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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흐테르 수수께끼’ DVD,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집 음반
리흐테르 탄생 100주년, 두 개의 신보로 만나는 예술가의 또 다른 면모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3/1/2015 |   지면 발행 ( 2015년 3월호 - 전체 보기 )



리흐테르 수수께끼’ DVD,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집 음반

리흐테르 탄생 100주년, 두 개의 신보로 만나는 예술가의 또 다른 면모


체계적으로 배운 일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지만, 여전히 음악 자체로 뭔가를 설명하려 할 때보다 말과 글로 음악을 표현할 때 부족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마음에 들거나 좋아하는 음악가를 표현할 때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내 안에서 늘 먼저 나오는 형용사는 ‘멋있는’ 혹은 ‘멋진’이라는 단어다. 내게 멋있는 음악가란 어떤 존재인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정답은 분명히 하나로 결정되는데, 내게는 그 어떤 것도 신경 쓰거나 의식하지 않고 오직 음악을 위해 살고 있는 듯한 사람이 가장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파란만장한 82년의 삶을 오로지 건반 위에서 만들어내는 음률을 통해 담담히 녹여낸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가 멋진 음악가라는 점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내가 음악 속에서 하기 싫어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분석과 권력입니다. 지휘를 하려면 그 두 가지를 모두 해야 하죠. 그래서 지휘를 하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연주하고 싶은 곡을 연습해 무대에서 연주합니다.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있지만, 청중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하니까 상관없어요. 내가 만족하면 청중도 좋아하겠죠.”
어릴 때부터 오데사 국립 오페라·발레 아카데미 극장에서 반주자로 일했으며 바그너 오페라의 전체 성부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고 하니, 만약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우리는 오페라 지휘자 리흐테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단 한 번이지만, 리흐테르가 지휘자로 무대에 선 적이 있다. 갑작스러운 손 부상으로 생긴 공백기에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하는 프로코피예프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지휘한 깜짝 음악회가 그것이다.


▲ '리히테르 수수께끼’ DVD Aulos Media ADVD 064 (2DVD) 브뤼노 몽생종(연출)


▲ 리히테르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집 Sony Classical S80104C/88875069552 (4CD)

허심탄회하게 마주하는 예술가의 초상
리흐테르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발매한 브뤼노 몽생종 감독의 다큐멘터리 DVD ‘리흐테르 수수께끼’는 이렇게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음악가들의 생생한 뒷얘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자 생의 마지막 순간 작은 메모장 하나를 앞에 두고 덤덤히 털어놓은 연주자 자신의 회고담이다.
이 영상물이 귀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무엇보다 리흐테르가 평생 온갖 종류의 미디어와 차단된 삶을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여러 오해와 루머에 대해 설명하는 리흐테르의 자세는, 극도의 카메라 기피증 때문에 거의 ‘몰카’ 수준으로 찍어야 했던 몽생종 감독의 숨은 고생에 비하면 의외로 솔직하고 편안해 보인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독일 혈통이라는 이유로 소련에서 당해야 했던 아픈 과거를 드러내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점이 눈에 띄며,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혀야 했던 기구한 운명 속에서 탁월한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유일한 스승이자 연주자로서 길을 열어준 은인 겐리히 네이가우스에 대한 찬사와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독보적 능력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명교수이자 스타니슬라프 부닌의 할아버지 정도로만 알려진 네이가우스에 대한 자료로서도 중요하다.
주변 지인들에 대한 평가와 함께 그들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리흐테르답게 냉철하고 신랄한 동시에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연주자로서 성공하는 데 큰 발판이 되어준 프로코피예프에 대해서는 ‘최고의 천재였으나 거칠고 날카로운 성격’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에 대해 좋지 않게 말했던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의 장례식에 가서 연주한 일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언급하고 있다. 또 자신의 쇼팽 음악 연주에 찬사를 보낸 글렌 굴드의 말에 “내 연주를 듣고 글렌 굴드 자신이 쇼팽에 대한 애정이 좀 더 생겼으면 바랐다”고 답하는 그의 의견을 듣고 있자면, 일견 모든 일에 무관심한 듯 보이는 리흐테르가 사실은 자신과 그 주변의 음악 세계에 대해 지극히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지니며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암보를 하지 않느냐고요? 기억력이 안 좋아져서라기보다는 왜곡하는 게 두려워서 그렇다고나 할까요. 난 악보 속의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미숙한 기억력 때문에 악보에 있는 요소를 모두 구현해내지 못하면 안 되기에 악보를 놓고 연주합니다. ‘나만의 해석’ 같은 건 없어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외울 수 있는 레퍼토리가 여든 개의 독주회 분량이었던 경이로운 능력을 지닌 천재가 자신의 연주 시작과 끝은 오직 ‘악보’라고 얘기하는 점은 결코 오만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그 밖에도 이 다큐멘터리에는 당시 홀대받던 슈베르트의 작품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에 올린 일이나, 거장 카라얀과의 음악적 이견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고백한 인터뷰, 평생 음악적 동반자였던 소프라노 니나 도르리아크의 증언, 그리고 이외에 흔히 만날 수 없는 영상 자료 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선명한 음향으로 재탄생한 거장의 피아니즘
“처음으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무대에서 연주한 건, 약 한 달간의 연습 후 트빌리시(그루지야의 수도)에서였습니다. 결과는 매우 나빴죠. 얼마 후 바쿠(아제르바이잔의 수도)에서 연주할 때는 조금 나아져서, 계속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평론가들은 한동안 ‘리흐테르가 언제까지 우리를 바흐로 고문할 것인가’라는 등의 기사를 쓰곤 했죠.”
수많은 리흐테르의 기록 가운데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대표적 레퍼토리였던 바흐의 작품을 새로운 리마스터링으로 만나는 반가움은 남다르다. 여러 차례 이슈화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전집은 그 다양한 음색 이상으로 리흐테르의 피아니즘을 이루는 특징 거의 전부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에 대한 순도 높은 집중력은 이 연주가 선사하는 최고의 하이라이트다. 고풍스럽고 유희적인 바로크 양식, 푸가에서 나타나는 서정적인 프레이즈, 그리고 센티멘털한 요소와 과감한 화성 진행까지 다양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음악 외적으로 상상력이 뻗어나가고 자칫 과장될 수 있는 자의적 해석의 위험성을 리흐테르는 촘촘히 짜인 음상의 완벽한 배열과 파우제마저도 음악으로 느끼게 하는 강한 카리스마의 아고기크로 튼튼하게 막아놓는다.
당당한 직관력 역시 리흐테르만의 천재성이다. 프렐류드와 푸가가 대조적인 성격으로 되어 있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이거나를 막론하고 음악의 흐름과 진행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가 악보를 처음 받고 연습할 당시에 받은 느낌을 본능적으로 펼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뭇 달라진 음향 역시 흥밋거리다. 평소 리흐테르가 선호했던 다소 납작한 음상과 금속성이 섞인 소리를 예전보다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는 놀라움이 크지만, 각 음역대의 균형이 지나치게 짜 맞춰진 느낌이 드는 부분은 아쉽다. 그 결과 한 곡 안에서 악기의 소리를 듣는 위치가 여러 번 바뀌는 듯한 곡도 있는데, 이러한 점은 차분한 감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아울로스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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