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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머리 페라이어
서정적 피아니즘, 한 편의 교향시가 되다
글 국지연 기자 11/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11월호 - 전체 보기 )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정신적 향기다. 향기 없는 아름다움은 생동감을 잃기 때문이다. 시인의 향기를 지닌 피아니스트 머리 페라이어가 11월 10일과 11일(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ASMF)와 함께 한국 무대를 찾는다



피아니스트가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머리 페라이어는 연말이면 언론 단체에서 조사하는 설문 중 한국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연주자로 꼽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어떤 매력이 한국 연주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젊은 시절부터 그의 연주를 지켜봐온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평론가인 최현숙은 ‘진지하고 묵묵한, 그러나 따뜻한 인품과 단정함을 지닌 그의 연주 때문에 지금도 그의 음악을 아끼고 즐겨 듣는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연주자는 참 많이 있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연주자는 더욱 많습니다. 현란한 기교와 과장된 몸짓의 엔터테이너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러나 감동을 주는 연주자, 그것도 들을 때마다 그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기는 연주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월이 가도 기교나 음악적으로 변하지 않는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세월 속에서 나태하고 퇴보하는 연주자가 있지요. 페라이어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더 깊고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연주자입니다. 그가 무대에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녹여내는 연주를 할 때면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스며듭니다.

저는 피바디 유학 시절부터 1980년대의 젊은 페라이어의 연주를 꾸준히 듣고 지켜봐왔습니다. 그는 시간이 선물한 기쁨과 환희, 슬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보듬으며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킨 연주자죠. 그 세월 동안 어려움도 있었고 공백도 있었고 또 지휘자로 외유를 하기도 했지만 변함없는 것은 음악을 대하는 그의 정직함과 진정성이었습니다. 젊은 날, 무리하게 긴 레퍼토리를 끝까지 땀을 흘리며 연주하던 성실한 자세를 지금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수줍은 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던 그 순수함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이 그렇게 성숙해지고 능숙해졌지만 그 안에 어떤 허세나 거드름의 흔적이 없습니다. 불필요한 과장된 몸짓도 없고요. 그저 음악이 요구하는 고유한 본질에 충실하려는 연주가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그렇고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도 그런 모습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의 바흐 연주를 들을 때마다 저 또한 피아니스트로서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흐가 가진 고유한 울림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연주 자체를 장식하기 위한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는 그의 바흐는 아름다움을 넘어 경건함 마저 안겨주지요. 인간적인 한계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음악의 본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주자, 페라이어는 아마 이 시대가 나은 가장 정직하고 따뜻한 연주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매 순간 순수한 피아니즘으로 감동을 전해온 페라이어에게 이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거장답지 않은 겸손함으로 삶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INTERVIEW


INTERVIEW


한국에서 이번 연주를 하는 소감이 궁금합니다.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 함께 이번 시즌에 4~6주간 연주 투어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워낙 훌륭한 오케스트라이기 때문에 저 역시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연주에 임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음악 작업은 솔로 연주와는 또 다른 기쁨을 주지요. 그래서 지휘를 하며 음악 속에 있는 것이 정말 행복합니다. 그 기쁨을 이번 무대를 통해 한국 관객과 깊이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의 연주자들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래서 그랬던 건지 연주를 위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즐거웠습니다(웃음). 특히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슈베르트 소나타를 연주했었는데요. 연주 내내 관객이 내 연주를 귀 기울여 듣던 느낌은 지금도 제 마음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연주 후 터졌던 뜨거운 박수와 격려는 제게 너무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슈베르트와 저, 그리고 청중, 이렇게 하나가 된 순간이었지요.

피아노를 연주한 것이 지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피아노는 한 개 이상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이지요. 오케스트라는 여러 목소리를 내는 음악이기 때문에 제게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경험이 지휘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휘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물론 지휘는 제 전문 분야는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지휘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지휘를 하면서 만났던 좋은 연주자들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제게는 선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음악가들과 함께 고민하고 이뤄가는 과정 속에서 또 하나의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 무엇인가를 함께 탐구하고 만들어간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이번에 연주할 작품들이 스트라빈스키 연주를 제외하고는 바로크, 고전 시대의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10일:스트라빈스키 협주곡 ‘덤바턴 오크스’, 하이든 교향곡 77번,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11일:멘델스존 심포니아 7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엘비라 마디간’, 바흐 피아노 협주곡 7번, 하이든 교향곡 94번 ‘놀람’) 그 중에서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엘비라 마디간’과 바흐 피아노 협주곡은 당신의 서정적인 피아니즘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은데요.

이번 내한 공연 프로그램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바흐 피아노 협주곡이 많이 기대됩니다. 바흐 피아노 협주곡은 몇 해 전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 함께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은 영국 실내 관현악단과 음반으로 녹음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내에는 연주한 적이 없지만 그전에는 종종 연주했던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11월 10일 첫날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그야말로 이번 프로그램 중 가장 도전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 속에는 큰 목관 파트가 있어서 오케스트라가 특히 강렬한 사운드를 내야 하고 피아노 역시 음악적으로 오케스트라와 서로 조율하면서 연주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곡입니다. 하지만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와 함께 이 작품을 연주하게 되어서 제게도 도전이 되고 기대가 큽니다. 최근에 이미 잘츠부르크와 파리, 루체른 등 몇몇 곳에서 이 곡을 연주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연주자가 있지만 결국 세월이 지나 끝까지 무대를 지키며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연주자는 많지 않습니다. 좋은 연주자에게 필요한 요건은 무엇인가요?

연주자는 가장 우선적으로 자신의 악기가 피아노든 바이올린이든 첼로든, 악기를 통해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연주해야 합니다. 진심을 담아 연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악에 일관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저 아름다운 선율 다음에 또 다른 아름다운 선율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화하며 하나의 완성된 서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작품 전체를 보는 능력과 작품의 부분 부분이 모여 어떻게 전체를 이루는지 이해하는 능력을 갖춰야겠지요.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분위기나 메시지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가 급속도로 자본주의화되면서 정신보다 물질을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큰데요. 클래식에 대한 관심 역시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음악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음악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숨을 쉴 수도 없습니다 . 음악이 없는 저 자신은 너무나 비참하고 의미 없게 느껴집니다. 저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장엄한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음악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진정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을 추구하려는 열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사람을 영적으로 더 풍요롭게 해주고, 삶을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지요. 우리 모두에게는 음악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음악은 무엇인가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군요. 인간의 존재와 가장 밀접한 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끔 해주는 하나의 언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년까지 아시아 연주 투어와 솔로 리사이틀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많은 연주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술가로서 인생의 최고의 목표와 꿈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제게는 항상 더 좋은 음악가가 되고 싶은 꿈만이 있을 뿐입니다. 음표와 악보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고, 알고 싶습니다. 베토벤이 왜 특정한 곳에 B장조를 썼는지, 이런 것들을 모두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작곡가가 음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작곡가가 작곡을 할 때는 오선지에 그저 단순히 음표만을, 그것도 듣기 좋은 음표만을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전하고 싶어 했던 영적인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곡이 쓰인 시대에 대해 공부하고, 당시의 철학과 시, 그리고 작곡가에게 영향을 끼친 것들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것들에 대해 늘 호기심을 갖고 공부합니다. 음악에는 끝이 없지요. 그렇게 매일매일 더 좋은 음악가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글을 천 번 읽으면 시가 된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언어를 다듬고 또 다듬어야 가장 정제된 ‘시’가 되는 것일까? 피아노의 시인 페라이어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이 어떻게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는지 피아노로 들려주는 연주자다. 그동안 청중의 가슴을 울린 것 역시 그의 놀라운 테크닉이 아니라 음악을 향한 진심이었다. 그것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페라이어를 기다리는 이유일 것이다. 이제 숨겨둔 우리 마음속의 시 한 편을 꺼내볼 때다.


머리 페라이어 &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 내한 공연


11월 10~11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외

 

사진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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