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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발레 VS 버밍엄 로열 발레
21세기 영국 왕립 발레를 이끌어가는 두 단체의 자존심 대결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11/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11월호 - 전체 보기 )


▲ 케네스 맥밀런 작 ‘마농’을 열연하고 있는 페데리코 보넬리와 마리아네라 누녜스 ⓒAlice Pennefather



스타 캐스팅의 케빈 오헤어와 빛나는 아이디어의 데이비드 빈틀리. 영국 왕립 발레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두 단체의 치열한 경쟁은 계속된다 


20세기 이후 영국 왕립 발레를 지탱해온 두 축은 런던의 로열 발레(이하 RB)와 버밍엄 로열 발레(이하 BRB)다. 지난 10월, RB와 BRB가 런던 한복판에서 자존심 대결을 벌였다. RB는 2014/2015 시즌의 전막 오프닝작으로 케네스 맥밀런 안무의 ‘마농’을 코번트 가든에 올렸고, BRB는 새들러스 웰스 극장에서 단장 데이비드 빈틀리 안무의 ‘미녀와 야수’와 트리플 빌 ‘전쟁의 그림자들’을 공연했다. ‘마농’은 맥밀런 안무 40주년을 기념했고, ‘전쟁의 그림자들’은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상징하는 단편들을 엮었다.

RB의 ‘마농’은 국내 팬과도 인연이 깊은 작품이다. 1978년과 2005년 두 차례 국내 팬과 만났다. 2005년 세종문화회관과 대전문화예술의전당으로 이어진 투어에선 대시 부셀·알리나 코조카루·타마라 로호가 주역으로 절대 호연을 보였다. 9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코번트 가든에서 열린 18회 캐스트엔 총 아홉 명의 마농과 데 그리외가 올랐다. 라우라 모레라·호베르타 마르키즈·마리아네라 누녜스·세라 럼이 RB의 직전 ‘마농’ 프로덕션이던 2011년 당시의 마농 역의 경험자들이고 노장 세나이다 야노프스키가 2006년 이후 8년 만에 마농 역에 복귀했다. 이들 가운데 마리아네라 누녜스·페데리코 보넬리 페어가 오프닝과 함께 유일하게 3회 공연을 따내며 노장 멤버의 자존심을 세웠다. RB 공연을 HD 화질로 세계에 공급하는 ‘라이브 인 시네마’의 중계 역시 마리아네라 누녜스·페데리코 보넬리 조합을 송출했다.


▲ 마농과 데 그리외의 즐거운 한때 ⓒDave Morganelli

▲ 마농이 GM과 레스코 사이를 오가는 장면 ⓒAlice Pennefather

10월 4일 공연엔 이들과 함께 레스코 역에 리카르도 세르베라, GM 역에 크리스토퍼 샌더스, 레스코의 정부 역에 라우라 모레라가 함께했다. 이날의 주역과 조역들은 맥밀런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마이얼링’에 수없이 오른 RB 전통의 수호자들이다. 프레더릭 애슈턴에서 케네스 맥밀런으로 예술감독이 바뀌면서 비극 소재가 어떻게 낭만성을 구체화하는지 몸으로 영국식 은유를 설명했던 댄서들이다. 누녜스의 이날 마농 연기는 퇴폐미와 도도한 품위의 경계를 묘하게 오가며 파국의 비극성을 심화시켰다. 데 그리외 역의 보넬리는 과거 조너선 코프가 그랬듯, 드라마틱 발레에서 남자 주인공의 역할이 커질 때 감정선을 지키는 연기로 기품을 배가하는 댄서다. 보넬리가 고뇌하고 홀로 서 있으면 니콜라스 게오르기아스가 디자인한 세트를 배경으로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보통의 데 그리외가 감정을 분출하며 비틀거리는 ‘그랑 파 디브레스’로 갈등을 극대화하지만 보넬리는 연인과 최후를 준비하면서 고통의 크기를 점점 키우는 방식으로 관객과 조응했다.

11일 마티네 공연엔 라우라 모레라가 마농 역을, 최유희가 레스코의 정부 역을 맡았다. ‘마농’은 최유희의 RB 데뷔작이다. 2003년 2월 3일, 그녀가 처음 코번트 가든에 올랐을 때 맡은 역은 광장에서 웅성대는 식모였다. 2년 뒤, 대전 공연에서 최유희 배역은 3막의 버림받은 매춘부였다. 교도소장의 유린에 맞서 짧게나마 저항의 솔로를 출 수 있는 역할로 진출했다. 2009년과 2011년의 ‘마농’에선 파티에서 만난 부자들과 어울리는 고급 창녀로 비중이 더 커졌다. 그리고 2014년, 레스코의 정부에 올랐다. 최유희의 11일 연기에 대해 ‘텔레그래프’지는 ‘애간장을 녹이는 정부’라고 리뷰했지만 평소 자신하던 “맥밀런에 정통하다”는 테크닉을 보일 공간은 적었다. ‘마농’에서 코믹 조역에 집중하는 것이 비로소 주역을 차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 경우는 모레라의 선례가 있다. 현 RB 예술감독 케빈 오헤어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멜리사 해밀턴과 잉글랜드 서식스에서 자란 프랜시스카 헤이워드를 ‘마농’의 주역으로 데뷔시켰다. 두 무용수 모두 최유희보다 늦게 RB에 입단했지만 최유희와 같은 퍼스트 솔로이스트에 위치하고 있다.

런던 관객이 주목한 공연은 따로 있었다. 나탈리야 오시포바·카를로스 아코스타와 세나이다 야노프스키·로베르토 볼레 페어가 일찌감치 매진을 기록했다. 오시포바는 10월 7일 공연이 ‘마농’ 데뷔였다. 그녀는 날카로운 고난도 기교가 요구되는 연출신에서 자신의 테크닉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좌중을 압도했다. 특히 3막 파드트루아에서 공중에서 몸을 두 번 돌리는 기술은 유연성과 순발력 면에서 발군이었다. 그러나 테크니션 오시포바도 굴곡이 있는 맥밀런식 스텝에 제대로 적응했는지는 의문이 남았다. 쥘 마세느의 아다지오 패시지에선 서두르는 감이 자주 보였고 남성이 주도하는 파드되에서도 자신의 관능을 내세우는 상체 연기는 맥밀런식 언어와 이질적이었다. 오시포바는 10월 밀라노와 런던을 오가느라 RB 군무진과 손발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았고, ‘이브닝 스탠더드’지와의 인터뷰에선 “아직 영어 사용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오시포바가 ‘돈키호테’ ‘지젤’뿐 아니라 애슈턴·맥밀런 작품에서 얼마나 독자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느냐에 따라 러시아를 계승하면서 새 전통을 축적해온 RB 역사의 두께가 달라질 것이다.


▲ 질리언 린이 재창작한 ‘고르발의 기적’의 한 장면 ⓒBillCoop

선후배 사이였던 두 예술감독의 기 싸움


RB 예술감독 케빈 오헤어(1965년생)는 BRB 무용수와 행정 스태프 시절, 여덟 살 손위인 현 BRB 예술감독 데이비드 빈틀리를 선배와 예술감독·단장으로 보좌했다. 빈틀리는 로열 발레학교 출신으로 1980년대 후반 RB 상임 안무가를 역임했고 2000년대 모니카 메이슨 발레 단장 재임기에는 ‘사계’(2003)와 ‘여왕에 대한 경의’ 중 ‘흙’(2006) 등에서 안무를 담당하는 등 RB의 DNA를 지속적으로 공유한 ‘로열 발레맨’이다. 그러나 오헤어 체제 출범 이후 RB와는 아직까지 뚜렷한 인연을 잇지 못하고 있다. 후배이자 부하 직원, 안무 지도 대상이던 오헤어가 RB를 차지한 2012년 하반기 이후 빈틀리는 BRB 런던 투어에 세심함을 더하는 인상이다.

이번 투어는 3월 런던 콜리세움 ‘파고다의 왕자’ 이후 올해에만 두 번째 런던 나들이이다. 빈틀리가 2011년 재팬 발레를 겸직할 때 실험한 ‘파고다의 왕자’는 1957년 존 크랭코 버전, 1989년 맥밀런 버전의 생명력이 2010년대에 유효한지 실질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빈틀리는 런던 투어 작품을 통해 누가, 어디에서 나인레트 드 밸로이스와 애슈턴·맥밀런으로 이어지는 영국 발레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이어가는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10월 17일 새들러스 웰스 극장에 오른 작품은 맥밀런의 1979년 작 ‘하루의 끝’, 1944년 로베르트 헬프먼의 원작을 올해 질리언 린이 재안무한 ‘고르발의 기적’, 그리고 빈틀리의 1985년 작 ‘숲 속의 꽃들’ 트리플 빌이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와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지가 올 초 예견한 대로 2014년을 주도한 예술 화두는 ‘제1차세계대전’이다. 영국은 이미 4년 전부터 5,000만 파운드(약 860억 원) 규모의 기금을 마련했고 발레계도 신작으로 추모 열기에 동참하고 있다. 올해 4월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가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아크람 칸·러셀 말리펀트의 신작을 제작한 반면, BRB는 사실상 린의 재창작 작업에만 제작 예산을 집중했다.


▲ 맥밀런의 재치가 묻어나는 ‘하루의 끝’ ⓒBillCooper

▲ 스코틀랜드의 발라드가 전면에 부각된 ‘숲 속의 꽃들’ ⓒRoySmiljanic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반주로 한 ‘하루의 끝’은 작품에 정반대의 의미를 동시에 응축시키는 맥밀런의 재치가 묻어나는 작품이다. 맥밀런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게 일상을 보내는 젊은이들 이면에, 그들이 얼마나 각박하게 전쟁 같은 현실을 필사적으로 회피하는지 양면성을 보이고 싶었다. 1악장에선 분홍과 노랑·녹색으로 멋을 낸 남녀 댄서들이 골프와 수영복을 입고 등장한다. 2악장에선 물안경 차림의 여성 댄서가 자신을 선망하는 다섯 명의 남성과 노니는 풍경이 그려졌고 종악장에선 젊은이들이 다시 파티에서 여흥을 즐기는 장면이 묘사됐다. 일차적으로 전쟁과 일상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메시지가 전해졌고, 부차적으로 라벨을 힘들게 한 전쟁의 상흔들이 옴니버스의 주제와 알레고리를 맺었다. 맥밀런은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추듯 작품 속 악장을 분절하길 즐겨했다. 퍼스트 솔로이스트급 단원들이 주역으로 나섰지만 그동안 영국 발레의 전통에 대해 예술감독과 공유한 스타일을 마음껏 뽐냈다.

1940년 제2차세계대전 중의 글래스고를 배경으로 한 ‘고르발의 기적’은 마이크 바인더가 시나리오를 쓰고 아서 블리스가 작곡한 헬프먼의 원안무를 기초로 1970년대까지 헬프먼과 교류했던 여든여덟 살의 질리언 린이 BRB의 의뢰를 받아 복고 감각으로 재생한 댄스 드라마다. 70년 전 초연 당시 열일곱 살이던 린은 “오늘날 누구도 초연 당시의 스텝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사실상 재창작에 들어갔다. 시놉시스의 전개는 현대극으로 되살리기에 무리가 있다. 부둣가의 젊은 여인이 자살을 시도하고 지역의 관리가 그녀를 되살리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이 그녀를 살려내며 지역민의 추앙을 받고, 이를 시기한 관리가 이방인을 청부 살해하면서 막을 내리는 과정이 시종일관 우연과 돌출 행동으로 채워지고 있다. 발레 테크닉을 요구하기보다 캐릭터의 연기로 긴장을 유지하는 패턴인데 린의 노련한 동선 배치로 작품의 흐름은 매끄러웠다. 1940년대, 전쟁하에 영국인의 사고방식은 무엇이었는지 작품으로 또 하나의 기록을 찾아가는 빈틀리의 의도는 2000년대 이후 정책적으로 정신적 무형유산, 바로 유산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영국예술평의회의 방침과 일맥상통한다.

마지막 작품 ‘숲 속의 꽃들’은 아우구스트 브루농빌의 ‘라 실피드’를 연상케 하는 동시에 스코틀랜드의 발라드가 전면에 부각됐다. 그러나 전쟁과의 상관성을 찾기 위해 16세기 제임스 4세 시절의 에피소드를 끄집어낸 것은 인위적인 감이 없지 않았다. 스타 캐스팅의 오헤어와 아이디어의 빈틀리. 21세기 영국 왕립 발레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두 단체의 보이지 않는 경쟁은 앞으로도 더욱 치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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