 ‘우운’, 독일인은 ‘운-트-’로 발음한다. 독어로 표현하면 엉성하게(schlampig) 자음을 처리하는 게 오스트리안 딕션의 핵심이다. 이것은 리트에서도 마찬가지다.

리트에서 ‘미성이면서 부드럽다’는 비평가들의 찬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미성이면서 부드럽다는 칭찬이 내겐 마치 ‘이탤리언’ 같다는 표현으로 들린다. 푸치니와 모차르트에서 나는 다른 성질의 소리를 낼 수 있는데, 그런 능력은 내 스승 로버트 홀이 찾아준 것이다. 리트와 오페라, 콘서트를 오갈 땐 따로 소리를 단련하기보다 가급적 휴식을 취한다. 오페라 전막을 계속 줄이는 중이다. 이젠 한 시즌에 하나 정도만 하려고 한다. 오페라를 줄이는 이유는, 가족과의 정상적 생활을 영위하고 싶어서다. 투어도 2주 이내에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 다행히 아르농쿠르는 요즘 오스트리아에서만 오페라를 하려고 한다. 그가 취소하면 나도 취소한다. 내겐 베를린도 멀다.

절친한 한국 동료는 누구인가.

지난 1월 중순 소프라노 임선혜와 파리 필하모니에서 하이든 ‘천지창조’를 함께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선 콘비츠니 지휘의 ‘마술피리’에서 아틸라 윤(전승현)과 대기실을 같이 쓸 만큼 친했다.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 리트 공연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공연할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에선 어디에 초점을 맞출 생각인가.

베토벤 ‘합창’은 베이스-바리톤 음역대에서 어려운 곡이다. 계속 앉아 있는 것도 정말 힘들다. 그리고 바리톤이 시작하기 전, 미사일을 발사하듯 총주가 터지는 장면은 관객이 상상해도 끔찍할 것이다. 하이 바리톤은 좀 쉬울 거다. 농담이 아니라, 모든 판단이 처음 베이스-바리톤의 도입부에 집중되기에 기술적으로 힘들다. 그런데 아주 짧은 순간이다.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이 음악이다. 헛기침으로 숨을 고를 시간도 없지만, 행여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걸로 끝일 뿐 좌절하진 않는다. 누구도 공연에서 실수했다고 죽지 않는다. 모든 걸 기대한 관객이 실망했다면, “유감스럽지만 나도 인간일 따름”이라고 답할 것이다. 뇌 수술을 하는 집도의가 아니지 않은가. 칼을 잘못 댄 뒤 “미안합니다. 다른 곳을 찔렀네요”라고 답하지 않아도 된다. 음악에서 중요한 건 ‘휴머니티’라고 생각한다.

메조소프라노 베르나르다 핑크

그 하룻밤의 우아함


▲ ⓒJulia Wesely

‘아르헨티나 출신 클래식 음악가’ 하면 가장 먼저 다니엘 바렌보임과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떠오른다. 유럽에서 건너간 조상부터 이어진 디아스포라의 자취가 어떻게 이들의 건반에 투영되었는지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호세 쿠라나 마르셀로 알바레스같이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1960년대생 가수들의 소리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메조소프라노 베르나르다 핑크의 경우는 특별하다. 1955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핑크는 공산 체제의 학정을 피해 슬로베니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스무 살 이전까지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서른 살이 돼서야 유럽으로 건너갔다. 모국어는 슬로베니아어고, 독일어는 아르헨티나에서 독학으로 시작했지만 유럽 정주 후 오스트리아에서 오래 살아 그곳의 영향을 받았다. 에스파냐어가 태생지 언어지만, 유럽에 온 뒤에는 잘 쓰지 않았다. 지난 3월 14일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내시 앙상블과 협연을 위해 만난 바스크 출신 지휘자 후안호 메나와도 서로 다른 억양과 강세의 에스파냐어로 얘기를 나눴다.

이날 부른 파야의 ‘7개의 스페인 민요’나 ‘사랑은 마법사’에서 핑크의 노래는 무색투명했다. 스페인 본토의 색상이 슬며시 빠진 대신 깔끔한 리릭 스타일의 파야가 위그모어를 메웠다. 지금까지 아르모니아 문디와 하이페리언에서 내놓던 바로크와 리트처럼 이지적이었다. 정열을 노래할 때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귀부인의 자태는 커튼콜에서도 이어졌고, 청초함을 머금은 눈웃음을 보고 있자니 2006년 모차르트 ‘레퀴엠’으로 아르농쿠르/빈 콘첸투스 무지쿠스와 서울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30대 핑크의 목소리에서 바로크 가수의 잠재력을 발견한 건 르네 야콥스다. 야콥스와 20년 넘는 교류를 통해 바흐와 몬테베르디·헨델을 주파했고, 가드너와도 작업했다. 아르농쿠르와 바흐를, 얀손스와 말러를, 반주자 로저 비뇰스와 하이든 리트를 섭렵했다. 최근에는 파벨 하스 현악 4중주단과 드보르자크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여기에 아르헨티나와 슬로베니아 민요까지 커버하는 가수는 현재 핑크가 유일하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은 “전형적인 메조소프라노의 넉넉함보다 남성을 연상시키는 중성적 이미지”의 측면에서 “과거 브리기테 파스벤더의 모습을 베르나르다 핑크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복잡한 정체성만큼 핑크가 국제 성악계에서 점하는 위상도 중층적이다. 예전에는 보통 예순이 되면 무대에서 내려오는 여자 가수가 많았다. 핑크의 롤 모델인 재닛 베이커와 크리스타 루트비히도 예순을 전후해 리사이틀 무대를 은퇴했다. 올해 예순의 핑크는 오페라 전막과 더 이상의 음반 녹음을 중단한 대신 리트와 협연 무대로 활동 폭을 좁히고 있다. 하지만 “시작이 늦은 만큼, 명성도 늦게 찾아왔고, 전성기도 뒤늦게 맞았다”고 스스로를 진단한다. 2014/2015 시즌 만나는 지휘자와 악단이 현재 그녀의 위상을 말해준다. 래틀/베를린 필-런던 심포니, 얀손스/빈 필, 샤이/게반트하우스가 여전히 핑크를 찾고 있다.

지난 3월 14일 런던 위그모어홀 공연에서 부른 파야의 정열과 평소에 지닌 우아함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스페인 곡이 시끄럽고 리드미컬하다고만 보면 안 된다. 연약하고, 부드럽고, 선율적인 작품도 많다. 대신 에너지를 보여주기 위해 붉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유럽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는 개인사 덕에 여러 언어를 배웠을텐데.

나의 강한 억양은 에스파냐·독일·프랑스어에 잘 맞는다. 슬로베니아어나 체코어도 그렇다. 다만 영국식 영어로 된 속요는 잘 맞지 않아 피하는 편이다.

새로운 곡을 접하면 악보만 봐도 목소리에 맞는지 알아낼 수 있는가.

보통 노래를 해보고 목소리를 바꿔보면서 곡의 매력을 찾는다. 가령 고음악에선, 처음에는 지휘자 뜻에 따라 소리를 만들다 차츰 작품을 알게 되면 지휘자에게 내 주장을 펼친다.

르네 야콥스는 30대의 당신을 보자마자 바로 매력을 끄집어냈는지 궁금하다.

보통 지휘자는 작품에서 가수에게 특정 이미지를 요구한다. 그런데 야콥스는 첫 오디션부터 내가 부른 몬테베르디를 존중했다. 심지어 다른 가수가 하기로 한 녹음 작업도 해당 오페라를 잘 모르는 나를 기용해 자신이 하프시코드로 반주해주었다.

소프라노 임선혜의 이야기를 들으니, 당신 같은 신자와 종교곡을 할 때면 야콥스가 보다 신중해진다고 하던데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무신론자 시절에도 야콥스는 종교에 깊은 지식을 갖춘 학자나 다름없었다. 나도 바흐를 부르기 위해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가톨릭 신자라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경지가 마태 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 있다.

리트에서 주도권을 반주자와 어떻게 나누는 편인가.

나는 리트에서 피아니스트를 따라가는 가수는 아니다. 내겐 대화할 줄 아는 반주자가 맞다.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반주자를 환영한다. 리허설은 좋았지만 실연이 좋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리허설처럼 하자는 생각에 서로 배려하다 보면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

당신에게 가장 어려운 건 리사이틀인가.

물리적으로 한 시간 이상 계속 부르는 게 쉽지 않다. 또 단편들이 모두 다른 스토리로 들리도록, 그래서 새로운 전체가 잡히도록 하는 게 지금도 어렵다. 리트 경험은 많지만, 음악과 가사 중 어느 한 부분만 마음에 들 때 이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는 여전히 어렵다.

베토벤 ‘합창’에서 대부분의 청중은 메조소프라노 소리를 분간하기 어려워한다.

공연 중 메조소프라노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면 곡을 잘못 듣고 있는 것이다. 메조소프라노의 역할을 줄인 것이 베토벤 ‘합창’의 설정이다. 메조소프라노 입장에선 음역과 성량의 한계가 명확한 곡인데, 다른 독창자들과 하모니를 이루는 과정은 실제로 큰 도전이다.

2006년 이후, 9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왜 이리 오래 걸렸나.

그러게 말이다. 한국은 왜 이제야 나를 불렀을까(웃음). 지난번 내한 때 테너 베르너 귀라와 서울의 어느 산에 오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임선혜와 유럽에선 여러 번 함께 공연을 했다는 것을 한국 관객도 알았으면 좋겠다. 하룻밤, 아주 짧게 베토벤 ‘합창’의 한 파트를 부르지만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다른 가수들은 은퇴를 고민할 나이다.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 두렵지는 않나.

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은 사람들에게 덜 주목받지만 없어서는 안 될 파트다. 메조소프라노도 어디서든 조화를 이루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지금까지 조화를 꿈꾸는 삶을 살아왔다. 어릴 땐 몰랐지만, 이젠 음악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나이 드는 게 행복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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