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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보이첵’ 연출가 윤호진
8년의 시간으로 빚어낸 역작
글 김선영 기자 10/1/2014 |   지면 발행 ( 2014년 10월호 - 전체 보기 )




윤호진이 연출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래, 수많은 영감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고, 시간을 머금으며 가슴속에서 꽃피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태어난 크고 작은 작품들은 무대 위로 쏟아지는 빛 가운데서 관객들과 만났다.

윤호진을 잘 모르거나 공연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을 한 번이라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사책이나 위인전에 박제되어 있던 명성황후, 의사 안중근을 소환해 지극히 상업적인 논리로 돌아가는 뮤지컬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두고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것이나, 한 공연을 5년, 10년 넘게 무대에 올려가며 꾸준하게 작품을 키워온 ‘뮤지컬계의 대부’ 윤호진의 심지와 열정은 그야말로 유일무이하다.

언제였던가, 윤호진이 런던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가보다 했다. 고백하건대 그냥 무심했다. ‘명성황후’ ‘영웅’ 그리고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나오려나보다 했다. 그러던 지난겨울, 윤호진이 런던에서 꾸리던 뮤지컬을 한국에서 먼저 선보일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게다가 그 작품이 종전의 ‘윤호진 스타일’과 매칭하기 힘든 ‘보이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다소 의아했고 또 궁금했다. 반면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작품들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죠. ‘명성황후’ ‘영웅’이 국가적인 아픔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개인의 사랑과 아픔에 초점을 두고 싶었어요. ‘보이첵’은 1879년에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에 올려온 작품이기도 하죠. 또 세계시장을 고려했을 때 ‘사랑’이라는 보편성, 개인의 처절한 아픔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부조리극의 시초로 평가받는 게오르크 뷔히너의 미완성 희곡 ‘보이첵’을 윤호진이 처음 만난 건 대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독일의 한 극단이 선보인 연극이 그의 가슴을 울렸고, 그때의 강렬함은 두고두고 가슴 한편을 차지해왔다. 이후 대사에 음악을 더했을 때 ‘보이첵’에 서려 있는 아픔의 깊이가 무한대로 커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이끌었다. 여기에 ‘명성황후’ ‘영웅’으로 이미 브로드웨이를 경험하며 창작 뮤지컬이 해외에 나갔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절실히 느꼈던 윤호진은, 개발 단계부터 해외 스태프와 협력해 그들의 시선과 감성으로 채색한 작품이 나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영어 작품으로 탄생한 뮤지컬 ‘보이첵’은 원작의 난해함을 덜어내고, 두 주인공의 순수한 사랑과 헌신, 그로 인한 비극에 초점을 맞췄다.



▲ 2012년 런던 채링크로스 극장에서 ‘루비목걸이’라는 부제로 공연된 2차 워크숍 현장 ⓒ에이콤인터네셔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보낸 시간, 8년

뮤지컬 ‘보이첵’ 기획을 시작한 이후 2006년 9월 비영리 공연을 주로 제작해온 런던 그리니치 극장과 함께 작곡과 대본을 맡을 창작자를 오디션 형태로 공모했다. 50여 팀이 지원한 가운데 크리스 브로더릭과 롭 셰퍼드가 한 팀을 이룬 싱잉로인스가 최종 선발됐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펍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에 가까운 인디밴드였던 이들은 한마디로 런던에서 캐낸 원석이었다.

“지금까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어요. 얼핏 포크송 같은데, 때 묻지 않은 느낌이죠. 대본 자체도 신선하게 와 닿고. 나중에 알고 보니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적도 없어요. 악보를 그릴 줄 몰라서 현지 편곡자가 이 친구들 연주를 채보해 악보로 옮겼어요.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가난한 데, 보이첵의 고통을 누구보다 삶에서 체감했기에 그게 음악에 그대로 담겼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 원석이라 그걸 다듬고 정식 무대에 올리기까지 8년이 걸린 거죠. 지금은 한국에서 편곡을 맡은 장소영 음악감독이 죽으려고 해요. 워크숍 때는 주요 넘버들만 하니까 별문제가 없었는데, 무대에 정식으로 올릴 작품을 만들려고 여기저기 들춰보니 생각보다 미진한 부분이 많더라고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보낸 시간들이 해를 넘기를 반복하던 사이, 웨스트엔드에서 ‘스프링 어웨이크닝’ ‘라카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나이절 릴리와 캐머런 매킨토시 프로덕션 상임 연출가로 활동하며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의 런던 프로덕션을 맡아온 맷 라이언이 합류해 2차 워크숍을 치렀다. 워크숍을 본 현지 관계자들이 던지는 공통된 평가는 “다 좋은데, 뭔가 확실한 게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누구나 마음이 조급할 만한 상황에서 윤호진은 느리게 걷기를 택했다.

“좋은 작품은 짧은 시일 내에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해요. 수정을 거듭하면서 마지막엔 제가 직접 개입해 작가를 붙들고 3차 드래프트 작업을 했죠. 런던에서 작품을 올릴 만한 극장을 찾기도 쉽지 않았어요. 중극장 규모가 작품에 적절하다고 생각한 저와는 달리, 런던의 관계자들은 그들의 관례상 소극장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죠. 그러던 중 LG아트센터가 공동 제작사로 참여하면서 진행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어요. 그 후 공연을 앞두고 ‘보이첵’은 또 달라져 있어요. 과정을 반복할수록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드러나고 그것들을 보완해가는 중이죠. ‘명성황후’도 그런 식으로 10년 동안 고쳤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제 스스로도 생각하는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그러면서 명작이 완성되는 거 아니겠어요?”


▲ ‘보이첵’ 연습 현장

윤호진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쯤 되니 제작비 규모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2012년 창작뮤지컬육성지원사업 재공연 부문에 선정된 ‘영웅’을 올리면서 당시 티켓 가격을 최고가 5만원으로 책정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 당시 뮤지컬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광고비로 소진되면서 티켓 값이 오르고 그 외에 따라붙는 티켓 할인, 초대권을 당연시하는 풍토로 인해 악순환이 계속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티켓 가격 거품 제거’를 외쳤던 윤호진이 아니던가.

“이 규모로 런던에서 제작하려면 적어도 50억 원 이상 들어갈 겁니다. 이번 무대는 세트나 조명은 기본적인 것들만 가져가고, 특히 무대미술은 대부분 기존에 사용했던 것들을 재활용하고 있어요. 무대에서 중요하게 배치할 갈대는 다른 작품에 썼던 걸 창고에서 12년 만에 꺼낸 거예요. 아직도 멀쩡하고, 그래서 더 고색창연해졌어요. 의상도 한국에서 제작하고. 이번 공연 제작비는 13억 원 규모예요. 기존 라이선스 뮤지컬에 비하면 저예산이죠.”

뮤지컬 ‘보이첵’은 티켓 가격을 최고가 8만 원(R석)으로 책정했다. 뮤지컬 제작비와 티켓 가격에 관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창작 뮤지컬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는 영화계 관객 수요가 외화에서 국내 영화로 중심축이 이동했듯 뮤지컬 역시 몇 년 안에 시장이 재조정되면 창작 뮤지컬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건넸다. 해외에서도 ‘위키드’ 같은 규모의 작품은 이제 더 이상 나오기 힘들거니와 국내에서도 대형 라이선스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어려운 구조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

“창작극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만들지 못하고, 그나마 몇 번 시도하다가 망해서 더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상당수죠. 프로젝트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요. 개인이든 정부든 결과물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롱런하기가 힘들죠. 게다가 창작 뮤지컬은 대관이 잘 안 돼요. 정부가 조성한 펀드를 받으려 해도 재무제표에 걸려서 통과가 안 되고, 라이선스 뮤지컬이 우선순위로 가게 되죠. 대개 라이선스 뮤지컬은 극장을 잡아야 펀딩 받을 수 있으니 거기에 사활을 걸게 돼요. 그런데 정작 대관을 받아도 재정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대관료를 다 못 내서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죠. 그 사이에 대관 사업에 주력하는 극장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모두가 조급하고, 또 조급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그들에겐 내가 ‘보이첵’을 만들면서 보낸 8년이라는 세월이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일 겁니다.”

한 작품을 만드는데 평균 4~5년의 시간을 쏟아왔던 윤호진의 작업 방식을 떠올리다 보니, 오랜 시간 작품을 끌고 나가는 그 믿음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장은 오래될수록 맛있다지만, 자칫 공연은 뚜껑도 못 열어보고 버리는 일들이 허다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는 언제 뚜껑을 열지는 자연스럽게 결정된다고 말한다. 5년 담근 ‘영웅’도 처음 무대에 올렸을 땐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는 것. 이렇게 작품을 담그다 보면 7~8년은 훌쩍 지나간다고.

“시간개념이 다른 사람들과 좀 달라요. 우리에겐 물리적 시간과 상징적 시간이 있죠. 상징적 시간은 그 흐름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실제 공연 하는 2시간 30분이 물리적으로는 길지만 관객은 1시간으로, 그보다도 더 짧게 느낄 수도 있어요. 이 시간의 마술이 공연 안에 들어가야 해요. 그래야 작품이 성공할 수 있죠. 작품을 만드는 데 8년을 보냈어도 신나고 재밌으면 그건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에요. 40년 전 연극을 처음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지겹게 시간이 흘렀으면 벌써 죽었겠죠. 그 세월이 고통스러웠지만 즐거운 시간으로 환원이 되니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겁니다.”

윤호진의 이야기에서 “가치 있는 것을 하는 데 있어 늦은 때는 없고,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는 데 있어 시간의 제약은 없다”는 어느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그는 분명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10월 9일부터 LG아트센터에 펼쳐질 뮤지컬 ‘보이첵’ 무대 위에는 주인공 보이첵과 그의 연인 마리 사이에서 벌어진 3일간의 에피소드가 24시간의 흐름 속에 회화적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윤호진이 연출해낼 시간의 마술이 궁금한 사람은 역삼동 갈대숲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시길!

글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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